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풍당당(女風堂堂) 시대’에 꾸는 남자들의 꿈

2013-11-25     강성보 시빅뉴스 편집인

얼마전 경향신문 3면에 실린 사진 하나가 필자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작금의 정치적 핫 이슈 중 하나인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실종 사건 관련, 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검찰 수사결과에 반박 성명을 발표하는 사진이었다. 오랜만에 언론에 등장한 그의 모습이 반가워서라든지, 그의 얼굴에서 남다른 결기가 보여서라든지 해서가 아니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바로 사진 속에서 이 씨 앞에 마이크를 들이대고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는 각 언론사 기자들이 100% 여자들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회부 법조 출입이나, 아니면 정치부 정당 출입이 틀림없을 그 기자들이 모두 여자들이라는 것은 필자가 현역 기자생활을 하던 당시와 비교해보면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불과 10여 년 전 만 하더라도 신문, 방송사 편집국엔 여기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간혹 드문드문 눈에 띄었지만 편집부, 국제부 등 내근 부서의 기자이거나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 소위 ‘말랑말랑한’ 부서에서 홍일점으로 뛰고 있는 게 전부였다. 정치부, 사회부, 경제부 등 소위 ‘하드보일드’ 부서는 부장, 차장서부터 말단 기자까지 거의 다 남자였다.

타사 기자들과 만나는 출입처에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필자가 20여년 기자생활 동안 출입처에서 만난 여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유일한 예외가 1990년대 중반 통일부에서 모 방송국 <통일전망대> 코너에서 리포터로 일하던 아나운서 출신 김 모 기자였다. 하지만 그 여기자는 출입기자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때때로 통일부에 나와 취재활동을 벌였지만 기자실에는 한 번도 드나들지 않았다. 각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 공보관으로부터 브리핑을 받고 전화 취재, 기사 작성을 하거나 때로는 휴식을 취하는 기자실은 언제나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수컷들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 기자실에서 요즘은 분향기가 진동한다고 후배기자들이 전한다. 웬만한 기자실에 여기자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험상궂은 강력계 형사들과 맨날 아웅다웅하고, 때로는 유치장에서 범죄 용의자들과도 부딪혀야 하는 경찰서 기자실도 이미 여기자들에게 ‘점령’당했다는 게 후배 기자들의 전언이다.

왜 취재 일선 현장이 이처럼 여기자들 판이 돼 버렸는가? 아마 제3의 고시라 불리는 언론사 입사시험에 제 실력으로 합격할 만한 실력자들이 거의 여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 중앙 언론사 임원은 이렇게 말한다. “견습기자 시험에서 모집 정원의 3배수를 성적 순으로 뽑아보면 열 명중 여덟 명 정도가 여자다. 그것도 1등부터 8등까지는 전원 여자, 남자 한두 명은 가까스로 9, 10등에 턱걸이 한다. 이들 중 서너명을 선발해야 하는데 순리대로라면 합격자를 모두 여자들로 해야 하지만 면접 과정에서 남자 응시생에게 억지로 가산점을 부여해 겨우겨우 성비(性比)를 맞추고 있다.”

실제 현재 대학 신문 방송학과에서 언론 실무를 강의하고 있는 필자가 느낀 바도 그렇다. 기사 작성 연습을 시켜보면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크게 우수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몇몇 여학생은 이미 기성 언론사 기자 수준의 기사를 척척 내놓는 반면 남학생들은 아직 기초적인 기사 문장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기자가 되겠다는 의지도 여학생들이 훨씬 강하다. 이들이 언론고시를 본다고 할 때 인사권자가 누구를 선택하겠느냐는 것은 불문가지다.

여풍이 거세게 불고 있는 곳은 언론계 만이 아니다. 법조계, 외교관 등 시험을 통해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직종에 대한 여성들의 진출이 약여하게 두드러지고 있다. 사법시험에서 여자 합격자 비율이 남자보다 많아 ‘여풍당당(女風堂堂)’이란 제목이 등장한 것은 벌써 10여년 전이다. 요즘도 40% 이상이 여자들이다. 게다가 수석, 최연소 등 우수 합격의 영광은 대부분 여자들이 차지한다. 사법연수원 이수 성적 우수자들이 판검사로 임용되는데 이들 역시 대부분 여자다. 바야흐로 법조계의 여성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서울 지방법원 몇 곳에서 재판과정을 방청한 적이 있다. 놀라운 것은 재판의 주역들이 대부분 여자였다는 점이다. 판사도 여자, 검사도 여자, 심지어 변호사, 속기사도 여자였다. 유일한 남자는 법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정리(廷吏)와 변호인 석 옆에 앉은 초췌한 표정의 피고 뿐이었다. 법원장 출신의 한 친구는 “요새는 재판정에 나가기가 머슥하다. 온통 여자들 판이라 우리처럼 늘그수레한 남자 변호사가 젊은 여검사, 여판사를 상대하기가 좀 그렇다”며 쓴 웃음을 짓는다.

외교가에 불고 있는 여풍도 만만치 않다. 외교관 시험에서 여성이 남성을 앞지른 것은 2005년이며 2007년 67.7%로 최고점을 찍은 후 2010년 60%, 2011년 55.1%, 2012년 53.1%로 여초(女超) 현상이 굳어지고 있다. 올해도 최종 합격자 37명 중 여성은 절반을 훌쩍 넘는 22명(59.5%)이었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그때까지 배출된 외교관 중 여성이 10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하니 불과 10여년 사이에 한국 외교가에 실로 상전벽해에 가까운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많은 유엔과(課)의 경우 몇 년전 부터 과장과 공익 빼고는 모두 여자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7~8년 해외 주재 생활을 하고 돌아온 한 외교관은 “오랜만에 귀국해보니 세종로 외교부가 온통 여자천지다”라며 깜짝 놀라기도 했다.

뇌 구조상 언어와 감성으로 승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비교우위를 가진다고 한다. 글을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남을 말로 설득하는 능력을 관장하는 측두평면과 전(前)전두엽의 크기가 ‘남자<여자’라는 것이다. 또 전체 뉴런 수는 남자가 많지만 뉴런 하나하나의 크기와 뉴런 간 연결구조인 시냅스, 수상돌기도 여자들이 훨신 더 발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남자는 공간 지각능력과 신체 운동을 관장하는 뇌가 발달했지만 이것은 원시시대 육체를 이용해 사냥을 할 때 유용할 뿐이다. 요즘과 같은 스마트 시대엔 비교우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류가 문명을 이룩한 이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남성 중심적 사회가 유지되고 여자들이 그 밑에서 ‘신음’해온 것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강제한 강압적 질서 때문이었다. 그 질서가 감성시대를 맞아 깨지면서 여성들의 숨겨진 잠재력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전통을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강인하게 지켜 온 한국사회도 이제는 여성 대통령이 나올 정도로 급변했다. 여성 최고경영자, 여성 전문가들의 등장은 이제 뉴스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흔한 일이 돼 버렸다. 머지않아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3부 수장이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고 사회 요소요소에서 여성들이 주도권을 잡고 활약하는 시대도 등장할 것이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21세기를 <Feeling, Fiction, Female>의 ‘3F시대’라고 불렀다. 감성과 가상과 여성이 지배하는 시대... 이 새로운 사회환경 속에서 남자들은 여성들의 리더십 아래 포근한 모성의 꿈을 꾸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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