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들의 明과 暗
지난 70년대 후반 필자는 모 일간지 경제부 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어느 날 LG그룹 본사에 일이 있어 빌딩에 들어서는데 마침 구자경 당시 사장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다가 필자를 보자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어디 좋은 데 가서 맛있는 점심을 먹게 생겼구나 생각하면서 따라가니 지하 구내식당으로 내려가서 칼국수를 시키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비서실 직원에게 물어보았더니 늘 그렇게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식사하는 것을 즐긴다는 말이었다.
또 한 번은 고 정주영 당시 전경련 회장을 비롯한 몇몇 기업인과 동남아시아 여행을 했었다. 아세안 5개국과 경제협력회의를 하러 떠났는데 첫 기착지인 필리핀 마닐라에서 호텔에 짐을 풀고 식사하기 위해 인근 한국식당을 찾았다. 그런데 회장님들의 손에 무언가 신문지로 둘둘 만 물건이 들려 있지 않은가. 의문은 식당에 도착해서야 풀렸다. 신문지를 벗겨보니 행사 주최측이 호텔방에 한 병씩 갖다놓은 포도주를 다들 들고 나온 것이었다. 그러면서 "돈 주고 일부러 사먹을 필요 있나?"하고 계면쩍은 표정들을 짓는 게 아닌가. 속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부자라는 사람들이 너무 쩨쩨하게 구는구나 생각했었다.
물론 그들이 늘 그렇게 구두쇠로 사는 것은 아니다. 좋은 호텔에 묵고 최고급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비싼 술집에서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러나 사업과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을 보면 의외로 검소하다는 것을 느낀 적이 많다. 정주영 회장이 양복에 묻은 때가 보이지 않게 일부러 감색을 고집했다느니, 구두를 한번 사면 몇 년씩 신는다느니 하는 얘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기업인들에 따라서는 담배갑을 뒤집어서 메모지로 쓰거나 한번 쓴 종이를 잘라 휴지로 이용하는 경우를 본 적도 있다. 어쨌든 우리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애쓰던 창업시대의 기업인들은 그렇게 사치하고 호사스럽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이 주변에서 지켜본 필자의 느낌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아무것도 없었던 우리나라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기업을 일으켜 수출을 하고 일자리를 만듦으로써 오늘날 세계 11대 경제강국으로 성장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모든 일에 명암이 있듯이 공이 있는 만큼 과도 있다. 엄청나게 덩치가 커진 기업을 제대로 세금도 내지 않은 채 자식들에게 넘겨주었다든지, 벌어들인 돈을 근로자에게 적절히 배분하지 않고 자신들의 배만 채운 경우도 더러 있다. 또 비자금을 조성해 기업외적인 활동에 사용하는 등 비난받을 일들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과거의 이런 일들이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오늘날 많은 기업주들이 손가락질을 받고 심지어 사법처리 대상이 되고 있다. 여러 총수가 앞서 언급한 잘못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비리가 확인돼 사법처리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대기업들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을 생각할 때 잘못을 저지른 기업인들이 처벌받는 것은 당연하다. 또 이제는 기업도 국가와 사회의 근간이 되는 공적 기능을 무시할 수 없어 철저히 조직적으로 또한 투명하게 운영되는 게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비리를 저질렀거나 죄 지은 기업인들을 적발해 사법처리하는 것은 국가경제의 앞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기업의 부정적인 측면이 너무 강하게 부각되면서 기업과 기업주에 대한 인상이 국민들에게 좋지 않게 각인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잘못된 일로 처벌을 받더라도 긍정적인 면도 국민들에 널리 알려 정당한 평가를 받도록 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래도 기업 기능을 확대하고 기업인들의 활력을 북돋워주는 게 필요하다. 뭐니 뭐니 해도 경제를 움직이고 나라의 부를 창출하는 주인공은 기업이고 기업인들인데, 그들이 힘을 내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지면 나라 전체의 활기가 떨어지게 된다. 최근 경제가 위축되고 경기마저 침체되는 분위기다. 그럴수록 기업인들이 힘을 내 성장잠재력을 복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걱정스럽다. 기업이나 기업가들이 국가경제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게 필요하다. 초기 경제개발시대 창업주들의 순수한 열정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