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한국 행 비행기에서 '국제시장' '장수상회'를 보며 은퇴인 '나'를 돌아보다 / 장원호
[제3부] 삶의 뜻을 생각하는 은퇴인
2015년 겨울의 서울 여행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가식 없는 '나'를 집 밖에서 살펴 보고 싶었고,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 있는 여행을 하고 싶어서 아내를 미국에 두고 나 혼자만 한국을 찾는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잘하는 것, 못하는 것, 내가 꿈꾸는 것, 내가 버리고 싶어 하는 것, 내가 앞으로 몇 년 동안 하고 싶어 하는 것, 내 인생에서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 등등을 알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번 서울 여행을 통해서 이러한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싶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주변 사람들과 나와의 관계를 살펴 보고 싶었습니다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나 다음으로 처와 가족이 있고, 그 다음으로 친구들이 있습니다. 은퇴인인 나에게 미국이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는 별로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관심도 많이 줄었습니다.
서울로 떠나는 아시아나 380 비행기는 2015년 11월 25일 아침 11시에 출발했고, 비행기가 이륙하자, 나는 비행기 좌석이 상당히 많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그 덕에 나는 나는 2층 두 자리를 차지하고 편안한 여행을 즐겼습니다.
975달러라는 저렴한 표 값에 두 번 생각도 안하고 낮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했지만, 아무리 잠을 청해도 두 눈이 말짱하게 잠이 안 와서 낮 비행기가 인기가 없는 이유를 알게됐습니다. 그 대신 빈자리가 많아서 승무원들의 느긋하고 친절한 대우를 받았으며, 처음으로 한국영화를 세 개나 연속으로 보면서 눈물도 흘리며 아주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서양 영화도 좀처럼 보지 않던 나의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을 이번에 본 한국 영화들이 전부 바꿔 놓았습니다.
첫번째 영화는 <국제시장>였으며, 한국에서는 1000만 명 이상이 보았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나보다 겨우 몇 살 아래였습니다. 흥남부두 철수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으나, 주인공은 초등학생 또래였습니다. 나는 당시에 부산까지 피난을 가지 못하여, 영화가 묘사한 피난 시절 부산 정경은 생소했지만, 그 다음 영화 속 서독 광부의 딱한 형편과 월남까지 가서 한 쪽 다리를 잃고 돌아온 주인공의 안타까운 시절을 눈물이 나도록 감동스럽게 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본 <장수상회>는 남 주인공이 자기 부인과 가족들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치매에 걸려서 헤매는 모습을 그렸는데, 전체 스토리가 남의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내가 좀 아는 조영남의 전 부인이었던 윤여정의 뛰어난 연기는 눈물 없이 못 보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영화는 온 동네가 바라는 첫사랑으로 시작됩니다. 틈만 나면 버럭 소리를 지르고,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는 까칠한 노신사 성칠은 '장수마트'를 지켜온 오랜 모범 직원입니다. 그는 해병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은 넘쳐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나 다정함 따윈 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성칠의 앞집으로 이사 온 고운 외모의 ‘금님’은 퉁명스언 성칠에게 언제나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소녀 같았습니다. 성칠은 그녀의 모습에 당혹스러워 합니다. 그런 성칠에게 금님은 저녁을 먹자고 제안합니다.
무심한 척했지만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성칠에게 장수 마트 사장 '장수'는 비밀리에 첫 데이트를 위한 노하우를 전수하고, 성칠과 금님의 만남은 온 동네 사람들은 물론 금님의 딸 ‘민정’이의 커다란 관심사가 됐습니다.
모두의 응원에 힘입어 첫 데이트를 무사히 마친 성칠은 어색하고 서툴지만 금님과의 설레는 만남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칠이 금님과의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뒤늦게 약속 장소에서 금님을 애타게 찾던 성칠은 자신만 몰랐던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인생 가장 빛나는 순간 시작된 러브스토리의 마지막에 드디어 사랑의 비밀이 밝혀집니다. 흥행에는 큰 성공을 하지 못했다는 이 영화가 나에게는 절말 흥미롭고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세번째 영화 <세시 봉>은 내가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에 가 본 명동과 세시봉 등에 대한 기억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나름 옛 생각이 나게 하는 영화여서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나는 내년부터 내 습관을 바꾸어 보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아주 병적인 나의 습관 중 하나는 '차분하지 못하게 설치는' 버릇입니다. 참 오랜만에 차분하게 한국 영화 세 편을 보았으니 습관 고치기의 출발은 괜찮은 듯합니다. 사실 나는 어느 약속이나 30분 이상 일찍 나가서 기다립니다. 특히 골프장에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갔으면서도 나 혼자 나왔다고 탄식하기 일쑤입니다. 음식도 빨리 먹어서 다른 친구들이 이제 막 시작하려면, 나는 잘 먹었다고 내 뱉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보느라고 잠도 한숨 안 자고 좋아하는 위스키를 한잔도 안 마시면서 장장 13시간 반의 비행을 마치고 인천에 도착하니, 온도는 영하로 떨어졌고 공기는 매섭게 차가웠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짐을 찾아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서울 방배동 아들 철준이 집에 도착하니 저녁 8시가 되었습니다. 며느리 다미와 철준이는 제 시간에 내가 도착하지 않아서 걱정이 되어 미국에까지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나 혼자 인천에서 서울까지 가보겠다고 하면서 아무도 공항에 나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나의 느긋한 습관을 가지려는 첫 번째 훈련은 성공한 셈이었습니다.
옷을 많이 가지고 왔지만, 생각보다 한국이 추웠습니다. 한국전쟁이 난 1950년 무렵 한강이 꽁꽁 얼던 기억을 되살리며, 나는 그동안 너무 덥고 따뜻한 곳에만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추운 맛을 톡톡히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