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녔고, 한국을 떠났어도 매년 한두번씩 찾아 가는 낯 익은 서울이었지만, 그 한 복판에 있는 탑골 공원과 종묘를 가 본다고 마음 먹은 지 상당히 오랜만에 2018년 4월 18일 아침에 탑골공원에 갔다.
내 기억에 이곳을 처음 본 것은 1957년 고연전 축구경기에 고대가 동대문구장에서 이기고 모두들 흥분하여 당시 파고다공원으로 불리는 이곳까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뛰어와서 크게 축하하고 헤어진 기억이 새롭다.
요즘 탑골공원은 은퇴한 남자 노인들이 하루를 맥없이 보내는 집결지이며, 박카스 아줌마 이야기를 어디서 듣고는 안으로 들어서기를 꺼려했는데, 아침 일찍 도착해서인지, 탑골 공원은 아주 깨끗하고 조용하며, 작은 가방을 메고 모자를 쓴 노인들은 없고, 몇 사람의 관광객이 보였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에 의하면, 탑골 공원은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고, 국내 최초의 도심 내 공원으로 1919년 일제에 항거하던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1919년 3 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던 바로 그곳, 역사적 현장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외친 이 공원에는 독립운동을 후손에게 알리려는 기념물들이 몇 개 있다. 나는 이들을 돌아보면서 일본인들에게 36년이나 짓밟힌 아픈 역사를 되새겨 보았다. 그러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열사 등 독립투사들의 기념물이 없고,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 동상쯤 하나 있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탑골공원 내 유적 중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국보 2호로서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보지정 석탑 가운데 가장 후대에 속하며, 그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고,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제작 수법이 세련되고 화려해 조선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귀한 석탑을 보존하기 위하여 석탑이 유리로 둘러싸여 있어서 사진 찍기가 어려워 사진을 남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탑은 우리가 오래 보존해야 할 귀한 예술품임에는 틀림 없다.
이 공원에는 파란만장한 역사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이곳에 흥국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1464년 세조 10년에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했는데, 이 공사에 동원된 군사가 무려 2100인이었다고 한다.
근처의 가옥 200여 호를 철거하여 3년 후에 완공된 이 사찰의 규모는 굉장해서 도성 안 제일의 대가람의 위용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 절은 당우나 문루의 규모도 대단했지만, 특히 전국에서 동 5만 근을 모아 주조한 대종과, 1468년에 완성하여 그 안에 석가여래의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을 안치했다는 10층 석탑이 있었다.
비교적 숭불정책이 시행되던 것이 성종 때 들어 와서는 철저한 억불정책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연산군 대에 들어가서는 더욱 가혹해졌다고 한다. 결국에는 원각사를 철거하자는 논의가 이때 시작됐지만, 당장 철거돼지 않았고, 그 대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을 이 자리에 옮겨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 1200명의 여인과 악사 1000명, 감독 40명이 기거하는 연산군의 기생방이 되는 처지로 전락했고, 그 이름도 연방원으로 바뀌고 말았다고 한다.
연산군이 실각한 뒤 이 건물은 잠시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1514년 중종 때 호조에서 원각사의 재목을 헐어 여러 공용건물의 수선에 쓸 것을 요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한 뒤 얼마 안 가서 이 사찰 건물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비와 10 층 석탑만 남아 있다.
고종의 명을 받은 영국인 브라운이 조선 고종 34년인 1897년 원각사지를 서양식 공원으로 만들어서 1920년 대중에게 개방했다. 브라운은 1893년 조선에 입국하여 총세무사, 탁지부(재정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조선 정부의 재정과 관련한 일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다가 폐허로 변한 원각사지를 공원으로 바꾸자고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김홍집 내각 때부터는 서울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 뒤에는 마침 경운궁 중심의 도시 정비가 시행됐다고 한다. 아울러 원각사지 터가 서울 시민이 가장 모이기 쉬운 곳으로서 주변에 장시(시장)가 서고 있었다는 점도 공원 개설에 큰 역할을 했다. 결국 고종은 공원에서 민의가 수렴되는 등 언론과 소통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공원 건립을 허락했다고 한다.
이 공원의 역사로부터 나는 무겁고 아픈 마음을 가지면서 공원을 나와서 북쪽으로 얼마 안가서 종로 4가에 있는 종묘를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말을 제외하고는 마음대로 입장하지 못하고 정해진 시간에 안내인이 동반하며 설명을 듣는 한 시간짜리 예약 프로그램이 있었다. 다음 예약시간인 11시 20분까지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넓게 자리 잡은 종묘 앞 공원은 잘 가꾸어져 있었으며, 곳곳에서 노인들이 바둑을 두는 한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공원 지하에는 공용 주차장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천만이 넘는 이 도시에 이런 호젓한 공간이 있고, 더구나 미국 보스턴 시내에 있는 공원처럼 주차장도 잘 갖추어 있어서, 종묘는 서울 시민들에게 아주 편리한 관광 명소였다.
한국전쟁 휴전 후인 1950년대 내가 대학 다닐 때는 탑골공원에서 종묘까지 오는 뒷골목이 종삼이라고 불리는 창녀촌이어서 오가기를 꺼려하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말끔히 정리된 상가와 음식점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나의 예약시간이 되어 안으로 입장하여 종묘의 전역 시설 하나하나를 상세히 설명하는 가이드의 훌륭한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왕이 제사를 준비하는 방, 동쪽 방향으로 세워진 세자의 방이 있었고, 이어서 제사 제물을 준비하는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종묘는 유학을 통치 기반으로 하여 건국한 조선왕조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봉행하던 곳이다.
제사에 올리는 음식물 40가지를 제사 전에 검사하는 검사대가 있었고, 제물로 올리는 소, 돼지, 그리고 양고기의 신선함을 위하여 산 동물이 대기했다가 바로 잡아서 제사에 올리는 등의 제사에 관한 가이드의 재미 있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종묘의 주된 건축물인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정전은 왕과 왕비가 승하 후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이다. 길게 펼쳐진 묘정 월대는 안정을, 건물 전면에 무한하게 반복되는 듯한 기둥의 배열은 왕위의 영속을, 수평으로 하늘 끝까지 펼쳐지는 듯한 지붕은 무한을 상징하며, 그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
정전의 월대 동쪽에는 공신당이 있고, 서쪽에는 칠사당이 있다. 공신당에는 역대 왕의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며, 칠사당은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무탈하게 잘 풀리도록 사계절의 운행과 관계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영녕전은 세종 때 종묘에 모시던 태조의 4대 추존왕인 목조, 의조, 도조, 환조와 그의 왕비들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세워진 별묘로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불교를 통치 기반으로 한 고려왕조를 버리고 왕조를 세운 조선왕조는 종교도 아닌 한문으로 된 유학을 지나치게 통치기반으로 삼으면서 유교라는 종교예식을 너무 따른 대표적 표본이 종묘다. 그러나 지금의 종묘는 우리 역사의 유물로서 후손에게 남아 있다. 유교예식을 엄중히 지키던 우리 중문도 34대 장손인 내가 미국으로 가면서 동생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앞으로는 더욱 문중을 지키는 일이 어렵게 될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