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놀이 대가 하용부와 함께 한 밀양 명사 여행..."이윤택과의 만남이 춤 인생 전환점"
"세상 살아가는 기본은 남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 김예지 기자
2017-11-29 취재기자 김예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추진하는 ‘지역 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 두 번째 날인 지난 26일에는 중요무형문화재 68호 ‘밀양백중놀이’의 대가이자 밀양연극촌의 촌장인 하용부 명인과 함께했다.
영남루는 보물 제147호로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손꼽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이다. 신라 경덕왕(742~765년) 때 신라의 5대 명사찰 중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 누각에서 유래했다. 현재의 누각은 이인재 부사가 1844년 중건한 것이다.
사방에 벽이 없는 공간이 바로 '누각'이다. 영남루 안의 단층은 무척 화려하다. 이런 단층은 궁궐 건물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영남루는 귀한 곳이었다. 1800년대 조선 시대의 당상관,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이나 도지사 이상만 오를 수 있었다.
문성남 해설사는 "조선 시대 때는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배척해서 많은 절이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영남루 누각에는 유교, 불교, 도교가 모두 합쳐져 있다"고 말했다. 불교의 상징은 해태의 얼굴과 왼쪽 사진의 부처 화반이다. 부처는 양면으로 조각돼 있다. 도교를 상징하는 건 '구름'이다. 난간 끝에 빼곡한 구름 모양은 누각에 오르는 게 구름 위에 오른다는 뜻으로, 누각에 오르면 신선이 된다는 의미도 담겼다.
영남루에서 볼 수 있는 유교의 상징은 가득하다. 퇴계 이황 선생은 일본 사신들을 한양까지 데려가는 도중에 밀양에 들러 '현판이 너무 많아서 영남루는 쓰러지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때 354개나 있던 현판은 현재 12개가 남았다.
1988년 이윤택 연출가는 한국의 전통적인 몸짓을 연극 무대에 접목하려고 하보경 옹을 찾았다가 손자인 하용부를 만났다. 하용부는 인간문화재로 밀양백중놀이 전수자다. 하 명인은 연출가이자 극작가, 시인인 이윤택과의 만남을 계기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하 명인은 "사람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내 자신의 생각, 사고를 바꿀 수 있다"며 자신의 인생은 36세 이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윤택 연출가와의 만남을 언급하며 첫 만남 때와 달리 두번째 만남에서 생각의 변화가 생겼음을 밝혔다. 그는 "자기 사고를 바꾸고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관객들에게 "지금 하는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있느냐"며 "자기가 좋아서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산다"고 말했다.
하용부의 ‘영무(靈舞)’는 그의 감정의 변화를 즉흥적으로 몸짓으로 표현하는 독창적인 춤이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관람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춤을 선물했다. 하 명인은 '끝없이 넓고 큰 바다'라는 뜻의 장사익의 <허허바다>에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곡의 초반 느리고 작은 그의 움직임부터 길을 잃은 듯 비틀거리는 빠른 움직임까지, 관객들은 하나같이 숨죽여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하 명인의 증조할아버지는 ‘밀양 강변춤'의 태동인 하성옥이고 인간문화재(1979) 명무 故 하보경(1906~1998) 옹의 손자로 4대째 가업으로 내려온 ‘밀양강변춤’의 종손이다. ‘밀양백중놀이’는 영남에서 내려오는 세시 풍속놀이로, 음력 7월 15일 날 전후로 지주들이 머슴들에게 고된 농번기가 끝나고 하루 동안 술과 음식을 베풀어 그들의 회포를 풀어주는 전통 놀이문화가 계승된 것이다. 머슴들이 양반을 은근히 풍자하며 흉내 내는 ‘양반춤’과 자신들을 표현한 ‘범부춤’, 그리고 백중놀이의 백미인 ‘오북춤’ 등으로 구성된다. 신명 나는 장단과 힘차고 역동적이며 남성적인 것이 특징이다.
1999년 이윤택, 손숙과 함께 밀양에 내려온 하 명인은 ‘연극예술촌’을 만들고 밀양시와 함께 16년째 ‘밀양 여름공연 예술축제’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