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이윤택 성추행 파문...부산 문화계에 불어닥칠 찬바람이 걱정스럽다

/ 논설주간 강성보

2019-02-21     논설주간 강성보
30년 전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열기가 한창 뜨거웠던 어느날 밤, 경북 안동에서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서른두 살 주부가 어슥한 밤거리를 걷다가 젊은 청년 두 명의 습격을 받고 성폭행을 당하기 직전 한 청년의 혀를 깨물어 절단시킨 사건이었다. 그 피해 여성에 따르면, 친구와 놀다 귀가하는데 골목길에서 갑자기 두 남자가 달려들거니 한 남자가 자신의 옆구리를 발로 차 쓰러뜨린 뒤 치부를 만지면서 강제로 키스를 시도했다. 그 여성은 입안에 뱀 같은 혀가 들어오자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 깨물었다. 그러자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물컹한 뭔가가 입안에 머금어지는 것을 느꼈고 남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사건은 경찰에 접수됐고, 청년들은 강제추행치상죄 및 방조죄로 기소됐다. 남의 입안에 혀를 집어넣었다가 잘렸으니 더 이상 분명한 증거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심 재판 도중 가해자 청년들은 엉뚱한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 집에서 술을 마시고 놀다가 귀가하던 도중 길바닥에 앉아 있던 피해자가 다가오더니 인근 식당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그녀를 부축해 골목길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부축하면서 몸이 밀착하여 뺨이 맞닿게 되자 술김에 호기심에서 키스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가해자들의 변호사는 피해자를 집안 문제로 불화를 일으키는 등 부도덕한 여성으로 몰아부쳤고 사건 당일 술에 취해 밤거리를 흐느적거리며 다녔다면서 가해자 청년들을 오히려 꽃뱀의 마수에 걸린 피해자로 둔갑시켰다. 게다가 그 가해 청년들은 피해자를 무고 혐의로 맞고소하고 잘린 혀에 대한 배상금까지 요구했다. 사건은 묘하게 전개됐다. 형사법정에서 검사마저 여성의 폭행 피해 진술의 일관성이 없다면서 피해 여성을 과잉방어 혐의로 기소, 1년 징역형을 구형했다. 그해 9월 10일,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성폭행범 혀 깨문 주부에게 1년 구형”이란 제목이었다. 전국의 여성계가 발끈했다. ‘여성의 전화’ 등 여성단체는 성폭력 추방을 위한 긴급 시민 토론회를 개최, “강간에 대한 정당방위가 죄인가”를 여론에 호소했다. 하지만 이 형사법정의 판사는 피고가 된 피해자 주부에게 징역 5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다. 정당방어라 인정될 수 없는 지나친 행위라는 것이다. 상가가 밀집돼 있고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으니 피해자가 공포에 질려 혀를 깨물었다고 보기 여렵다는 것이 판결문 요지였다. 여성의 전화는 “강간범을 옹호하는 안동지원의 유죄판결에 항의하며”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7인의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해 항소심 준비에 들어간다. 피해 여성의 무죄판결을 끌어내기 위한 범시민 가두서명 운동을 전개했고 항소심이 열린 대구 고등법원 앞에서 무죄선고 촉구집회도 개최한다. 결국 이듬해 1월 대구 고법은 피해 여성의 정당방위를 인정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그 피해 여성은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고 그 가정은 풍지박산됐다. 1990년 9월 이 사건은 영화화됐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 만으로>라는 제목이었다. 원미경이 피해 여성 주부로 나오고, 김민종이 가해 청년으로 분했다. 또 손숙이 피해 여성의 변호사, 이경영이 상대방 변호사였다. 영화에서 원미경은 마지막 진술을 통해 항소심 판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다시 한 번 이런 일을 당했을 때는 아무런 저항없이 가만히 있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에 돌아가 일상생활을 하겠습니다. 만일 다시 이런 일을 당한다면 판사님이나 검사님에게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운명이거니 하며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순간 관객들은 모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낀다. 극장 어둠 속에서 나지막하게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한국 페미니즘 영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지금 전국에 불고 있는 ‘미투(#MeToo) 회오리 바람’ 속에서 최악의 성추행, 성폭행범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연극인 이윤택 씨다.
지난 14일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의 폭로로 터진 이윤택 성폭행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엊그제 이 씨의 사죄 기자회견이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성관계는 했지만 물리적 성폭행은 하지 않았다”는 변명이 십수 년 동안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낙태까지 했다는 피해자도 나왔다. 한 피해자는 “마치 사이비 교주 같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윤택을 처벌하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피해자들이 단합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고, 이미 청와대에도 십수만건의 청원이 올라왔다. 형사 처벌을 받게 될지 여부는 알수 없으나 그는 이미 얼굴을 들고 사회에 나타날 수 없을 정도로 매장당했다. 이 장면에서 그와의 개인적 관계를 얘기한다는 것은 객적인 일일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이윤택 씨와 인연이 많다. 학교 동문에다가 한때 부산의 한 신문사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 연극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쌓아가는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건대, 윤택이 형의 첫인상은 별로였다. 1980년 가을 언론 통폐합에 따라 국제신문이 부산일보에 흡수되면서 부산일보 편집국에서 수인사를 나눴을 때였다. 고교 선배로서의 자애스런 풍모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세상을 비웃는 듯한 시니컬한 눈매, 카랑카랑한 하이톤의 목소리는 쉽게 친해질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느낌을 줬다. 게다가 자칭 시인이라 했다. 그 당시 필자가 품었던 시인의 모습은 소월(素月)이나 백석(白石), 이상(李霜)과 같은 단아하고 창백한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거무틱틱한 얼굴에 저항적인 인상의 그는 솔직히 선비들이 묵향 속에서 폼나게 음풍영월하는 서재보다는 세상의 낙오자들, 효웅들, 그리고 도적들이 우글거리는 양산박(梁山泊)에나 어울릴 듯했다. 이듬해 가을까지 한 1년 남짓 부산일보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이윤택 씨가 보여준 행동은 필자의 예상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여기자들에게 낯이 화끈해지는 노골적인 농담을 서슴없이 던졌다. 방과 후 후배들하고 회사 인근 찻집에서 고스톱을 칠 때 수틀리면 담요를 뒤집어 엎기가 예사였다. 심지어 필자와 육박전을 벌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참, 성질하고는!”이라는 욕설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풍모와 성격을 가진 사람이 글을 쓰면 기가 막힌 시어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시작(詩作)의 장소는 잘 정돈된 서재나 풍광 좋은 자연이 아니었다. 시끌벅적한 신문사 편집국 한 모퉁이, 술자리, 심지어 화장실 등 아무 데서나 시상이 떠오르면 잉크 똥이 지저분한 모나미 볼펜으로 종이 쪼가리에 한 줄 쓱 써 제낀 뒤 나에게 던져주는데 데 읽어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는 언어의 마술사였다. 춘향전에서 거렁뱅이로 위장한 암행어사 이몽룡이 주막집에서 술 한 잔 얻어먹고 지어 준 시를 보고 주모가 “몰골은 흉악해도 문자 속은 있구먼...”이라 했다던가. 이윤택은 외모는 그래도 시는 해맑고 아름다웠다. “우찌 저럴 수가” 할 정도로 그의 시심(詩心)은 껍데기 육신과는 판이했다.   그의 시어의 위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한토막. 81년 어느 나른한 봄날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부산 광복동 수다방에서 커피 한 잔씩 시켜놓고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히 쌓여갈 무렵, 어둑하던 다방 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미모의 여성 두 명이 입장하면서 자체 발광(發光)한 것이다.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두 여성에게 쏠렸다. 필자 역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그가 “와? 자아들 한번 꼬시볼래?”라고 했다. “어떠케요?”라고 반문하자, “니는 가마니 있어바라” 하더니, 담배 은박지에 볼펜으로 몇자 끄적거린 뒤 웨이터를 통해 전달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두 여성, 쪼르르 우리 테이블로 달려왔다.  그 시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여태껏 기억할 만큼 나는 머리가 좋지 못하다. 다만 남자가 읽어봐도 가슴 깊숙히 숨겨진 감수성을 뒤흔들며 깨울 정도로 날카롭고 영롱했다는 인상만 남아있다. 또 그날 저녁 청춘이었던 우리들이 그 미모의 여성들과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낡은 흑백 영화 필름 속의 스틸 사진마냥, 그의 시에 필이 꼽혀 우리 쪽으로 다가오던 그 여인들의 상기된 표정만 아슴프레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해 가을, 필자는 서울로 직장을 옮겼다. 그리고 그하고 헤어졌다. 다시 그를 만난 것은 90년대 초 중구 정동의 한 찻집에서였다. 신문사를 그만 두고 연극인으로 변신한 이윤택이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와 인터뷰하러 올라온 김에 나를 찾았던 것이다. 그의 모습은 확 달라져 있었다. 신문사 초년병 편집부 기자의 때는 벗겨지고, 잘나가는 문화예술인으로서의 포스가 빛났다. 5대5 가르마로 좌우로 길게 늘어뜨린 장발에 얼굴 만면한 미소, 호탕한 웃음소리… 담배 피는 모습도 멋있었다. 예전엔 부산역 노숙자처럼 오종종하게 한모금씩 빨았던 것 같은데, 새로 등장한 이윤택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워 물고 느긋한 표정으로 연기를 내뿜는 것이 영화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거트를 연상케 했다. 다만 저항적이고 호기심 가득한, 움푹 패인 눈매만은 옛날 그대로였다. 부산에서 가마골 소극장과 연희단 거리패를 만들어 <시민 K>, <오구-죽음의 형식>이란 실험극으로 혜성같이 등장해 세상을 놀라게 한 이윤택에게는 ‘문화 게릴라’라는 근사한 닉네임이 붙어 있었다. 혁명가 체 게바라는 “게릴라란 압제자에 저항하며 분노한 민중을 위해 싸우는 비정규전 전사”라고 말한 바 있다. 기존의 문화 질서에 도전장을 던지고 하이에나처럼 나타난 이윤택에게 문화 게릴라란 별칭은 정말 딱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한 동인지 편집진의 요청에 의해 몇 년전 서울 혜화동 ‘게릴라 극장’에서 이윤택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게릴라 극장은 연희단 거리패가 만든 객석 70여 석의 소극장. 여기서 현재 안톤 체홉의 4막짜리 시골 생활극 <바냐 삼촌>을 공연하고 있는데, 마침 그날은 월요일이라 공연이 없다고 했다. 그는 삐걱거리는 철제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이 극장 2층의 이른바 ‘아지트’에서 거의 잠옷 차림으로 필자를 반겼다. 주변엔 방금 박차고 나온 듯한 이부자리가 널부러져 있고 앉은뱅이 탁자 위에는 먹다 만 라면 냄비가 나 뒹굴어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늘 보아왔던 자연인 이윤택의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 그와 나눈 인터뷰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왜 문화 게릴라입니까? “요절한 중앙일보 기형도 기자가 붙여줬지요. 1988년 <시민 K>로 서울 흥행에 성공하자 당시 ‘문예중앙’ 인터뷰 기사에 "문학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게릴라 식으로 서울 입성"이란 제목을 달았는데 이게 언론에 회자된 것이지요. 기 기자와는 참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그 역시 시인이었는데, 자신은 여성적이고 서정적인 시인인 반면 나는 남성적이고 파괴적인 야수파 시인이라 했지. 참 아까운 사람이었는데, 너무 젊은 나이에 그만…” -게릴라란 별명이 맘에 드십니까? “글쎄, 나의 문학세계를 적절히 표현한 게 아닌가 싶네요. 게릴라든, 아나키스트든 내가 추구하는 해체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지요. 내 작품은 기존 연극과 달리 스토리텔링 중심을 극복하고, 시간과 공간을 파괴하는 것이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까.” 여기서 초창기 이윤택 동문의 작품에 대한 언론 평을 하나 소개한다. 1990년 2월 한국일보 문화면에 실린 <오구-죽음의 형식> 연극평인데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그러니까 원형연극이라 할 산오구굿의 거리극적 특성을 극대화시키면서 그 속에 뒤틀린 현실을 자연스럽게 삽입한 이색적 작품을 창출했다. 그 결과 형태와 내용 면에서 전통과 현대가 혼융될 수 있었고 병든 현실이 풍자의 도마 위에 올려져 난타당한 것이다. (…..) 중앙 기성 연극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넘치는 열정은 지방 연극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해체주의란 무엇입니까? “일상을, 상식을 과감하게 깨고 나오는 것이지. 우리의 전통과 현대, 지식과 대중을, 틀에 얽매이지않고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삶을 표현하는 것이지. 우리는 열린 연극이라 말하고 있지요.” -대충 헤아려보니 만드신 연극만 한 100여 편 되는 것 같은데,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아지트 벽에 장식된 몇몇 연극 포스터를 가리키며) “<오구>와 <어머니>지요. 특히 오구는 1989년 초연한 뒤 지금까지 25년 동안 국립예술극장, 명동예술극장 등에서 공연되고 있는데, 우리 연극단의 주수입원이지. 어머니도 손숙 씨 주연으로 한 20년 동안 롱런하고 있지요. 하지만 정말 애착이 가는 것은 1992년 만든 <바보각시>이지요. 나의 에스프리가 담겨 있다고나 할까.” -이제 한국 연극계의 태두로 자리매김됐는데, 그 많은 작품을 만들게 된 열정의 연원은 무엇입니까? “글쎄, 배고픔의 추억이라고나 할까요? 그냥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지요. 쓰겠다 마음 먹고 원고를 대하면 나도 모르게 글이 써내려져 갑니다. 고전이나 우리 전통문화에서 많은 힌트를 얻어요. 신문사 편집기자 시절 조사부(자료실)에서 틈틈히 축적해둔 내공이 큰 도움이 됐어요. 특히 작고하신 부산일보 이창우 국장님이 가르쳐주신 편집 언어의 압축적인 표현법이 나의 시 세계와 대본 쓰기에 지금도 길잡이가 되고 있어요.” -연희단 거리패 운영은 어떻게? “70여 명의 식구들이 공동체 방식으로 운영합니다. 나도 월급을 받지요. 일종의 콤뮨이라고나 할까요. 각자 무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항차 문화재단을 만들 생각입니다. 우리 연극단의 모든 재산은 다 이 재단 소속이 되는 것이지요. 내가 죽더라도 내 자식이 이 재단에서 받을 물질적 유산은 한푼도 없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는 그 ‘아지트’에서 소주를 한 잔 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다. 지금 돌이켜보면 라면 냄비와 온갖 책들이 어지럽던 그 아지트 역시 후배 여자 단원들로부터 안마를 받던 성추행의 현장이었지 않았나 싶어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가 연극인들의 공동체라며 자부심을 갖고 내세우던 연희단 거리패는 이미 해체가 선언됐다. 참으로 안타깝다. 그가 거느리던 기장의 가마골 극장 역시 문을 닫았다. 그와 연관 없는 부산의 몇몇 창작극 공연도 취소됐다고 한다. 이윤택 파문의 여파로 부산의 연극계 뿐 아니라 전국의 문화계에 불 찬바람이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