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 5.16 군사 정부의 감원 정책 와중에 농사원 동료 공무원인 아내를 만나다 / 장원호
[제3부] 삶의 뜻을 생각하는 은퇴인
경북 농사원의 원장은 김성원 박사였습니다. 사과 육종으로 유명한 김 박사의 책이 일본에서 출판될 정도로 그 분은 유능한 분이었고 그래서 당시 사과 재배의 본산인 경상북도의 농사원 책임자로서 적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김 박사도 집식구들은 모두 서울에 있어서 서무과장과 같이 주말이면 서울로 가고, 또 평일에도 서울 출장이 많았습니다.
학자인 김 박사는 행정에는 어두웠고, 갑자기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내려 오는 지시 사항 처리를 놓고 그가 매우 고통스러워할 때였습니다. 특히 직원 30% 감원 명단을 올리라는것은 엄청난 부담이었습니다. 그 지시 사항에 따르면, 1)축첩자, 2)군 복무 미필자, 3)부정부패의 증거가 있는 자, 4)무능력자 등을 우선적으로 감원 명단에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농업 시험 연구 사업과 농촌 지도 사업을 담당하는 기술자가 대부분인 우리 기관에는 군복무 미필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감원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으니 할당된 인원을 채운다는 게 어렵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해당자가 없어서 30% 감원 리스트를 만들 수 없다고 회답했더니, 그러면 전 직원들이 인기 투표를 해서 그 인기 서열을 만들어 올리라는 지시가 다시 내려 왔습니다. 그 인기 투표 방식은 원장 이하 전 정규 직원들이 인기 리스트를 만들고, 각자 인기 좋은 순서로 번호를 적어서 결과를 종합하여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경북 농사원의 기구표는 원장 밑에 서무과, 시험국, 그리고 교도국이 있었는데, 교도국이 서열의 끝이고, 교도국 교도과의 생활개선계가 그 중 제일 마지막으로 리스트에 올려 있었습니다. 생활개선계에는 여직원 3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지금 나의 처인 김영숙 양이었습니다.
이 감원 리스트는 원장이 직접 종합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 리스트의 용도를 의심했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죽고 사는 것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여 리스트를 만들 때는 화장실이나 비밀스런 어느 장소에서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이 곳에 온 지도 얼마 안되고, 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으며, 이것의 사용 여부도 믿지 않았던 나는 리스트를 책상 위에 놓고 감추지도 않고 위에서부터 차례로 인기 순위를 적었습니다. 원장이 당연히 1번이었고, 농사원 전체 리스트의 맨 밑에 있던 김 양과 다른 여직원 2명 등 3명이 물론 나의 인기 리스트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사환 아이 김진길이는 놀라서 교도과에 있는 사환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했고, 1시간 이내에 해당 여직원 3명이 폭탄같은 질책을 나에게 했습니다.
나는 이 리스트가 별 것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여직원들의 항의가 하도 거세서 별 소용이 없었고, 이 상황은 나를 아주 난처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김 양이 생활개선 지도원으로 경주 김천군에서 일하다가 도 본부로 발탁되어온 능력 있는 여직원으로서 주변에서 인기 좋은 처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어느 일요일에 일직에 걸린 김 양이 출근했습니다. 일요일이지만 할 일이 별로 없던 나도 출근해서 서무과에서 책을 뒤적이다가 그녀를 만나게 됐습니다. 같이 일직을 마치고, 우리는 그날 저녁에 식사를 같이하고, 영화를 봤으며, 그리고 대구 시내 어느 음악 감상실에 들렀다 헤어졌습니다. 이것이 당시 대구에서 있은 유일한 ‘데이트’였고, 그 후 얼마 있다 나는 수원 본원으로 발령이 나서 올라가버렸습니다.
그 이후 얘기는 (16)-2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거기 적힌 것처럼, 나는 수원으로 올라 온 후 농사원의 전국 행사 때 다시 김 양을 만나게 됐고, 이후 우리는 만남을 지속해 오다가, 1962년 5월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서전 얘기의 처음에서 적은 것처럼, 나는 아내와 자식들을 한국에 두고 1966년 진덕호를 타고 오랜 염원이던 미국 유학길에 홀로 올랐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