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지자!

2014-12-09     장동범 시빅뉴스 편집위원
인류 진화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은 숲속에 살던 유인원(오랑우탄)이 두 발로 걸어서 평원으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된 두 손으로 도구를 들어 사냥했고 머리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사색했다. 두 발로 굳건히 대지를 딛고 머리는 하늘을 향한 이 자세야 말로 현실과 이상이라는 균형 잡힌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또 크로마뇽인들은 추우면 짐승의 가죽을 기워 입고 동굴에서 불을 피우고 벽화를 그렸다. 벽화는 인간의 조상들이 남긴 가장 창의적인 예술 행위이며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여유’에서 비롯됐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동물의 세계를 다룬 다큐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사냥하는 동물들은 먹이를 잡아놓고도 끊임없이 주위를 살핀다는 것이다. 먹이사슬의 상위인 사자마저 어린양을 잡고도 안전한 곳으로 물고 가서야 새끼들과 함께 뜯어먹으며 혹시 먹는 동안 다른 사자나 하이에나가 자신이나 새끼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조심한다.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 신경을 쏟으며 생존이라는 안 보이는 우리에 갇혀 사는 동물의 이 같은 조건을 ‘생존의 우리’라고 부른다. 생존의 우리에서 해방된 인간들은 필요한 만큼 얻으면 나머지 시간은 즐겼다. 오늘날 열대 밀림에 극히 적게 남아있는 원시 공동체가 이를 입증한다. 심지어 13세기 영국의 농노들도 하루에 기껏해야 6시간 미만으로 일을 했다 한다. 그런데 산업이 발달한 19세기 영국의 노동자들은 하루에 13시간 이상 일을 하고도 끼니를 못 때우고 허덕였다. 인간이 생존의 우리에 다시 갇힌 것이다. 문명이 800년 이상 후퇴한 이 같은 현상을 마르크스는 여유와 부(富)의 척도가 되는 잉여 생산을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이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모던타임스>에서 보여주듯 산업 전사들이 기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공장에서 쉼 없이 나사를 조이고 부품을 조립하던 20세기는 모든 실적을 결과로 말하는 규율사회였다. 이솝우화에서 말하는 개미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놀고먹는 베짱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역설이 생긴 것이다. 한국도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며 피땀 흘려 일해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지금은 중산층이 점차 줄어들고 빈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학비에도 못 미치는 대학생 알바와,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문제는 해법이 없는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연말이 되면 송년회 등 좌석에서 저마다 돌아가며 건배사를 한다. 최근 들은 가장 인상 깊은 건배사는 어느 중견 기업인의 “된다! 된다! 잘 된다! 더 잘 된다!”였다. 모두가 “어렵다! 안 된다! 불안하다!”는 부정적인 분위기에서 나온 이 구호는 긍정의 극치를 이루며 자리를 밝게 만들었다. 일종의 집단 최면과 같은 긍정의 멘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의 구호에 익숙해져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오죽하면 ‘코란도’(KOREA CAN DO의 준말)라는 이름의 자동차가 공전의 히트 상품이었는지 기억해보시기를...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에 대해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성의 규율사회에서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과잉 긍정성의 성과사회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강제가 아닌 끊임없는 ‘자기 착취’를 통해 성과에 몰입하게 되고, 성과에 대한 압박과 ‘노동만 하는 인간’의 결과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인 ‘소진증후군’과 낙오에 대한 우울증,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 증후군), 경계성 성격장애 등 시대적 신경성 질환들이 나타난다고 진단한다(<피로사회> 중에서). 그 예로 오늘의 한국을 이룩한 전후세대와 직장에서 은퇴하기 시작한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일중독’에서 벗어나자 마자 정체성에 심한 혼란을 겪고 있고 노후 정신적, 물질적 빈곤문제에 봉착해 암담한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마지막 세대이고 자식에게 버림받는 첫 세대인 이들에게 국가나 사회의 복지망은 너무 허술하다. 물질적인 지원은 그렇다 쳐도 정신적 문제는 모두 개인의 문제로 남는다. 또 이보다 조금 앞선 세대인 홀로 사는 노인들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고독사’가 더 이상 뉴스 거리가 되지 못하고, 숨진 지 몇 달이 되어 키우던 개에게 뜯어 먹혀 뼈만 앙상히 남은 주검이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다.

과연 20세기에서 21세기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일했고 장밋빛 전망과 함께 앞만 보며 달려온 것일까?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 결실은 누가 다 가져갔을까?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은 소비보다 생산을 넘쳐나게 많이 해 노동력의 소진은 물론 환경마저 해친다. 자연까지 착취하는 대상인 것이다. 일개미는 끊임없이 일개미를 낳고 베짱이는 계속 놀고먹는 베짱이를 대물림 한다. 서울 강남은 베짱이들의 특구가 된 지 오래고 일개미들은 특구를 부러워하면서도 끝내 개미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옛말이 되고 말았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누어야 한다고 한다. 주5일제 시행 초기 사람들은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걱정했지만 지금은 토, 일요일 쉬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원시 공동체가 그런 것처럼 일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이어야 하고 나머지는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데 들어가는 여유로운 시간이어야 한다.

멀티테스킹(다중작업) 게임이란 것이 있다. 컴퓨터를 통해 한 개의 작업 아이템에서 두 개, 세 개, 많으면 네 개의 아이템까지 잇따르면서 키보드나 마우스를 동시다발로 작동해 얼마나 오랫동안 다중작업이 가능한지 능력을 시험하는 게임이다. 또 컴퓨터 오락도 이와 비슷하나 오랫동안 게임에 빠져있으면 가상현실과 진짜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중독되는 현상이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앞과 양옆, 뒷면까지 입체적으로 보고 판단해야 하는 자동차 운전도 인간의 입체적인 감각을 요구하기 때문에 운전 중 한 가지 일에 깊이 빠지거나 딴 생각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이처럼 인간의 다양한 감각과 능력을 요구하는 멀티테스킹은 한 가지 일을 깊이 생각하는 철학적 사색이나 명상과 좌선(坐禪) 같은 인간 특유의 행위를 어렵게 한다.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자마자 손바닥 안에 있는 이동 인터넷 기기(스마트폰)에 빠져 길을 갈 때도, 지하철과 시내버스 안에서도, 심지어 자기가 모는 차에서도 ‘대화의 감옥’에 갇혀 있는 스마트폰 중독자들에게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며,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러한 풍경이 21세기 정보사회에서 성과주의가 불러온 또 다른 과잉정보 욕구와 사회 관계망의 모습인 것이다. 필자는 10여 년 전 동료 언론인들과 함께 중국 광조우 일대를 여행하면서 한 유명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적이 있었다. 좌석 뒤에서는 현악기 반주가 곁들여진 고급 식사였는데 30분도 지나지 않아 일행 대부분이 일어서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수 없이 따라 나서면서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원래 3시간 코스라는 것이다. 뒤돌아보니 종업원들은 계속 음식이 담긴 그릇을 일행이 먹다 남긴 그릇 위로 포개어서라도 나르고 있었다. 그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외국 식당에서 한국 관광객들이 오면 “빨리! 빨리!” 온다고 수근그린다고 한다. 성과주의가 부른 조급함의 이면이다. 앞서의 한병철은 성과주의가 부른 긍정성의 과잉은 야생에서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멀티테스킹 같은 과잉 주의(hyperattention) 때문에 자연 산만해지면서 가만히 있거나 아무 일없이 심심해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한다. 삶의 궁극적 가치를 생각해야 하는 철학이나 인류가 쌓아온 문화적 업적 모두 깊은 사색과 주의에서 비롯됐음에도 산만한 주의력과 조급함, 우울증 같은 신경병적 질환으로 심심한 것에 대해서는 참을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치유책으로 한병철은 “잠이 (피곤한)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라고 깊은 심심함을 강조한다.

깊은 심심함! 어찌 보면 다소 생소한 용어 같으니 느긋함과 여유 정도로 바꾸어도 큰 무리는 없겠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 성급한 성과주의에 매몰돼 삶의 본질적인 면을 놓치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시점이 되었다. “인간은 너무 힘들게 태어났기 때문에 피곤하다. 그래서 살아가는 내내 충분히 쉬어야 한다.” 이탈리아 반도 남쪽 몬테네그로라는 나라에 전해져오는 속담이란다. 인생을 탄생의 고통에 비유한 이 말속에 담긴 뜻을 교훈 삼아 아래 시를 천천히 감상하며 느긋해도 좋고, 여유를 가지면 더 좋고, 깊은 심심함에서 창의적인 활동에 빠지면 더더욱 좋으리라.

천천히 걷는 것은 차보다 낫고(緩步當車)
꼭꼭 씹는 것은 고기보다 낫고(晩食當肉)
꽃을 보는 게 기생보다 낫고(看花當妓)
시를 읊조리는 게 노래보다 낫다(誦詩當歌)

-이주홍(1906~1987)의 ‘낙엽송’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