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근 전 검사를 위한 변명/여성을 절망에 빠뜨리는 성희롱, 성추행을 규탄한다. 그러나...

/ 논설주간 강성보

2019-01-31     논설주간 강성보
#1
모 신문사 편집부장 A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페미니스트였다. 40여 명 부원들 중 절반을 차지하는 여기자들에 대한 배려가 각별했다. 조간 신문 편집부 일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인데 “아무리 기자라도 심야에 홀로 귀가시키는 것은 불안하다”며 여기자들을 될 수 있는 한 야근에서 제외시켰다. 그렇다고 수당 배정이나 인사 고과에서 여기자들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자들에게 승진 기회를 먼저 줬다. 또 “여자들의 언어 감각이 남자들보다 훨씬 낫다”며 편집기자상 대상자로 주로 여기자들을 추천하곤 했다. 10여 년 전 사시, 외시 등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여성 합격자 수가 남성을 넘어섰을 때, 언론사 최초로 ‘여풍당당(女風堂堂)’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큰 제목으로 뽑아낸 것도 A 부장이었다. 그런 A 씨였지만 어느 날 발을 헛디뎠다. 일부 야근자를 제외한 전 부원이 참석하는 회식 자리에서 한 여기자에게 ‘성추행’을 한 것이다. 폭탄주가 여러 순배 돈 이후에 벌어진 일이라 그는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이튿날 편집부의 ‘왕언니 차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독대를 신청했을 때 “아차 뭔가 잘못 됐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 여기자 차장에 따르면, 회식이 끝난 뒤 다들 뿔뿔이 헤어지는 어수선한 장면에서 A 부장이 한 신참 여기자를 불러 택시비 2만 원을 쥐어준 뒤 “우리 이뿐이 조심해서 가라”면서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는 것이다. 이에 그 여기자는 자신이 술집여자 취급당했다는 수치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이뤘다고 했다. 그래서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선배 여기자인 왕언니 차장을 찾아가 상의했다는 것이다. A 부장은 일단 뜨악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그 말이 맞을 것 같았다. 거의 딸 같은 나이의 후배 여기자에게 자신은 선의로 대했다고 하지만 상대가 수치심을 느꼈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됐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그 왕언니 차장에게 사과하고 막내 여기자를 잘 타일러 달라고 당부했다. 그 후 그는 한 달에 한 번 하던 전체 회식 문화를 중단했다. 꼭 필요한 회식이 있으면 점심 때 하고 저녁 술자리는 남자 기자들하고 만 가졌다. 여기자들에 대한 종래의 살갑던 태도도 거둬들였다. 극히 사무적인 대화만 주고받았다. 여기자들에게는 가급적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뒤 편집부장 직을 그만두고 남자 기자들만 있는 부서로 옮겼다. #2 대기업 간부인 B 씨는 얼마전 회사 건물 17층 사무실로 올라가던 중 3층에서부터 한 여직원과 단둘이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됐다. 짧은 시간이지만 평소 낯이 익은 직원이라 그냥 아무말 없이 멀건히 서있기도 머쓱해 말을 걸었다. “어! 김00 씨. 좋은 냄새가 나네요.” 그 직원에서 풍기는 향수 냄새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B 씨는 투박한 경상도 말씨를 쓰는 남자였다. “좋은”이란 발음이 한 글자로 줄어들며 남자 성기를 뜻하는 속어처럼 그 여직원에게 들린 것이다. 이튿날 B 씨는 회사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그 여직원에게 성희롱을 했다는 것이다. “B 부장님이 엘리베이터 속에서 자신의 몸을 은근하게 훑어보며 입에 담지 못할 성적 욕설을 내뱉으며 희롱했다”는 내용이었다. 기가 막혔다. 감사실에 불려간 B 씨는 적극 해명을 했지만 이미 한 번 게시판에 올려진 글을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B 씨는 ‘성희롱’ 혐의로 견책을 받고 지방으로 좌천됐다. 이후 B 씨는 회사 내 여직원을 상대로 업무 외엔 일체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 트라우마 때문에 원활한 부부관계도 영위하지 못하는 등 한동안 육체적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3 20여 년 전 발표된 마이클 더글라스, 데미 무어 주연의 <폭로(Disclosure)>는 직장내 성희롱을 모티프로 한 스릴러 영화였다. 직장내 성희롱이라 하지만 남자 상사가 여자 직원을 성희롱하는 일반 패턴과는 달리 여자 상사가 남자 부하를 성폭행하는 포맷이었다. 화려한 캐스팅에다 매우 이색적인 소재 탓에 국내에서도 상당히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스토리를 잠시 소개하면-. "팀 샌더스(마이클 더글라스 扮)는 IT회사 시애틀 지사장으로 촉망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부사장으로 임명되리라는 기대와 달리 회사는 존슨(데미 무어 扮)이라는 외부 인물을 부사장으로 초빙, 샌더스의 상사로 임명한다. 그런데 존슨은 캐리어 우먼으로 과거 샌더스와 사랑했던 사이이기도 하다. 어느날 존슨은 몇가지 일을 더 검토할 것이 있다며 다른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뒤 샌더스를 자신의 사무실로 부른다. 여기서 존슨은 샌더스에게 성적으로 유혹한다. 아니 저돌적으로 ‘육탄 돌격’한다. 샌더스는 존슨의 유혹에 거의 굴복할 뻔했지만 화를 내며 이를 거절한다. 다음날 샌더스는 존슨이 샌더스로부터 성폭행당했다고 회사에 고발했다는 얘기를 듣고 경악한다. 경영진은 눈물로 호소하는 여자 부사장 존슨에 속아 그를 옹호하고 샌더스를 중징계한다. 덫에 걸린 샌더스의 삶은 산산조각 나기 시작한다. 샌더스는 자신의 일과 가정,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탐정의 힘을 빌리는 등 안간힘을 쏟는데...."
육체적으로 ‘남자는 강자, 여자는 약자’라는 일반적인 인식 속에서 도저히 샌더스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지만 마침 현장에서 열려 있었던 전화기의 자동응답 장치가 뒤늦게 발견돼 진실이 밝혀지고 샌더스는 누명을 벗는다. 여기엔 존슨이 샌더스에게 육탄 돌진하는 그 소란스런 상황이 고스란히 녹음되어 있었던 것이다. #4 창원지청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고백’이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8년 전 선배 검사로부터 불유쾌한 신체접촉을 당한 사실을 검찰 내부통신에 올려 고발하고 종편 TV에 인터뷰 출연까지 한 것이다. 우선 서 검사의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마 그의 이번 용기 덕분에 한국 땅에 ‘미투(Me Too) 운동’이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없는 밝은 세상으로 한걸음 가가가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검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검사 출신들이 성차별 및 성희롱에 대한 문제의식이 다른 직역에 비해 다소 박약하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식되어온 사실이다. 아무래도 권력기관인 탓에 타인을 하대하는 습관이 몸에 밴 탓일 것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지방의 카페에서 벌어진 검사들의 여종업원 희롱 사건, 골프장 캐디에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성적 농담을 던지다 곤욕을 치른 검사 출신 전 국회의장, 그리고 기자들에게 조차 함부로 반말을 해대고 자당 최고의원을 주막집 주모로 폄하하는 야당 대표 등 많은 사례들이 쉽게 떠오른다. 그런데 같은 직역의 검사에 대해 여자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고 성희롱, 성추행까지 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 꿈에도 몰랐다. 이번 서지현 검사의 폭로가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 검사가 검찰 내부 통신 이프로스에 올린 성폭력 실태를 보면 입을 다물기 조차 어렵다. “나는 여검사를 싫어한다. 너같이 생긴 애 치고 검사 오래하는 애 못봤다”는 선배 검사의 독설은 예사라고 한다. 한 부장검사는 “나는 여성은 남성의 50%라고 생각한다. 나한테 인정 받으려면 너는 여기 있는 애들보다 배 이상 열심히 해야한다”고 폭언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너는 여자애가 발목이 그렇게 굵냐. 여자는 자고로 발목이 가늘어야 해”라는 모욕을 듣고서도 속으로 삭혀야 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회식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밤이면 “너는 안 외롭냐, 나는 외롭다. 나 요즘 자꾸 네가 예뻐 보여 큰 일”이라고 추근대는 선배, “애고, 우리 한번 안아보자”며 와락 달려드는 선배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서검사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성폭행당한 여검사도 있다고 폭로했다. 어디까지가 자신이 겪은 일이고, 어디부터가 남으로부터 들은 얘기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서 검사는 이들이 100% 실제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다만 서 검사는 2010년 한 장례식장에서 자신을 성추행한 안태근 당시 정책기획단장과 그 사건을 임의로 덮고 오히려 자신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준 최교일 당시 검찰국장을 사회에 고발했다. 서 검사는 조직에 누가 될까봐 8년 동안 참고 있었으나 얼마전 성추행 가해자의 신앙 간증 얘기를 듣고 폭로를 결심했다고 한다. 서 검사는 “범죄를 밝혀내고 처단하지 않으면 또 다른 범죄를 잉태시킨다”는 까뮈의 경구를 인용하기도 했다.
서지현 검사의 이번 폭로에 대해 사회가 보내는 반응은 뜨겁다. 동료 여검사를 비롯, 여성 국회의원과 사회단체 등에서도 “당신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당신의 곁에 나란히 서 있고 싶다”는 등 응원의 문구를 SNS를 통해 날리고 있다. 또 이와 연계된 기사는 연이틀 실검 상위를 기록하며 각 기사마다 수천 건 씩의 격려성 댓글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들 댓글에 대한 ‘좋아요’ 클릭 수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이다. 매 댓글마다 수천, 수만 건의 ‘좋아요’가 붙는데 ‘싫어요’는 아예 없거나 있어도 단자리 수에 그친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간에 함께 올려진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형 구형’ 기사에 대한 네티즌들 반응보다도 더 단단하고, 획일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현재의 반응대로라면 서 검사에게 성폭행을 한 안태근 전 검사와 사건을 덮은 의혹의 당사자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은 이미 사회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 지하 수백m 아래에 매장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서 검사의 폭로가 사실 그대로라고 할 때 안태근, 최교일 두 전직 검사는 영화 <영웅>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연걸이 받아내던 진시황 군사들의 화살처럼, 빗발같이 쏟아지는 사회적 비난의 화살을 견뎌내야 하는 게 마땅하다. 윤리적, 도적적, 또 법적으로도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3 에피소드와 같은 ‘역 성폭행’의 가능성은 제로라고 하더라도 #1, #2의 일화에서 A 씨와 B 씨가 받았던 불의의 비난처럼 오해의 소지가 없었나 따져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돌팔매처럼 너나없이 모두 나서 두 전직 검사에 대해 비난을 쏟아내고 있지만 오랜 남성 우선주의 문화에 젖은 한국 남자로서 한 번쯤 자신을 되돌아 볼 양심은 가지도록 촉구하고 싶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에 박수를 치는 대열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다. 성차별 없는 사회로의 연착륙을 지지하는 마음 역시 누구보다도 굳건하다. 하지만 행여나 또다른 의미에서의 애꿎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역시 간절하다. 안태근 전 검사는 이미 사회 밖에 고개를 내밀 수 없을 정도로 매장당했다. 가족으로부터도 낯을 들수 없게 된 그가 혹여 극단적인 행동을 벌일까봐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