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손놀림으로 관객들 마음을 훔칩니다"
'종합 엔터네이너' 자부심에 사는 마술사 박종원 씨 이야기
2014-02-02 취재기자 조소영
깜깜한 무대. 스포트라이트는 오직 무대 중앙의 한 사람을 비추고 있다. 비어있던 손에서 수십 장의 카드가 쏟아져 나오고, 아무 것도 없던 모자에서 토끼가 튀어 나온다. 무대는 속이는 줄 알면서도 속는 즐거움에 어린이도 노인도 모두를 웃게 하는 마술 공연 현장이다. 마술사는 현란하게 손을 놀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훔친다. 신기하다고 사람들이 느끼는 순간,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운다. 그때서야 마술사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관객에게 머리숙여 인사한다. 글자 그대로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마술 공연. 그 현장의 주인공은 박종원(27) 마술사다.
박종원 씨는 전라북도 고창 출신으로 어렸을 적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 그는 그림, 공작, 심지어 십자수까지 손으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잘 해냈다. 그는 손재주를 살려 언젠가는 화가가 될 꿈을 꾸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를 통해 마술을 접한 이후 그의 꿈은 180도 달라졌다. 어린 눈에 비친 마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계속 마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죠. 결국 화가가 아닌 마술사의 꿈을 품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는 마술에 빠져 마술을 배우고 연습했다. 책을 사서 마술을 공부했고 인터넷 마술 영상을 보고 또 보며 마술을 연마했다. 어느덧 그의 마술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고, 자기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마술 동아리를 만들어 공연도 했다.
그가 마술에 빠지자 어머니가 말렸다. 마술사라는 직업이 불안정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손에서 자란 그에게 어머니의 반대는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는 “어머니께서는 원래 해오던 미술 쪽으로 대학에 진학하길 원하셨어요. 제가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싫어 하셨죠”라고 말했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펼친 마술 공연을 본 어머니가 마음을 돌렸다. 이후 어머니는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고, 그는 2006년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마술학과가 있는 동아인제대학교에 합격하여 본격적인 마술사의 길이 걷게 됐다.
막상 입학은 했지만, 주로 독학으로 마술을 공부한 박 씨와 마술 전문 학원에서 마술을 익한 동기생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동기생들은 마술 학원을 통해 전문 마술사들과 인적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 그는 “처음에는 많은 소외감을 느꼈어요. 저는 아는 마술사들이 한 분도 없었는데, 동기들은 이미 마술에 관련된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했더라구요”라고 말했다.
친구들과의 차이를 느낀 그는 좌절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부터 저도 저의 마술 세계를 넓히기 위해 노력했어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넓혀나갔죠”라고 말했다. 좌절보다는 노력을 택한 그는 결국 대학 입학 2년만인 2007년 서울국제매직페스티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그는 태국, 중국, 말레이시아 등에서 열린 각종 국제마술대회에서 수상하는 등 마술사로서 이름을 점차 알렸다.
특히 2011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2011 Malaysia Magic Extravaganza' 대회에서는 그랑프리에 이어 인기상도 수상해 2관왕이 됐다. 보통 마술사들은 카드, 공, 비둘기 등을 마술 소재로 삼지만, 말레이시아에서 그는 마이크 마술을 폈다. 마이크 손잡이 색이 바뀌고 여러 개의 마이크가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마술이었다. 마이크라는 소재부터 독특해서 경쟁 상대가 없었던 그의 우승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벽을 넘어 유명 마술사가 된 그에게 새로운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벽은 마술사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었다. <연애술사>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는 마술사를 바람둥이와 사기꾼으로 그렸다. 그 영향인지, 사람들은 젊은 마술사인 그를 자꾸 바람둥이와 사기꾼으로 보려고 했다. 그는 “대중들은 마술을 예술이 아닌 눈속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공연을 마치고 한 어린아이가 ‘사기꾼!’이라고 소리치는 경우를 당한 적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그는 마술사에 대한 이런 편견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는 마술사는 사기꾼도 아니고 바람둥이는 더더욱 아니며 하나의 당당한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사회적 인식을 얻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공연의 기획부터 의상, 무대, 음악까지 모든 것을 본인 혼자 해냈다. 소품 하나하나도 그는 스스로 준비했다. 마침 미술 재능이 있는 그는 소품을 스스로 만들고 색도 스스로 입혔다. 그는 “한번은 제주도 공연을 하는데, 공연 관계자 분이 제가 소품을 만드는 것을 보고, 정말 못하는 게 없다며 칭찬해 주셔서 어깨가 으쓱했죠”라고 말했다.
수많은 벽을 만날 때마다 그를 일으켜 준 것은 꿈을 향한 열정이었다. 그는 대회를 준비할 때면 하루 종일 연습한다. 그것도 모자라 밤을 새기도 한다. 그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연습했다. 마술을 향한 그의 열정은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 할 정도다. 그는 “저의 원동력은 경쟁심인 것 같아요. 친구나 후배가 새로운 걸 선보이거나 잘하는 걸 보면 끈질기게 물어보고 연구해요”라고 말했다.
제법 유명 마술사 반열에 오른 박 씨지만, 아직도 그가 힘들어 하는 점이 있다. 그도 마술사 이전에 사람인지라 개인사로 화가 나고 지친 날에도 무대에 올라가면 모든 것을 감추고 웃어야 한다. 또, 관객의 반응이 없어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짙은 화장으로 얼굴의 수심을 가려야 하는 삐에로와 처지가 같은 마술사의 고통에 대해 그는 “저는 개인적으로 괴로운 일이 있거나 관객의 반응이 없으면 더 오기가 생겨요. 이 상황에서도 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야겠다는 오기말이죠”라고 말했다.
현재 그는 연예인 기획사 같은 마술사 기획사인 매직큐 아카데미(MagicQ Academy)에 소속이 돼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마술사라는 직업은 불안정하고, 회사의 상황에 따라 입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마술만 하는 마술사가 아니라 더 폭넓은 일을 기획하고 있다. 그는 평소에 매직큐 아카데미를 통해 마술사 지망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마술쇼말고도 레이저쇼, 버블쇼, 샌드 애니메이션, 일루젼쇼 등으로 마술사들의 활동 범위를 넓힐 계획을 갖고 있다.
그의 국내 지명도는 아직 일류 스타 마술사에 미치지 못한다. 방송에 출연할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공연과 방송 스케줄이 겹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공연을 선택했다. 덕분에 그는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 마술사 대열에 끼지 못했지만, 1000회 이상의 공연을 기록하면서 실력 있는 마술사가 됐다. 그의 지팡이 마술은 음악과 하나가 돼 종합 예술적 퍼포먼스로 인정받고 있다.
박종원 씨는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고자 하는 일에 끊임없는 열정을 품었으면 좋겠어요. 그 열정에 맞는 노력도 해야겠죠. 그 분야에 지식을 쌓고, 그 분야를 위해서 잠을 줄이는 한이 있어도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꿈을 이룰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