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페’ 아닙니다. ‘크렙’이 본토 발음이죠”
경성대 앞 크렙 가게 '라포즈'의 한불(韓佛) 커플 이야기
“크레페는 잘못된 말이에요. ‘크??rsquo;이 정확한 불어죠.” 부산 경성대 앞 대학타운 옛 남부경찰서 건물 뒷편에서 크렙 가게를 운영하는 이유경(33) 씨는 크렙을 크레페로 발음하는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크렙에 대한 정확한 어원을 설명해준다. 가게 앞에도 아래 사진과 같은 설명이 게시돼 있다. 여기서 ‘크??rsquo;은 우리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정확하게는 ‘크렙’이 된다. 이것까지는 이 가게 주인이 그냥 지나친 듯하다.
“크렙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졌고, 프랑스인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에요.” 몇 명의 손님들이 이 씨 앞에서 이런 설명을 듣고 있다. 하지만 손님들의 시선은 그녀 옆에 서있는 한 서양 남자에게 쏠려있다. 바로 그녀의 남편인 조나떵 히에제흐(Jonathan Riegert, 30) 씨다. 주먹만한 얼굴, 트러블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모델 같은 몸매, 미국의 유명 톱 가수 제이슨 므라즈를 꼭 빼닮은 외모를 지닌 그는 프랑스인이다. 그는 손님들의 그런 시선을 오히려 즐긴다.
이들 한불(韓佛) 커플은 3~4평 남짓한 공간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래서인지, 이들 부부의 호흡은 얼마 전 그리스와 대결한 축구 국가대표 팀의 박주영과 손흥민의 환상적 콤비 플레이와 닮았다. 손님들이 크렙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는 이들 부부의 찰떡궁합이 바로 부인 유경 씨의 유창한 불어 실력 때문임을 알게 된다.
너도나도 영어권 나라로 유학 가던 시절에, <베티블루>란 프랑스 영화에 빠져있던 19세 한 부산 소녀는 공부가 아니고 프랑스에 살고 싶어 2000년 프랑스 행 비행기를 탄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프랑스 영화를 좋아했고, 불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래서 그 소녀는 프랑스 행을 망설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프랑스 유학길이 아닌 ‘정착길’에 오른 그 소녀가 바로 유경 씨다. 유경 씨는 “나는 한국 문화가 나와 어딘지 맞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돌아올 생각 없이 프랑스에 정착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죠”라고 말했다.
그녀는 2013년 여름 한국에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프랑스의 작은 도시 ‘낭시’에서 생활했다. 낭시는 독일과 룩셈부르크 접경 지역에 있는 소도시다. 한국인들은 프랑스라면 파리, 에펠탑, 와인, 예술을 떠올리지만, 낭시라고 하면 대부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은 정조국 선수가 잠시 뛰었던 축구팀 AS낭시의 홈타운이라고 하면 금방 알 것이라고 유경 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에게 낭시는 매우 특별한 도시가 됐다. 낭시에서 지금의 남편 히에제흐 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둘은 2009년 한 바에서 직원과 손님으로 만났다. 유경 씨는 “첫 눈에 반했었죠”라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히에제흐 씨도 자기도 첫 눈에 반했다고 불어로 대답했고, 이를 유경 씨가 통역해 주었다. 그들은 그후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사랑에 푹 빠진 끝에, 4년 후인 2013년에 결혼하게 됐다.
2011년 한국을 한번 가보자는 남편의 제안으로, 둘은 한국 여행을 하게 됐다. 그리고 히에제흐 씨는 한국인의 붙임성에 반했고 아내에게 한국에 정착해보자고 제안하게 됐다. 마침내 2013년에 히에제흐 부부는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부산에 정착했다. 처음 이들 부부는 불어 특기를 살려 불어 강사를 했지만,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없어, 생계를 고민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던 중 2011년 한국 여행 당시에, 히에제흐 씨가 한국 호떡을 보고 크렙 가게를 하면 돈 많이 벌겠다는 농담을 떠올리곤, 즉시 실천에 옮긴 것이 지금의 크렙 가게다. 농담이 현실이 된 지금, 그 때를 회상하면 둘은 웃음부터 나온다. 그들은 정통 프랑스 식 크렙으로 승부를 걸기로 하고, 작년 9월에 ‘라 포즈 크랲’이라는 상호를 걸고 경성대 대학 타운에 가게를 오픈했다. ‘라 포즈’는 ‘잠깐의 휴식’이라는 의미다. 상호에는 편안하게 크렙을 즐겨달라는 부부의 깊은 뜻이 담겼다.
한 달 매출은 “먹고 살 만큼”은 된단다. 그들은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요즘 우리나라 시중에는 크렙 체인점이 많다. 히에제흐 씨의 크렙 가게는 ‘크레페’가 아닌,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정통 프랑스 ‘크렙’을 선보인다는 데 자부심을 갖는다. 유경 씨는 적은 자본으로 연 가게라 제대로 홍보도 못했고, 가게 위치도 좋지 않지만, 제법 단골손님들도 있어서 일은 힘들지 않다고 한다. 부산시 용호동에 사는 치과의사 김성빈(59) 씨는 “딸과 프랑스 파리에서 먹었던 크렙의 맛을 여기서 느꼈다. 여기서는 프랑스의 좋은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다. 정통 프랑스 크렙의 맛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히에제흐 부부는 한국에 오기 전 프랑스에서 주 40시간 정도를 일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주 70시간을 일한다. 힘들 법도 하다. 그러나 히에제흐 씨는 “아내와 같은 공간에서 일해서 그런지 전혀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뒤질세라, 뒤질세라 유경 씨는 남편이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로 “남편을 만난 이후로 하루도 떨어진 날이 없었어요. 가끔은 떨어져 있고 싶어요. 한국 연인들은 그렇지 않나요?”라는 농담으로 화답했다. 이를 눈치 챈 것처럼, 히에제흐 씨의 표정은 “안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히에제흐 씨는 틈틈이 한국어를 공부한다. 한국어의 조사가 그를 괴롭힌다. 이때 손님이 들어오자, 그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억양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히에제흐 씨의 한국 적응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유경 씨의 향후 계획은 온통 크렙 가게에 집중돼 있다. 그녀는 이곳 장사가 잘 되면 장소를 옮겨서 카페 형식의 크렙 가게로 확장하고 싶어 한다. 이 꿈이 이뤄지면, 그녀는 그곳에서 디저트용 크렙, 햄과 야채를 넣은 크렙도 만들어 프랑스 전통 크렙을 더 확대하고 싶어 한다. 히에제흐 씨의 미래 계획도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유경 씨의 말과 똑 같았다. 둘은 참 모든 게 어울리는 서로의 반쪽인 듯했다.
프랑스에서는 조립식 겸 이동식 놀이동산 공연 단체들이 있는데, 이들은 한 지역에 한 달 정도 머물면서 공연을 한단다. 이동식 놀이동산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식이 바로 크렙이라고 한다. 크렙은 특히 어린이들이 좋아하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대학생들에게 크렙의 인기가 높다. 유경 씨는 “저희 부부는 한국에 친구들이 없어요. 친구들도 추억도 프랑스에 모두 놔두고 왔어요. 하지만 크렙이 그 외로움을 이기게 해줘요. 우리 부부에게 그나마 프랑스를 느끼게 해주고 연결시켜 주는 소중한 매개체가 크렙이에요”라고 전했다.
히에제흐 부부가 만드는 정통 프랑스 식 크렙은 일본식 발음에서 유래된 크레페와 많이 달라 보였다. 그들이 운영하는 크렙 가게는 작지만, 그들 부부가 보여준 사랑의 호흡은 작은 가게를 차고 넘쳤다. 그들이 사랑으로 만드는 크렙은 그래서 크레페보다 훨씬 진실하고 정성이 가득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