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토요일 아침 11시 25분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저녁 6시 팰리스 호텔의 '서궁(西宮)'에서 종근당 이장한 회장이 초청한 만찬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는 전 고려대 임상원 교수, 고흥길 전 의원, 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양휘부 회장이 동참했습니다. 다들 미주리에서 수학하거나 연수한 경력으로 저와 인연이 있는 분들입니다. 고흥길 씨는 부인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은퇴 후에는 할 일이 있어야 한다면서, 70세가 넘었어도 아직도 좋은 자리를 책임지고 있는 양휘부 씨가 모두 부럽다고 했습니다. 양휘부 씨는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을 마치고 유선방송 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이제는 KPGA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다들 그의 대단한 능력과 말년 운을 부러워했습니다. KPGA는 멤버가 6300여 명이나 되며, 골프가 대중 스포츠로 대단히 인기 있어서, KPGA 회장은 한국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라고 합니다.
다음날, 큰 아들 철준이 식구와 동생들인 영자 내외, 원흥, 원식, 그리고 경자를 초청해서 서초동 '홍재명 청국장'이라는 고급 한정식 식당에서 멋있는 점심을 내가 대접했습니다. 이 집은 값이 좀 비싸고 특별 봉사료까지 지불해야 하지만 수준 높은 한정식을 제공하는 멋진 있는 식당입니다.
서울을 떠나기 전날, 나는 친구 박춘길과 최해준 내외를 만나서 공덕동 식당에서 점심을 잘 대접받았습니다. 해준이는 경제과였으며, 고인이 된 지 20여 년이 되는 영철이가 아주 좋아 하던 친구로서 게리 쿠퍼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키도 크고 잘난 목포 친구입니다.
점심 식사 후, 3시경에 성곡언론재단에 들렸습니다. 성곡재단의 한종우 이사장은 지난 10월에 재단이 동아일보의 인촌상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으며, 또 동아TV에서 성곡재단을 다룬 영상 프로그램을 선물로 나에게 주었습니다. 쌍용그룹 창업자 고 김성곤 회장이 설립한 성곡언론재단이 그동안 한국 언론 발전에 기여한 바를 사회 각계가 인정한 것입니다.
서울을 떠나는 날이 다가오자 인사차 만날 사람들이 아직도 많아서 출발 전날까지 일정이 꽉 찼습니다. 한 동안 소식 없이 지낸 홍일식 총장을 만났는데, 홍 총장은 항상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홍 총장에 의하면, 강력 범죄로 한국 검찰이 기소한 통계는 일본보다 높지 않으나 사기범죄는 일본에 비하여 3배가 아니고 무려 340배라고 합니다. 이런 통계를 두고 한국 내에서 설명이 분분한데, 어느 학자는 한국에서 사기범죄가 성행하는 것은 한국사람이 그만큼 지능이 일본 사람들보다 좋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답니다. 사실 교묘한 사기수법을 창안하는 일은 고도의 창의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 좋은 머리를 나쁜 데 쓴 사례가 바로 한국 사람들의 사기범죄라는 사실에 기가 찰 노릇입니다. 홍일식 총장은 본인의 저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나에게 선물했습니다.
드디어 2주 만에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습니다.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며느리가 전번처럼 인천공항까지 태워다 주어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번 짧은 여행에서도 귀여운 손주 하은이와 윤석이와 여러날을 같이 보내면서 더더욱 가까워졌고, 아들 철준이와 며느리 다미의 지극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국 가족, 친지들과 같이 지낸 며칠이 태평양을 건너는 장시간 비행기 여행의 어려움을 싹 가셔주었습니다.
인천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오는 아시아나 202편은 서울로 갈 때보다도 빈자리가 더 많아서 나는 가운데 네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누워서 왔습니다. 비록 2주간이었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나중에 어떻게 답례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여행 전 정한 '나를 다시 찾는다'는 여행 목적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아직도 욕심과 오기를 버리지 못하고 있나 봅니다. 사실 미주리 동문회에서 공로패를 준다고 했을 때 사양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모처럼 연말에 많은 친구들을 만나서 싶어서 겸사겸사 서울까지 갔습니다.
한국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먼저 밥값을 내려고 계산대에 나간 적이 많지만, 친구들이 기회를 주지 않았어서 잔뜩 얻어만 먹고 왔습니다. 내 형편이 닿는 한 서울에 가도 밥값을 내가 내려고 노력했지만, 손님 대접을 해준다고 지인들이 기어코 나를 만류하니 고맙고 미안할 뿐입니다.
여러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거나 살아 있어도 건강이 다들 좋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건강입니다. 나도 남은 생애에 건강을 위해 더 큰 노력을 할 작정입니다.
이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내 여생의 목표는 뚜렷합니다. 나와 55년을 함께 살아 온 '국보급'(80세까지 같이 살아 온 아내는 국보급이라고 한답니다) 또는 '고위층' 파트너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 배려하고 해로하려고 노력하렵니다. 내 2세는 세 명이며, 3세가 다섯 명, 여기에 4촌까지 치면, 1세가 15명이고 2세는 숫자도 이름도 다 모를 정도로 많습니다. 나는 이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