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친구가 탈모 사실 속였다면 파혼해도 되나?"
법조계, "속이고 결혼했다면 이혼 사유 인정 가능, 탈모 자체가 파혼 사유될 지는 따져봐야" / 정인혜 기자
양가 상견례를 잘 마치고 행복한 결혼의 꿈에 부풀어 있던 이모(30) 씨에게 석 달 전 그날은 악몽으로 남아있다. 그날 이 씨는 퇴근 후 남자 친구와 만나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신접살림을 어디에 차릴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남자 친구가 별안간 고백할 게 있다며 심각한 표정을 짓기 전까지 김 씨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예비 신부였다.
‘재산을 속였나’, ‘만나는 여자가 있나’ 짧은 찰나 수많은 생각이 김 씨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남자 친구 입에서 터져 나온 고백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남자 친구는 본인의 머리가 ‘가발’이라며 “탈모를 숨겨서 미안하다”고 고백했다.
결혼 전 에피소드로 치부하려 했던 김 씨의 생각은 남자 친구의 머리를 보는 순간 한순간에 바뀌었다. 한눈에 봐도 휑한 정수리가 심각한 수준으로 느껴졌기 때문. 이후 서먹해진 두 사람은 결국 파혼했다.
김 씨는 “탈모는 유전이라는데, 탈모인 것도 싫었지만 그걸 상견례까지 한 후에 말하는 태도에서 더 정이 떨어졌다”며 “결혼이 확실해질 때까지 숨기려고 했던 것 아니냐. 그런 사람이랑은 평생을 함께 할 수 없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탈모는 일반적으로 두피에서 머리숱이 줄어드는 현상을 말한다. 과거 중년 남성들의 전유물로 치부됐던 탈모는 최근 여성은 물론, 20, 30대 젊은 세대에까지 확장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아직은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높은 비중으로 발생하는데, 사실 탈모 남성을 향한 여성들의 시선은 그다지 우호적인 편이 아니다. 여성 회원들이 다수인 한 카페에서 내놓은 ‘비호감 남자 top7’ 명단에는 ‘원형 탈모를 앓고 있는 사람’이 올라오기도 했다.
남성들도 탈모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으로 보인다. 대한모발학회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탈모로 고민하는 남성의 82%가 자신감 상실과 사회 생활이 위축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들은 “탈모로 인해 나이가 더 들어 보이며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대답했다.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탈모를 화두로 펼쳐지는 갑론을박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예비 신랑의 탈모를 파혼 사유로 봐야 할지를 두고 종종 언쟁이 벌어진다. 결혼을 준비 중인 여성 회원들이 많은 커뮤니티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난해 온라인 커뮤니티 네이트 판에는 ‘탈모를 앓는 남자 친구와의 결혼이 심각하게 고민된다’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남자 친구가 처음으로 가발 벗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50대 아저씨들처럼 정수리가 둥그렇게 벗겨져 있었다”며 “남자 친구를 사랑하지만, 자식들에게까지 대머리 유전자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나중에 자식들이 성인이 됐는데 머리카락이 텅텅 비어있으면 충격 받고 쓰러질 것 같다”고 썼다.
사연을 접한 네티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사랑하면 이해해야 한다는 반응도 있는 반면, 결혼은 절대 아니라는 의견도 팽팽히 맞섰다. 다만 다수의 의견은 파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탈모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이를 속이려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한 네티즌은 “탈모가 잘못은 아니지만 탈모가 된 사람이랑 안 사귀는 건 내 마음인데 처음부터 속인 건 사기나 마찬가지”라며 “결혼 전에 말해준 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속아서 결혼했으면 100% 사기 결혼 소송감”이라고 말했다.
해당 댓글은 높은 추천 수로 베스트 댓글에 올랐다. 해당 커뮤니티가 주로 여성들이 즐겨 이용한다는 점에 비춰 볼 때, 상당수 여성들은 결혼 상대의 탈모가 심각한 결격 사유라고 보는 셈이다.
하지만 일부에선 "남성들이 탈모 사실을 숨기는 것은 여성들이 기피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숨기지 않았더라도 탈모 사실을 알았다면 어차피 결혼을 하지도 않을 것이면서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파혼하는 것은 핑계일 수도 있다"는 반론도 나온다.
실제로 남녀 모두가 이용하는 커뮤니티에서는 의견이 다소 갈린다. 얼마 전 포스트쉐어 사이트에는 ‘결혼 직전 대머리 고백한 남친, 결혼해도 될까요?’라는 설문조사가 올라왔다.
해당 설문에서 네티즌들은 근소한 차이로 파혼 반대 측의 손을 들어줬다. 총 1725명이 설문에 참가한 가운데, ‘파혼은 너무했다’는 의견이 52%, ‘충분히 파혼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전체의 48%를 차지했다.
변호사 등 법조계에서는 파혼 사유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면서도 이혼 사유로는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남자 친구가 탈모 사실을 속였을 때 한해서다.
한 변호사는 “현행 민법은 약혼 성립을 인정할 때 딱히 특별한 형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한 약혼 성립 여부 자체를 판단하는 게 까다롭고, 파혼 문제는 더욱 까다롭다"며 "약혼해제의 정당한 사유에는 간음, 성병, 불치병 등이 포함되기 때문에 (탈모를 정당한 파혼 사유로 볼 수 있을지는) 시비를 가려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결혼 후 알게 된 경우에 대해서는 “부부간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한 경우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