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세대 환경운동가, '낙동강 지킴이' 칭송
발품과 육필로 낙동강 생명찾기 백서 등 발간
시민단체, ‘부산시민사회장’으로 장례 치르기로
50여 년간 낙동강 살리기 운동에 오롯이 투신해온 김상화 (사)낙동강공동체 대표가 19일 오후 4시 별세했다. 향년 70세.
김 대표는 지난 12월 8일 뇌출혈로 쓰러져 부산 백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의식불명 상태에서 회복을 기다렸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부산사회환경단체들은 ‘환경운동가 김상화 선생의 활동과 유지를 기려 ’부산시민사회단체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김상화 대표는 국내 환경운동 1세대로서 일평생을 다른 직업 없이 낙동강 운동에만 전념하고 헌신해 온 낙동강의 지킴이자 저술가, 가인이었다. 그에게 낙동강은 하나의 신앙이었다. 1973년 첫 낙동강 도보답사를 떠난 이래, 그는 지금까지 1300여 회의 현장 답사와 780여 차례의 환경사랑방을 열며 낙동강 생명찾기와 공동체의 가치를 전파해왔다.
김 대표는 원래 음악 학도였다. 서울에서 대학 준비를 하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 부산으로 낙향한 뒤 야학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3년 초부터 야학 학생들과 낙동강 도보 답사에 나서면서 강의 아름다움에 취해 가사를 만들고 작곡을 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강이 오염되고 하굿둑이 건설되면서 그의 인생행로가 바뀐다. 결국 그는 을숙도에서 기타를 부수고 붓을 꺾어버린 뒤 투사의 길을 택한다. 그때까지 작곡한 노래가 100여 곡이며 5차례 작곡 발표회를 가지기도 했다. ‘점치는 아이’ ‘누야꽃’ ‘을숙도’ 등 낙동강의 아름다운 노래들은 대부분 그가 손수 작사 작곡하고 직접 노래를 불렀다. 문화를 통한 환경운동에 나선 것이다.
1973년 2월 6일, 그는 생일을 맞아 처음으로 낙동강 종주순례에 나섰다. 인생의 발품방향이 바뀌었다. 90년 후반부터는 낙동강 전체 유역에 237개 지점을 정해놓고 수시로 불쑥불쑥 찾아갔다. 매달 변화나 되살아나고 죽어가고 있는 것을 기록했다. 이를 지자체나 환경단체, 환경부에 알렸다.
1991년 구미 페놀사태가 터진 후 김 대표는 낙동강공동체를 조직했다. 강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여러 가지 환경문제의 사회적 대응과 지역 간 갈등을 한 곳에 모아서 함께 토론도 하고 논의하기 위함이다. 낙동강 문제를 상류 중류 하류를 아우르는 ‘공동체적’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한 것은 진일보한 환경운동으로 평가된다.
김 대표는 낙동강 상·중·하류 85개 시민환경단체의 정보교류와 연대기구인 낙동강네트워크를 결성해 강의 이용과 보전을 둘러싼 상류와 하류 주민 사이의 갈등 해소에 기여했다. 현재 전국 강살리기네트워크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1952년 부산 동래 출생인 김 대표는 그동안 『오! 낙동강, 낙동강에 흐르는 노래』, 『그대, 피울음 내는 강을 보았습니까?』, 『2박 3일간의 엇갈리는 대화(KBS추적60분)』, 『강은 흘러야 한다(운하 및 4대강사업고발서)』, 『낙동강 생명찾기 지도』, 『낙동강 생명찾기 백서(물&흐름)』, 『낙동강 발원지의 꿈』, 『낙동강 물터속의 생명과 마음』 등 모두 13권의 책을 펴냈다.
특히 낙동강 백서 작업은 김 대표가 도보답사를 통해 기록하고 정리한 낙동강 살리기의 생생한 흔적들이다. 이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작업이었다.
김 대표는 2019년 펴낸 『낙동강 물터 속의 생명과 마음』 백서 작업에 특히 심혈을 쏟았다. 그는 주변 지인들에게 “내 죽기 전 마지막 작업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백서 원고는 지도를 포함, 모두 육필로 썼다. 올 컬러 1200쪽, 사진만 1500여 컷이 담겼다. 기획에서 현장조사, 집필까지 10여년이 걸렸다. 집필 중 김 대표는 혈변을 보고 각혈을 했다고 한다. 육신이 삭고 기운이 허물어져 병원 신세를 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도 이같은 고된 백서 작업으로 건강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다. 삶의 마지막까지 낙동강 살리기에 온 몸을 불사른 것이다.
김 대표는 낙동강 운하 추진 및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반대하며 전국 모임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2021년 낙동강 하굿둑 일부가 상시 개방되자 누구보다 기뻐하고 반가워한 이도 김 대표였다. 김 대표는 평상시에 “강은 흘러야 한다” “이제 우리가 낙동강을 사랑할 차례다” “낙동강 공동체가 희망”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다.
발품을 통한 전 방위적 활동의 성과로 그는 늘솔상, 푸른소나무상, UNEP풀뿌리환경상, SBS환경대상, KNN환경대상, 교보환경대상, 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는 상과 대통령표창, 국민포장, 국민훈장 ‘동백장’(국가부문) 등을 받았다.
이달 초 쓰러질 때까지도 김 대표는 ‘강 문화와 성찰’이란 화두를 붙잡고 자료를 모으며 새 책을 집필하고 있었다. 쓰다만 책은 유고로 남게 됐다.
김 대표의 유족으로는 부인 김자운 씨와 딸 김솔 씨가 있다.
빈소는 부산진구 범천동 부산시민장례식장 특 301호, 추모제 21일 19~20시, 발인은 22일 7시 30분, 노제는 22일 12~13시 낙동강 하구.
문의 (051) 636-4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