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 농사원 공무원으로 5.16 군사정변, 행정 변화, 공무원 문화를 체험하다 / 장원호
[제3부] 삶의 뜻을 생각하는 은퇴인
장면 정권은 학생 단체에 끌려 다니느라고 올바른 통치권 행사도 제대로 못했지만 새로 대학을 졸업한 3000명을 공무원으로 채용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자유당 고급 공무원들은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 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어서 행정을 근대화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자기들 위치를 지키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어서, 공무원 정원을 늘릴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장면 정부가 나를 포함한 대학 졸업생 3000명을 공무원으로 임용한 정책을 시행한 것이었습니다.
국토개발 요원 훈련 후 첫 발령지였던 경상북도 농사원에는 서무과가 있고, 서무, 경리, 관리용도 등 세 개의 계가 있었습니다. 이중 정식 공무원은 사무관 과장과 주사 2명이 있어서 행정 서기로 처음 들어간 내가 서열 4번이 됐고, 내 밑으로는 촉탁 공무원(임시직이란 뜻) 4-5명 있었습니다.
나는 젊은 나이에 공무원이 되어 서열이 높았지만, 일제 때부터 내려오는 행정 서식이나 관례 등 타성적인 공무원 생활에 쉽게 실망을 느껴 공무원을 집어 치울 생각만을 할 때쯤, 또 세상이 변하는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장면 정권을 군사 쿠데타로 무너뜨린 박정희 소장이 계엄을 선포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총칼로 나라를 다스리는 정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친구 영철이는 대학 다닐 때 나에게 교직과목을 같이하자고 했습니다. 물론 군과 학업을 병행한 나로서는 제대로 공부할 수 없는 사정도 있었지만, 웬 일인지 선생은 할 생각이 없어서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교직과목 이수를 했는데도,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영철이는 공무원이 안 되고 김포여상 선생이 되었습니다. 이때 나는 차라리 선생이라도 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5․16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오랜 집권은 역사가들이 그의 공과를 여러 가지로 평가하고 있지만, 1961년 6월부터 군인들이 시작한 ‘행정 체제의 개발’이 오늘날 한국의 정치, 경제 발전에 커다란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당시 일선 행정기관에 근무했던 나는 군사 정부가 적어도 이후 우리나라 행정 체제 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그 개선 방법은 이제까지 일제 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모든 행정 체제를 ‘군사 행정 방법’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상부로부터의 지시는 ‘전화 통신’으로 내려오고, 문서 보고는 군에서 사용하는 수신, 발신, 제목 등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아주 능률적인 방법으로 변경된 것이었습니다. 종래는 “수제지건에 관하여” 이런 식으로 공문이 시작되어서 그 뜻을 알기도 힘들었거니와 한 번 공문을 만들려면 복사를 위해서 카본 종이를 밑에 깔고 쓰는 등 여간 번잡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줄판’을 이용하여 복제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보고 형식을 군사 행정 요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체제를 채택하는 것과 동시에 종래의 부패하고 비능률적인 공무원을 내보내기 위해 30% 공무원 감원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당시 군인들이 행정 혁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통감한 듯했습니다.
군에서 갓 제대하고 나온 나는 군사 행정에 거의 완벽했던 편이었습니다. 당시에 초임인 나에게는 농사원 행정을 맡기지 않고 직원들 출근부나 정리시키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런 내가 서무과 모든 일에 중심이 되었고, 강은식 과장도 모든 행정 서식에 관한 한 나에게 상의하다보니, 나는 차차 신임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농사원 본원에 인사과장으로 있던 신완섭 사무관이 청주 중학교 선배여서 나의 이런 행정 능력을 듣고 곧 수원 본부로 데려 가는 바람에 대구의 지방 근무를 5개월 만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대구 근무 시절, 강은식 과장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기에게 과년한 딸이 여러 명 있으니 나를 사위로 삼겠다고 농담하기도 했으며, 나의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예의범절과 몸가짐을 가르친 엄한 선생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대구 동촌에서 혼자 단칸방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농사원 구내에 관사가 많이 있었고, 특히 서무과장이 쓰는 관사는 제법 큰 편인데다 가족이 서울에 있어서 강 과장은 넓은 관사를 혼자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아자마자 복도에서 지나가는 과장을 잡고 그 관사의 방 하나를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대답도 없이 지나가버린 과장은 그날 저녁 과회식을 하자고 해서 음식점에 과원들을 모아 놓고 주사 2명 등 나이 든 여러 사람을 마구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왔으면 잘 지도하여 과장에게 부탁이 있으면 조용히 사무실로 찾아 와서 자초지종 설명하고 부탁해야지 복도에 지나가는 과장을 붙잡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내 윗사람들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또 그날 저녁 술잔을 돌리다 보니 나는 급한 김에 왼손으로 강 과장에 술을 따르다가 한 번 더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정신이 풍비박산이 된 경험이 있습니다. 그 경험 때문인지 지금도 술좌석의 내 ‘에티켓’은 상당한 수준급이라고 자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