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등화 이명박, 물 건너 간 정치보복 프레임...다스 법인카드가 스모킹 건?

2018-03-20     편집위원 이처문

문외작라(門外雀羅)는 중국 전한시대 사마천이 전해준 고사성어다. 방문객이 끊겨 ‘문 밖에 참새 그물을 친다’는 뜻이다. 사마천이 말하기를, 처음 '적공'이란 사람이 정위(廷尉) 벼슬에 오르자 손님들이 집 앞에 들끓었다. 그러다 그가 파면되자 ‘문 밖에 참새 그물을 쳐 놓을 정도’로 한산해졌다. 적공이 다시 정위가 되자, 방문객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에 사마천은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이런 시를 써 붙였다고 한다.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사귐의 정을 알겠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겠으며,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사귐의 정이 곧 나타나더이다.”

이 글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세상 인심에 집착하지 말라는 주문도 담겨 있다. 권력을 잃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세태에 실망할 게 아니라, 인간사회의 속성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게 사마천의 권고가 아닌가 싶다.

마찬가지로 고굉지신(股肱之臣)을 멀리 한 권력자가 문전성시에서 문외작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지난 주 검찰에 출두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랬다. 그의 집 앞에는 그 흔한 태극기 든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지자들한테 인심을 잃은 탓인지 모르지만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검찰에 출석하는 모습치고는 지나치게 적요했다.

이 전 대통령이 검찰 청사 앞에서 입장문을 읽는 순간 40년 전 까마득한 나의 고교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잔뜩 흐렸던 어느 봄날, 운동장에서 입학식이 열렸다. 단상에 오른 교장 선생님이 축사를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에 존경하는 학부모들을 모시고 입학식을 치르게 되어...”

30초쯤 지났을까. “풉” 하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때마침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영문도 모른 채 인사말을 이어갔다. ‘화창한 봄날’이라고 했던 사실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가끔 고교 친구들이 모일 때면 그 옛날의 일을 들춰내 안주감으로 삼곤 했다. 교장 선생님은 입학식 매뉴얼과 준비된 원고에 따라 충실하게 축사를 했건만 날씨가 따라주지 않았다. 사소한 실수였지만 한편으론 사람의 고정관념은 의외로 강하다는 느낌이 든다. ‘입학식=화창한 봄날’이라는 등식이 눈 앞의 보슬비까지 못 보게 막았던 것 같다.

이 전 대통령도 그랬다. 그는 입장문에서 “민생경제가 어렵고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 매우 엄중한 때 저와 관련된 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대단히 죄송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보에 관한 그의 ‘입장’이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과거 북한과 관계를 끊고 대결국면으로 치달아 위기를 불렀던 정권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기적처럼 대화 무드가 조성된 지금이다. 자칫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불발될까 노심초사하는 국민을 향해 ‘엄중한 안보환경’이라는 낡은 레코드를 틀어댄 거다. 그가 생각하는 ‘안보’는 누구를 위한 안보인지 궁금하다. 우리의 안보환경은 늘 남북한이 적대적 상황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그의 고정관념이 읽힌다.

그는 이날 검찰에 출두하면서 줄곧 주장해온 ‘정치보복’이란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검찰이 제시한 물증이나 정황 증거들이 ‘정치보복’을 주장하기엔 무리가 따른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을 터이다. 일각에선 다스의 법인카드가 이번 사건의 ‘스모킹 건’으로 등장할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검찰이 김윤옥 여사의 법인카드 사용 내역을 증거로 제출하자, 모르쇠로 일관하던 그의 주장도 하나 둘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검찰이 19일 그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이 바람 앞에 선 등불 신세가 됐다. 그가 받는 혐의는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횡령, 배임 등이다. 사위는 불법자금 수억 원을 받아 김윤옥 여사에게 건넸다는 진술을 했다. 아들 시형 씨는 이상은 회장의 배당금 수억 원을 가로챘다고 한다. 김윤옥 여사는 재미 사업자에게서 명품백을 받았다가 측근이 돈으로 입막음하고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각서까지 써줬다고 한다. 자칫 온 가족이 수사를 받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 이 전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이실직고가 아닌가 싶다. 옛 측근들에게, 아들에게, 사위에게, 형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명예라도 건지려면 솔직하게 털어놓는 길밖에 없다. ‘이명박 죽이기’로 몰고 가기엔 증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청나라 때 학자 고염무는 “청렴하지 않으면 받지 않는 것이 없고(不廉則無所不取),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못할 짓이 없다(不恥則無所不爲)”고 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모르는 전직 대통령이 정치보복을 주장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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