껄끄러운 진실을 세상 밖으로/소설 <28>을 읽고
지난 11월 8일, 초대형 태풍 ‘하이옌’은 필리핀의 타클로반 시를 강타했다. 태풍에 의한 피해도 피해지만, 각종 2차 피해들로 타클로반 주민들의 불안함이 더욱 커지고 있다.
난 이러한 필리핀의 상황을 신문으로 접한 뒤 정유정 작가의 책 <28>을 떠올렸다. <28>의 줄거리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다.
불볕이라는 뜻을 가진 인구 29만의 가상 도시 ‘화양’에서 일명 ‘빨간 눈 괴질’로 불리는 인수공통전염병(사람과 가축의 양쪽에 이환되는 전염병을 말하며, 이중에서도 특히 동물로부터 사람에게 감염되는 병을 가리킨다)이 발생한다. 이 병으로 인해 화양의 시민들은 하루가 다르게 죽어나가고, 병이 개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화양의 정부군들은 도시 안의 개들을 마구잡이로 생매장시키거나 총을 쏴서 죽이기 시작한다. 정부는 전염병이 무섭게 퍼진다는 이유를 들어 화양을 봉쇄시키고 결국은 폐쇄시키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선량했던 화양 시민들은 하루 아침에 폭도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고 빼앗았으며, 또 다른 시민들은 폭도들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강간을 당하는 등 갈수록 화양은 피폐해진 고립 도시가 되어간다.
<28>의 내용 중 현재 필리핀의 상황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선량했던 시민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폭도로 변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무차별적인 폐쇄를 주도하는 정부군에 맞서 대항하는 부분이었다. 정부의 명령으로 화양과 수도권을 분리하기 위해 시민들을 화양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던 화양봉쇄선. 봉쇄선을 넘기 위해 정부군에 맞서 여러 방법으로 대항하던 시민들은 결국 평화적인 방법으로 봉쇄선을 넘어가기로 결정한다. 그 봉쇄선을 화양 시민들이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손에는 태극기를 쥐고 펄럭이며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면서 넘어가는 장면은, 영화 <실미도>에서 군인들이 버스 안에서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독재 정권에 맞서 광주 시민들이 항쟁하던 장면 등 몇몇 영화 속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안 것이지만, 작가는 무자비하게 총을 쏘는 군인들로 하여금 독자들에게 80년대 독재 시대를 떠올리게 하려 했다고 한다.
워낙 직전 작품들이 좋은 평을 받았던 정유정 작가이고, 나 역시 그녀의 작품을 즐겨 읽었기 때문에 이번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러한 독자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한 점이 있다. 책의 초입 부분에서부터 중반까지 의학 용어나 수의학 용어들이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이해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의학 분야나 소방대원이 하는 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 사람들이 읽기엔 책 중간 중간에 들어가는 용어들이 조금 무리였다. 비록 그것이 현실성을 강조해주고 상황의 심각성을 부각시켜주는 중요한 역할도 했지만, 이해하기 힘든 용어 때문에 집중력이 깨지거나 그냥 쓱 훑어보고 넘어가게 되는 장면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결말이다. 스토리 전개가 중 후반까지 쉴 틈 없이 이어져서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졌던 것에 비해 결말은 독자들에게 앞선 모든 상황을 다 이해시키기엔 부족했고, 해피엔딩도, 새드 엔딩도, 그렇다고 열린 결말도 아닌, 뭔가 흐지부지한 힘없는 결말로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 내내 보여준 그녀의 특이한 이야기 구성 덕분에 앞서 말한 아쉬운 점들은 옅어졌다. 작가는 이 책에서 하나의 사태에 대해 5명의 사람과 1마리의 개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때문에 이야기의 구성은 다양했으며, '빨간 눈 괴질' 사태에 대한 여러 상황의 사람과 개의 시각에서 모든 이들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각자 기자, 수의사, 소방대원, 간호사 등등 전염병이 발병하는 도시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 순서대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 역시 처음에 했던 생각과 마음가짐과는 달라지는 모습은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좋았던 점은, 대부분의 책이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이야기의 끝까지 등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28>에서는 그런 억지 구성이 없어서 좋았다. 전염병이 나도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전염병에 걸려 하나 둘씩 죽어 가는데, 주인공들만 마지막까지 버젓이 살아 있다면 작품의 리얼리티는 현저히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구닥다리 방식을 버리고 극 중 인물을 아끼지 않고 죽이거나 살리면서 조금 더 현실감 있게 스토리를 구성해 내었다. 이런 부분들이 책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고,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줘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정유정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번 작품은 몇 년 전 구제역으로 인해 돼지와 소를 생매장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 쓴 것"이라고 밝혔다. 동시에 "만약 소나 돼지가, 아니 반려동물, 이를 테면 인간과 개 사이에 더 치명적인 전염병이 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소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 해 겨울, 구제역 사건은 국민들에게 '당분간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사먹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한 것과 소고기와 돼지고기 가격이 내려갔다는 것 외에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뉴스에서 산 채로 생매장 당하는 가축들을 보며 시청자들이 저 두 가지 외에 정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작가는 그 껄끄러운 진실을 대담하게 이야기로 풀어내서 세상 밖으로 꺼내들고 왔다. 아무도 쉽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 그것을 세상으로 들고 나온 것 자체로 이미 작가는 작가로서의 본분을 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8>은 잊혀졌던 구제역 사건에서부터 내가 어떤 글을 써야하는지까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고마운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