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오려고 3개월간 떡볶이 집에서 일했어요"
부산국제영화제의 '일등공신' 열혈 관객들 이야기
지난해, 주말을 맞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대전의 배은열(19) 씨는 영화제의 매력에 푹 빠졌다. 평소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배 씨는 ‘하루만 갔다 와야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제를 찾았지만 2박 3일 간 부산을 떠날 수 없었다. 덕분에 당시 대학교 1학년이던 그는 이틀 동안 있었던 모든 강의를 ‘깔끔하게’ 결석했다. 예상치도 않게 늘어난 일정에 여비가 부족해 잠은 찜질방에서, 식사는 거르거나 컵라면과 토스트로 대충 해결했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영화 티켓을 하나 더 끊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배 씨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단단히 벼뤘다. 그는 여름 방학 내내 떡볶이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겸사겸사 갖고 있던 기타도 팔았다. 배 씨는 군 입대를 앞두고 휴학을 하게 돼 이번 영화제 기간 방문 일정도 넉넉하게 잡았다. 개막식이 시작하는 3일부터 폐막 전날인 10일까지, 총 9일간이다.
올해 그는 특별히 부모님과 함께 부산을 찾았다. 그 덕에 부산에 오는 길은 기차가 아닌 부모님 차로 편하게 올 수 있었다. 배 씨 가족은 자갈치에 가서 생선구이도 먹고 부산에만 있다는 돼지국밥도 먹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세 식구는 오붓하게 영화 두 편을 관람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낸 뒤, 부모님은 먼저 대전으로 떠나고 이제 배은열 씨만 남았다.
먼저 배 씨는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본 저렴한 호스텔로 숙소를 옮겼다. 그의 식사는 다시 컵라면과 토스트. 하지만 그는 먹고 자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품에 있는 영화 티켓만으로도 든든한 눈치다. 그는 개막 전부터 보고 싶은 영화를 꼼꼼히 체크하고, 온라인 예매로 모두 표를 구매했다. 총 20편이다. 하루에 두 세편 씩 매일매일 꽉 찬 일정이 그의 휴대폰에 빼곡히 저장돼 있었다.
배은열 씨는 대학교에서 영화 제작 동아리를 하고 있다. 지금은 동아리의 장으로 두 편의 영화를 만들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그는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한다. 배 씨는 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영화평을 적어두는데 작년에 본 영화가 200편이 넘었다고 한다. 10월을 지나고 있는 올해도 벌써 본 영화가 150편 정도로 그는 전형적인 영화광이다. 하지만 그는 “김성욱 프로그래머(영화제에서 상영작을 선별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의 말에 따르면 1년에 영화 300편은 봐야 한다며 자신은 영화를 많이 보는 축에도 못 낀다”고 손을 내저었다.
열혈 영화팬 배은열 씨가 생각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매력은 무엇일까. 배 씨는 “작년에 무대인사 후 영화관을 빠져나가며 우연히 한 감독과 2, 3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정작 2시간 동안 본 영화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짧은 순간이 기억이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영화제에서도 우연히 몇몇 감독과 마주치기도 했다며 그때 받은 사인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또, 그는 영화제에서 느낄 수 있는 현장감 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제의 장점으로 꼽았다. 그는 “일반적으로 관객은 자신이 영화를 선택해서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관객들은 선택된 상업 영화를 보고 있다”고 현 영화 배급 시스템을 꼬집으며, 영화제에서는 흥행만을 위한 상업영화가 아닌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엄선된 높은 수준의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어려운 영화계 현실을 알고 있지만 영화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배은열 씨.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서 그의 꿈에 더욱 다가가고 있다.
독일에 살고 있는 카이 베커(Kai Becker, 29) 씨는 얼마 전 다니던 웹 제작 회사를 그만뒀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일을 쉬고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먼저 6주간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기로 했다. 카이가 유일하게 가 본 아시아 국가는 미얀마인데 생각보다 낙후된 환경에 실망한 경험이 있는 터라, 이번에는 발전된 아시아를 접하고 싶어서 한국과 일본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중 여행사 직원에게 한국에서 국제영화제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그는 환호성을 질렀다. 카이는 부산국제영화제 일정에 맞춰 이번 달 9일부터 13일까지 부산을 여행하기로 했다.
지난 10년 간 TV 없이 살았다는 카이는 일주일에 한번 꼴로 영화를 찾아 본다. 그는 TV프로그램은 좋아하지 않지만 영화는 좋아한다. TV는 광고의 영향을 많이 받아 광고 위주로 돌아가는 반면, 영화는 아름답고 예술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영화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특히 좋아한다. 또, 그는 영화 속에는 '좋은 스토리'가 있다며 영화를 통해 말하려고 하는 무언가 다른 사람들의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카이가 이번 영화제에서 볼 영화는 총 7편. 그 중에는 우리나라 영화인 <301 302>도 포함돼 있다. 그 외에도 그가 고른 영화는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국적도 다양, 장르도 다양하다. 그는 “평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작품을 영화제라는 플랫폼을 통해 접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도 즐기지만, 생애 처음 방문한 한국과 부산의 매력도 하나 둘 발견하고 있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관련 시설이나 지하철, 높고 깨끗한 건물들을 보며, 한국의 생활 수준이 유럽과 비슷하거나 더 높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보쌈과 비빔밥, 삼겹살 등 한국음식들도 카이의 입에 잘 맞았다.
그의 지갑에는 삐뚤삐뚤 써진 한글과 영어 알파벳이 적힌 메모가 있었다. 카이가 묵고 있는 호스텔 아르바이트생이 써준 한글 발음이다. 그는 한국어는 배운 적도 없지만 그 종이만 참고하면 대부분의 한글을 읽을 수 있다며 자랑스럽게 기자에게 종이를 보여주기도 했다.
조금은 아쉬운 것도 있다. 카이는 그가 묵고 있는 숙소에서 만난 외국인들에게 영화제에 대해 물었을 때 전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 그는 영화제에 오면 외국인들이 많이 보이지만, 이 행사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 같다며 외국 관광객들에게 국제적인 행사를 더 적극적으로 홍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