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는 없다

2014-10-07     장동범 시빅뉴스 편집위원
에피소드-1. 은퇴 후 귀촌생활을 한다며 10여 년 전에 촌집을 장만해두었다. 도시 직장인들의 로망인 전원생활을 해보겠다고 낡은 지붕을 고치고 마당에는 잔디를 심고 정원수도 몇 그루 옮겨 심느라 퇴직금의 상당액을 들였다. 그런데 은퇴 후에도 일이 생겨 자주 들리지 못하자 마당에 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민들레부터 토끼풀, 질경이, 쑥 등을 비롯해 잔디보다 억세고 성장 속도도 빠른 온갖 잡초들이 다투어 자라나 마당을 뒤덮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마을 노인들에게 일당을 줘가며 잡초 제거를 해보지만, 1년 내내 그렇게 할 수는 없고, 봐가며 마당이 너무 험하지 않을 정도로 뽑아주고 있다. 잡초와 신경전을 벌이다 보니 귀촌생활이 그렇게 녹록치 않은 일임을 깨닫게 됐고, 이웃노인들 집의 포장된 마당을 보면서 농촌 생활이 ‘잡초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그러든 차, 얼마 전 뉴질랜드에서 녹색의학 관련 일을 하는 한 교포의 동영상 강의를 볼 기회가 있었다. 이 분의 말씀 요지는 “세상에 잡초는 없다. 다만 (식물의 효능이나 쓰임새를) 모를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라는 것이다. 먹이사슬에서 하위구조인 식물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한의학에서 말하는 약초의 효능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름도 잘 모르고 마당을 뒤덮는 성가시고 쓸모없는 풀에 지나지 않은 잡초라는 이름의 녹색식물의 중요성에 관한 설명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한자로 약(藥)은 풀 초(艸)에 즐거울 낙(樂)의 합성어로 풀을 잘 만나면 즐겁고 좋아진다는 뜻이며, 영어로 메디신(medi-cine)은 식물에서 추출한 약을 매개로 건강의 균형을 이룬다는 중간(middle)과 균형(balance)의 라틴어에서 왔다는 것이다. 먹이사슬의 최하위인 식물도 이럴진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소중함이야... 에피소드-2. 추석 연휴를 맞아 부모님 산소를 둘러보고 왔다. 해마다 추석을 앞두고 사촌들이 모여 벌초를 해왔는데 올해 성묘 때는 같이 하지 못하고 뒤늦게 갔더니 산소들이 말끔히 단장돼 있어 여간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이 벌초에 가장 공이 큰 사람이 바로 시골에 사는 나보다 한 살 위 사촌 형이다. 이 양반은 성묘일이 잡히면 늘 하루 전에 비탈져 가파른 곳의 산소부터 말끔히 벌초를 해두어 도시에 사는 사촌들의 일손을 덜어주고 있는데, 그 위험한 예초기를 익숙하게 다루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라서 마음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 사촌 형을 볼 때마다 나는 “못난 나무가 조상을 지킨다”는 말을 떠올린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형은 젊을 때 객지를 떠돌며 고생을 했지만 나이 들고부터 고향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늙은 부모를 봉양하며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하고 있다. 노자 도덕경에 “굽은 것이 온전하다”는 뜻의 곡즉전(曲則全)이라는 구절이 있다. 각종 해설서에 공통적인 비유는 “굽은 나무가 온전히 제 수명을 누린다”는 것이다. 모순어법(oxymoron)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죽죽 뻗어 곧게 잘 자란 나무는 제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큰 집의 기둥으로 잘려나가고, 가지가 굽어 반듯한 재목으로 쓰기 어려운 나무들만 살아남아 무덤가에서 조상 지키는 것이 앞에 예를 든 나의 사촌 형과 너무나 닮은 말이 아닌가 싶다. 또 잘난 아들은 나라의 기둥으로, 해외동포로 빠져나가고 농촌에는 못난 자식과 노인들만 남았다는 항간의 푸념이 현 세태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장자도 큰 줄기는 뒤틀리고 옹이가 가득해서 먹줄은 칠 수 없고, 작은 가지들은 꼬불꼬불해서 자를 수 없는 큰 가죽나무가 쓸모없다고 걱정하는 혜자(惠子)에게 그 나무를 ‘아무 것도 없는 고을’(無何有之鄕) 넓은 들판에 심어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 없이’(無爲) 배회하기도 하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낮잠이나 잘 것을 권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노장사상의 핵심인 ‘쓸모없음의 쓸모’(無用功能)이다(『장자』 소요유 ‘쓸모없는 나무’편, 오강남 풀이, 현암사, 2009). 노자나 장자 모두 어법이 모순이지만 만물의 원형은 극과 극은 통하는 ‘모순의 통일’을 강조하면서 그 원형을 아직 다듬지 않은 통나무 박(樸)에 비유하고 있다.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되면서 분화와 구분이 생기고 대립과 갈등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만물의 이치가 사람 위주의 인위적인 구분과 가름(분할)을 경계하고 자연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으뜸의 가치로 삼으라는 것이다. 노자나 장자의 이 같은 논리를 앞의 잡초와 굽은 나무, 그리고 못난 사람의 존재 가치와 병치시켜보면 답은 명확해진다. 세상에 잡초나 쓸모없는 나무나 못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잡초나 굽은 나무나 못난 사람은 굽거나 못난 대로 저마다 존재 이유가 있고, 따라서 인위적인 기준으로 존재 가치를 매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최근 읽은 한 책에서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이고 지구에서 한 종(種)의 평균 수명은 400만년인데 비해 현생인류(homo-sapience)는 고작 40만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현생인류도 공룡처럼 먼 훗날 사라질 것이며 지구라는 행성에서 가장 끈질기게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종은 인간이 하잘 것 없는 생명체로 분류하는 이끼나 잡초가 될 것이라 한다. 하지만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개체수를 조절하면서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살 줄 안다. 다만 인간만이 자연과 대립각을 세우며 인간의 잣대로 자연과 생명체를 재단하고 인간 자체에도 등급을 매기고 차별한다. 인간 위주의 이러한 가치관에 따라 잡초는 없애야 할 쓸 데 없는 풀이고, 못난 사람은 천대받아 마땅하다는 차별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마당의 잡초는 뽑힐지언정 없애지 못하고 인간사회에는 목욕탕 때밀이부터 길거리 청소부까지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세상에 버려야 할 것, 쓸 데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잡초는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