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섭 9대손 정한식 씨, 관련 교지첩, 시문집 등 기증
정언섭 동래부사는 동래읍성 증축 등에 크게 기여
부산시립박물관 "보존처리, 연구 거쳐 시민에 공개"
1730년(영조 6년), 정언섭은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동래 읍성 증축, 성 유지·보수 시설, 제사, 교육 시설 확보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정업섭은 1725년(영조 1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의 문서를 관리하는 ‘전적(정 6품)’이 되었다. 이어 1727년(영조 3년), ‘사간원 정언(정 6품)’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영조에게 간언을 하다 노여움을 사게 되어 파면당했다. 1년 후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나자 ‘사헌부 지평(정 5품)’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동래부사(정 3품)로 부임한다.
당시 동래부(현재 부산)는 왜의 침략을 방비하는 첫 관문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난 지 약 140년이 지났음에도 허물어진 성곽이 방치되어 있었다. 정언섭은 이를 다시 보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해 승인받고, 개축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 들어간 자원은 쌀 4500여 섬, 베 1550 필, 돈 1만 3400여 냥이 소요되었다. 모두 중앙의 지원 없이 해결했고, 200여 일 만에 공사를 끝냈다. 이렇게 개축이 끝나고 동래 읍성의 크기는 전보다 약 6배가량 커졌다. 또한 성의 유지·보수를 위해 장비와 재정을 관리하는 ‘수성창’과 자세한 규정을 적은 ‘절목’도 마련했다.
이뿐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전투가 있었던 옛 성터에서 유해를 거두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 이 무덤이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이다. 또한 동래 향교에서 추석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 현재는 찾아볼 수 없지만, 조선 말 부산의 대표적인 서당으로 언급되고 있는 ‘시술재’, ‘연심당’을 비롯한 많은 시설을 만들었다.
1733년(영조 9년), 정언섭의 동래부사 임기가 끝이 났다. 2년 뒤, 동래 향교에 그의 공을 기리는 ‘흥학문화거사비(興學人文精神去思碑)’가 세워졌다. 또한 동래부에서 보여준 능력으로 영조의 신뢰를 쌓아 정 2품의 관직까지 맡았다. 그리고 1748년(영조 24) 세상을 떴다.
일제강점기, 동래 읍성의 서남부 소실, 토지개간으로 인한 임진동래의총 이장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동래 읍성은 몇 차례 복원을 진행 후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임진동래의총은 복천 박물관 내에 이장이 되었다.
이후 정안섭은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인물이 되었다. 지난 18일, 부산시립박물관에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부산시립박물관은 충북 청주에 거주하는 정한식 씨(1952년생, 정언섭의 9대손)로부터 동래부사 정언섭과 그의 가문과 관련된 고문서 55점을 기증받았다고 밝혔다.
이번에 박물관이 기증받은 유물은 국왕의 명령이나 관직을 내릴 때 사용하는 교지첩,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정언섭의 실제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시문집 및 편지글을 모은 필적 등 55점이 있다. 특히 영조가 정언섭에게 하사한 ‘어제상훈(御製常訓)’은 그의 인생과 중앙에서의 활동 상황 그리고 영조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 유물이다.
정한식 씨는 방문 당시 문화관광해설사의 정언섭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배어 있는 설명을 듣고 큰 감동을 했으며, 부산시가 정언섭의 업적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자택에 보관 중이던 고문서 전체를 부산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정은우 부산시립박물관 관장은 “동래읍성을 개축해 큰 공을 세운 동래부사 정언섭의 유물이 부산에 오게 되어 매우 기쁘다"면서 "보존처리와 연구를 거친 후 시민들에게 동래부사 정언섭의 이야기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