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춘의 가인(歌人), 김광석에 대한 추억
강동수의 자투리시사인문⑬ 포크음악, 그리고 김광석 / 편집국장 강동수
1.
영원한 청춘의 가인(歌人) 김광석이 별안간 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글쎄, 좋은 일로 그랬으면 좋으련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으니 딱한 노릇이다. 타살이냐, 자살이냐 하는 논란이 다시 일고, 장애인인 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도 부풀어 오르고 있다. 그 와중에 그와 딸의 죽음을 유일하게 지켜봤다는 그의 아내 서해순 씨의 행적에도 의문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알고 보니 저작(인접)권을 둘러싸고 김광석의 친족과 아내 사이에서 오래 소송전도 벌어졌던 모양이다.
이 같은 의혹이 다시 떠오른 데는 전 MBC 기자 이상호 씨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이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이상호 씨는 2014년 세월호 사고의 뿌리를 캔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 벨>을 제작했던 민완기자 출신인데, 다들 알다시피 <다이빙 벨>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상영 논란으로 유명세를 치른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김광석>은 이 씨가 20년 동안 취재한 결과를 담은 작품이라는데 김광석의 타살 의혹을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영화 <김광석>을 포함해 김광석의 타살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대강 이렇다. 사망당시 그의 사인은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라고 발표됐지만, 그의 시신에서 우울증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고, 목을 맨 흔적도 일반적인 자살과 다르며, 평소 메모광인 그가 아무런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 일부에선 그가 아내와의 갈등 때문에 이혼을 선언한 다음날 숨진 것에도 의혹의 시선을 보낸다.
2007년 사망한 그의 딸의 사인을 두고서도 뒷말이 무성하다. 급성폐렴으로 사망했다지만 그 죽음이 너무 느닷없었다는 것. 더구나 아내 서 씨와 친가 간에 김광석의 작품 저작권 분쟁으로 재판 중일 때인데 서 씨가 법원 등에 딸의 죽음을 숨겼다는 것. 저작권에 대한 상속권을 가진 딸의 죽음을 숨겨야 보호자인 자신이 권한 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건데 10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는 거다.
글쎄,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다니 조만간 김광석과 딸의 죽음을 둘러싼 그의 아내에 대한 의혹이 풀릴 것으로 기대는 하지만 어떻든 씁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남김없이 풀려야 하겠지만 자칫 언론이 불러일으킨 센세이셔널리즘 광풍에 휘말리는 결과를 낳아서는 안 될 일. 한 시대를 풍미한 가인의 음악 세계가 이번 일로 훼손돼서도 안 될 일이다.
2.
김광석은 한국 포크 음악의 계보를 이어 온 인물이다. 그는 나보다는 나이도 적거니와 7080세대에 속하는 우리 세대보다는 우리 바로 뒤 세대에 더 큰 영향을 주기는 했다. 그래도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사랑했지만> 등은 나 같은 사람도 가끔 흥얼거렸던 노래다.
그의 주 장르인 포크 송(fork song)은 60~7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포크송을 사전적으로 풀이하자면 세계 각지의 민중 사이에서 불리어 온 전통적인 노래, 다시 말해 ‘민요’를 뜻한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요약할 수만은 없다. 미국에서도 포크 음악은 트래디셔널 포크송(traditional folk song: 전승민요)과 모던 포크송(modern folk song: 새로운 창작민요)으로 대별되는 것이다.
전통 포크송만 해도 켄터키·테네시·조지아·남북 캐롤라이나주를 포함한 남부와 남동부 애팔래치아 산악지대인 서던 마운틴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온 옛 민요인 ‘서던 마운틴 송’이 있고 서부 개척시대 카우보이들이 불렀던 ‘카우보이 송’ 흑인계 포크송도 있다.
우리가 요즘 흔히 말하는 장르는 모던 포크송이다. 소박하지만 자유로운 감성을 노래한 모던 포크송은 195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나 학생운동 등과 결합해 저항가요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 된다. 어쿠스틱 기타 하나만 가지고 스스로 만든 노래를 부르는 이른바 ‘싱어 & 라이터’들인 포크송 가수들은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등을 확대하면서 약소국에 대한 지배에 골몰했던 미국 정부를 비판하는 저항과 반전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포크음악의 기본 정서는 부정과 저항이다. 이 점에선 록(rock)과도 통하지만 록이 기존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와 파괴를 의미하는 것에 반해 포크는 낭만적인 동경과 이에 근거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향이 강하다.
포크송 가수들은 록밴드들과 함께 1969년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약 3일 반나절 동안 뉴욕 북부의 베델 평원에서 대규모 페스티벌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 페어(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이하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여한다. 3일 동안 약 50만 명의 관객이 베델 평원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뒹굴며 노래했는데 자유분방함과 시대정신을 지닌 팝 음악가들과 관객들은 함께 호흡하며 공연 문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포크 뮤지션 리치 헤이븐스는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지만 열정적인 공연을 펼쳐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도 혜성처럼 등장했다. 짧은 머리에 통기타를 메고 무대에 등장한 조안 바에즈는 사랑과 평화를 노래해 혼란의 현장에 평온을 선물했던 것.
피터 폴 앤 매리, 킹스턴 트리오 등이 포크송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미국 팝 음악사에서 포크라는 음악 장르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밥 딜런의 등장부터 꼽아야 할 터.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밥 딜런의 노래는 시를 방불케 할 만큼 영성적이고 철학적인 가사로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글쎄 그러기에 지난해 그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노랫말은 귀로 듣는 시이며,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는 선정 이유를 내놓았지 않았겠나.
너무나 유명한 밥 딜런의 노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의 가사는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얼마나 먼 길을 헤매야 아이들은 어른 되나/ 얼마나 먼 바다 건너야 흰 비둘기는 모래 위에 잠들 수 있나/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전쟁을 해야 사람들은 영원한 자유 얻나/ 오 내 친구여 묻지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중략)/ 얼마나 여러 번 올려봐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나/ 얼마나 큰 소리로 외쳐야 사람들의 고통을 들을 수 있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죽음의 뜻을 아나/ 오 내 친구여 묻지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1961년 뉴욕에서 밥 딜런을 만나 함께 전국 순회 공연을 하며 흑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인종차별 철폐운동에 앞장서고 월남 반전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존 바에즈도 마찬가지.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The River In The Pines)>의 그 맑고 서정적인 음률과 목소리는 아직도 50대 중반 이후 세대의 귓전에 아직도 쟁쟁거린다.
3.
한국 포크음악의 성취도 미국에 못지않다.
1964년에 서수남이 주도한 아리랑부라더즈가 컨트리 뮤직으로 첫 음반을 낸 것이 한국 포크음악의 시작이라고들 한다. 1968년 청년문화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트윈폴리오나 뚜아에무아 등이 음악감상실에서 공연활동을 한 것에서 한국의 포크송은 본격화됐다.
재작년 같은 제목의 영화도 나왔지만 음악감상실 ‘쎄시봉’은 당시 젊은 포크싱어들의 아지트. 이장희,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민기 등 젊은 뮤지션들이 1960년대 무교동 음악다방 쎄시봉에서 음악적 열정을 불태웠다. 통기타 1세대들의 산실이었던 쎄시봉은 ‘대학생의 밤’, ‘신인가수 선발대회’, ‘시인만세’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재능있는 아마추어 가수들이 몰려들었다. 조영남과 송창식·윤형주의 트윈폴리오, 김세환, 이장희 등 포크 레전드가 이곳을 거쳐 탄생했던 것.
1970년대 초에 포크송을 주도했던 이들의 상당수는 대학생들이었고 수용자 역시 대학생과 중고생들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포크송은 해방과 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 그 중에서도 대도시 고학력자들의 취향이나 문화의식과 관련이 있다. 이전 대중가요계의 상업주의와 상투성과의 거리두기, 기성세대의 취향에 대한 격렬한 반발의 태도를 담고 있었다.
외국 노래의 번역·번안을 위주로 음악감상실이나 라디오에만 머물던 포크송은 1971년을 기점으로 창작 작품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크게 성장했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 은희의 <꽃반지 끼고>가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서유석, 양희은 등이 포크 무대를 주름잡았다. 노래로 유신정권에 저항한 김민기가 <아침이슬>을 발표한 것도 이 무렵. 김세환, 어니언스 등도 이때 대중들의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는 이정선, 조동진, 정태춘 등 작품적 완성도를 중시하는 자작곡 가수들은 언더그라운드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들은 거의 텔레비전을 포기한 채 라디오와 음반, 콘서트 등 언더그라운드 방식의 활동으로 전환했다.
주류 대중가요계에서 포크송의 흐름이 쇠락했지만, 오히려 대중가요계의 바깥에서 포크송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서울대 메아리, 이화여대 한소리 등 포크송 동아리가 대학 내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금지곡이 된 김민기의 <아침이슬>, <친구> 등은 민주화운동의 비람을 타고 민중가요로 그 존재 방식이 바뀌게 되는 것. 1987년 6월 시민항쟁을 계기로 이 흐름의 일부는 노래를찾는사람들, 노래마을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김광석과 안치환, 권진원 등이 1990년대에 솔로로 전환하면서 한국 포크송의 맥을 이어갔다.
4.
김광석은 ‘음유시인’이다. 깊은 서정성을 가진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살아가는 일의 회한이 문득 덮쳐온다. 김광석의 노래는 안치환 같은 동세대들의 노래만큼 사회비판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삶의 굽이굽이를 휘감는 그의 노랫말은 우리들 가슴 속의 깊은 응어리를 쓰다듬어 준다. 21년 전 세상을 떠난 김광석의 노래가 여전히 세대를 넘는 사랑을 받는 이유는 노래에 담긴 소통과 공감의 요소 때문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소설가 김별아가 쓴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선배 시인 중에 택시운전사로 밥벌이를 하는 이가 있는데, 진상 손님을 만나면 김광석의 노래를 꼭 틀어준다는 거다. 그러면 취객도, 진상도 하나같이 조용해진다고 한다. 어쩌면 그게 김광석 노래의 진짜 힘일지도 모른다. 다르게 말하면 그걸 ‘아날로그 정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게다.
내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예전엔 그의 노래 <서른 즈음에>를 좋아했던 터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
아마 속절없이 지나간 젊음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데 요즘은 60대를 코앞에 두었기 때문인지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더 가슴을 친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렵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글쎄, 김광석이 죽은 지 21년 만에 이렇게 시끄럽게 소환됐다니 한편으론 허전하고 가슴이 아프다. 그의 죽음에 억울한 대목이 있다면 반드시 밝혀져야 하리라.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이 그에 대한 추억을 깨트리는 부작용을 낳아서는 안 되리라 싶다. 아니, 그의 노래를 들으며 콧등이 찡해지도록 살아가는 일의 아득한 깊이를 더듬는 행복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싶다.
문득 떠오르는 오래 된 소설 한 구절.
"그녀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정오가 될 때까지 바다 앞에 앉아 있었다. 버림받은 난쟁이처럼. 그 모습은 몹시 고독해 보였고 그녀가 듣고 있는 노래는 그날도 김광석이었다(윤대녕, <사슴벌레 여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