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우성의 ‘정치적 발언’과 촛불혁명...정치적 무관심 강요하는 사회적 억압
/ 편집위원 이처문
남자들 술자리에서 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바로 정치와 종교 이야기다. 군대 이야기는 밤을 새워도 말썽이 없지만 정치나 종교 이야기는 다르다. 개인의 신념과 관련된 사안이어서 그런지, 많은 경우 말다툼으로 비화해 뒤끝이 좋지 않다. 특히 정치적 논쟁은 휘발성이 강해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적 무지(無知)를 연구한 로버트 렌은 이런 경우를 가리켜 ‘사교화(社交化)를 위한 무지’라고 했다. 정치 때문에 친구 사이에 금이 가는 경우가 많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마음이 정치적 무관심을 유발한다는 것. 무관심은 결국 정치적 무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혼란을 회피하는 무지’도 있다. 정치적 신념이 흔들릴 것을 우려하는 경우다. 마르크스주의 이외의 책을 읽으면 오히려 혼란스럽다며 읽지 않는 공산주의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정치를 무시함으로써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는 ‘카타르시스적 무지’도 있다.
정치적 무관심은 민주주의의 기반을 허물 수 있다는 점에서 오래 전부터 대의민주주의의 골칫거리 중 하나로 지적돼 왔다.
미국의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웰은 정치적 무관심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정치에 대한 회의감에서 비롯된 ‘탈정치적 태도’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열성적으로 참여하려고 했지만 정치인들의 무능함과 부패에 환멸을 느껴 무관심으로 돌아선 경우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사례다.
두 번째는 ‘무정치적 태도.’ 다른 일에 관심이 쏠려 정치를 멀리하게 된 경우다. “정치가 밥 먹여주나” 하는 태도다. ‘빵과 서커스’에 대한 관심이 정치적 관심을 앗아간 것이다. 세 번째는 반정치적 태도다.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정치체제 자체를 부정한다. 예를 들면 무정부주의자 등이 있다.
우리 국민들에게 정치적 관심을 환기시킨 결정적 사건을 꼽으라하면 지난해 ‘촛불집회’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어느 광역단체장이 촛불혁명을 가리켜 ‘정변(政變)’이라고 표현하는 바람에 설왕설래가 있는 듯하다. 정변은 혁명이나 쿠데타 따위의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생긴 정치상의 큰 변동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고려시대의 무신정변이나 5.16쿠데타, 12.12사태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촛불혁명이 정변이었다면 당시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을 받들어 현역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의결했던 국회는 ‘정변’에 적극 동참한 것이고, 헌법재판소는 마무리를 한 것이 될 터이다. 어쨌거나 이런 발언을 할 자유가 보장돼 있는 나라도 대한민국이다.
이안 샤피로 미국 예일대 교수는 <정치의 도덕적 기초>에서 정치 권력이 국민의 합의를 저버리면 국민은 그릇된 권력에 저항할 자유가 있다는 사회계약론자의 주장을 강조했다.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 결정에 국민이 참여할 수 있을 때, 그리고 현재의 정부를 다른 정부로 대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정부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권 위에 잠들지 않은 시민들의 정당한 정치 참여가 바로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으로, 촛불혁명은 ‘정치적 발언’이라는 용어에 대한 오랜 편견을 날려버리기도 했다. 정치가 더 이상 정치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국민의 삶의 영역에 들어와 누구나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시대를 알린 것이다.
하지만 최근 “KBS의 정상화를 바란다”는 배우 정우성의 발언을 두고 일각에서 논란이 일었다. 정우성은 “정치적 발언이라기보다는 국민으로서 소리를 낸 것”이라고 말했다. 정우성 역시 ‘정치적 발언’이라는 단어에 대해 상당한 부담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정치적’이라는 꼬리표만 붙으면 마치 금기시되는 발언을 한 것처럼 몸을 움츠리곤 한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억압이 작용하기 때문일 터이다.
정치가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립과 분쟁을 조정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든 이 과정에 동참해서 발언할 자유가 있다. 그게 민주주의다. 정치인이 아닌 누군가가 이런 의견을 펼쳤다고 해서 그게 곧 특정 정파를 위한 계산된 발언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치에 여전히 진입장벽을 두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봐야 한다. 일반인들이 누구나 당당하게 정치적 발언을 하는 시대가 왔는데도 아직 정치권에선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18세기 유럽에선 여전히 많은 소설의 표지에 실과 바늘이 끼워져 있었다고 한다. 여성들에게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여자에게 독서는 시간낭비라는 남성우월주의 시각이다. ‘정치적 발언’이라는 용어 또한 21세기 정치에 끼워진 실과 바늘이 아닌가 싶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제 할 일이나 하라는 상징이다. 하지만 촛불혁명은 이런 실과 바늘조차 다 치워버렸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의견이 아무리 진실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충분히 자주, 아무런 두려움없이 토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독단으로 신봉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따지고 보면 촛불혁명을 정변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정치 발언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치적이든 아니든 ‘KBS 정상화’를 외친 정우성의 발언권이 보장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