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함, 완벽함, 그리고 참을 수 없는 허무함

시빅 문화부 기자의 명품 영화평/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고

2015-03-17     이창호 시빅뉴스 기자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구전처럼 우리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런데 보기에 정말 완벽한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아마 지금 내가 소개하는 영화가 그런 호기심에서 출발한 영화이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는 참 완벽한 영화다.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너무나도 완벽한 프레임과 편집, 그리고 시퀀스의 배열을 가지고 있다. 잘 짜놓은 터키산 융단처럼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며, 완벽하다. 그렇다. 완벽함 외에 다른 호칭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퀀스가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장 소개, 황금비율이라고 해도 부족할 만큼 대칭적인 화면, 합주곡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배우들의 표정과 대사, 그리고 연기까지, 모든 것이 공장의 전자동 생산 라인처럼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거기엔 어떤 인간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에 계산돼 있는 알고리즘에 반응하는 인형 같은 느낌만 든다. 서두에 밝힌 완벽함은 이런 의미에서의 완벽함이다.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느낌이랄까. 그리고 상당히 아름답다. 영화 속 장면과 배우들의 복장은 모두 분홍빛과 보랏빛 등의 화려한 색채감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의 주 배경인 호텔 전경과 유럽 곳곳의 골목 그리고 성의 모습은 물론이고 다소 잔혹한 장면이 나올 때도 화면 색상과 배경음악의 음색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영화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아이스크림을 눈으로 떠먹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한 작가의 책 내용을 통해서 시작된다. 정확하게는, 그 책의 저자를 통해서 책 속의 주인공인 ‘무슈 무스타파’가 전하는 내용을 담담히 듣는, 일종의 오래된 형식의 구전 동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늙었지만 품위 있는 노신사가 전해주는 이야기보따리라고 하자. 무슈(monsieur) 무스타파. 이 영화의 주인공인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신사이다. 호텔, 성, 언론사, 주식회사. 안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거기다가 품위도 있다. 그러나 멋들어진 그에게서 남과 다른 고독함을 느낀 사람이 있으니 영화 속에서 무스타파의 이야기를 엮은 작가가 그이다. 작가가 영화의 주 배경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지배인인 무스타파를 만나 저녁 만찬을 즐기며 무스타파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영화 줄거리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작가의 첫 질문은 아주 단순하고 평범했다. “왜 이 호텔을 사셨습니까.” 그러나 무스타파의 평범치 못한 대답이 이어진다. “사지 않았다네.” 무스타파는 그럼 어떻게 그 호텔을 가지게 된 걸까. 이야기는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최고로 아름답고, 최고로 완벽한 호텔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그 명성에 걸맞은 최고의 호텔 콘시어지(concierge)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무슈 구스타브. 화려한 금발과 별빛처럼 맑고 푸른 눈동자에 잘 정돈된 수염을 가진, 고풍스러운 보랏빛 턱시도 복장의 그는 호텔의 VIP 손님들을 대하는 최고 관리자로써 호텔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또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구스타브에게는 아름답지만 늙고 불안한 노령의 내연녀가 있었으니, 영화 속 가상의 국가 주브로브카 공화국에서 가장 이름난 부자인 셀린느가 그녀이다. 매년마다 셀린느는 구스타브를 찾아와 뜨거운 사랑의 나날을 보내고 자신의 본거지인 릿츠 성으로 돌아갔다. 셀린느는 어느 날 구스타브에게 전례 없는 불안함을 내비친다. 그녀는 말한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야 한다면, 당신과 함께 갈 거야.” 호텔 관리자인 구스타브로써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구스타브는 셀린느를 그냥 돌려보내고, 그녀는 이후 자신의 성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셀린느가 죽은 뒤 구스타브는 당시 호텔에 갓 들어온 신입 로비 보이이자 화자의 어린 시절인 ‘제로 무스타파’와 함께 곧장 그녀의 성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의 유가족들과 함께 셀린느의 유언장 내용을 듣는다. 셀린느는 구스타브에게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 불리던 그림 ‘사과를 든 소년’을 유산으로 남긴다. 셀린느의 아들 디미트리는 이 사실에 분노하고 구스타브는 그림을 들고 성을 빠져나온다. 다음날 호텔로 경찰들이 찾아온다. 체포명목은 셀린느를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구스타브는 체크포인트 19라는 교도소에 잡혀 들어간다. 구스타브가 교도소에 잡혀 있는 동안 무스타파는 ‘멘들 제과점’이라는 곳의 제빵사인 아가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아가사는 이후 무스타파와 구스타브가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이후 구스타브는 교도소에서 친해진 사람들과 자신의 부하인 무스타파의 도움으로 탈옥을 한다. 탈옥 후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지만 실종돼 버린 서지-X라는 이름의 릿츠 성 집사를 로비 보이 무스타파와 함께 찾아 헤맨다. 사건의 전말을 찾아 동분서주하던 무스타파와 구스타브 그리고 아가사는 서지-X가 ‘사과를 든 소년’ 뒤에 숨겨놓았던 셀린느의 진짜 유언장을 찾아내게 되고, 거기엔 구스타브의 결백을 증명하는 내용과 그녀가 자신의 전 재산을 구스타브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구스타브는 나중에 불미스러운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의 전 재산을 무스타파에게 남긴다. 이로써 무스타파는 압도적인 재산을 가진 부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무스타파는 자신의 가족들인 아가사와 그의 아들이 독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홀로 호텔의 지배인으로써 여생을 살아오게 된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난 뒤 작가는 무스타파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이 호텔은 당신과 구스타브를 연결해주는 곳입니까.” 무스타파는 쓸쓸하게 웃으면서 아니라고 한다. “나와 그는 같은 일을 해왔다네. 우리에게 딱히 연결고리는 필요 없지. 이곳은, 아가사를 위한 곳이라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다른 여운도 무엇도 없었다. 모든 플롯이 깔끔하고 정적인 풀샷 안에서 끝맺음을 이루고, 이후 영화는 크레딧과 함께 끝난다. 마무리도 완벽했다. 물론 수학적인 느낌으로 말이다.

이렇듯 완벽한 영화 속에서 불완전한 요소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시’이다. 영화 속에서 구스타브와 무스타파는 끊임없이 시를 읊는다. 그러나 그들이 읊는 시는 언제나 중간에 끊긴다. 예상치 못한 일에 의해서, 혹은 주변사람들의 만류나 무시에 의해서 말이다. 게다가 시를 진심으로 경청하는 자 역시 아무도 없다. 이 불완전한 시를 완전하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자, 두 번째로 불완전한 요소인 존재가 바로 아가사이다. 극중 캐릭터들은 모두 완벽하고 고풍스럽다. 그들은 언제나 화려한 언변을 뽐내며 수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행동 역시 자로 잰 듯 일관적이고 직선적이며 깔끔하다. 그러나 아가사는 그렇지 못하다. 그녀는 화상처럼 번진 추악한 흉터를 얼굴에 가지고 있으며 극중 구스타브의 말을 빌리자면, ‘절벽가슴의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고 일도 항상 궂은 일만 한다. 하지만 아가사는 이 모든 완벽한 사람과 장소들이 가지지 못한 한 가지를 가지고 있다. 순수함이다. 그녀는 순수함의 상징이다. 극중의 모든 인물은 다들 현실과 타협을 본다. 그리고 자신의 완벽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완벽함을 손에 넣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아가사는 그저 호텔의 로비 보이인 무스타파를 사랑하고 멘들 제과점에서의 힘들고 찝찝한 제빵 일을 즐긴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강직하면서도 감성적이다. 그리고 무스타파와 구스타브에게 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가 낭송하는 시는 두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럼 아가사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어떨까? 그들은 앞서 말했듯이 완벽하다. 재력, 명성, 혹은 아름다움, 고풍스러움, 또는 힘과 권위 등 우리들이 평소 꿈꾸는 이상을 하나씩 현실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완벽함 속에서도 다른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때로는 그것이 남의 재산이고 또 때로는 그것이 남의 목숨이기도 하다. 결국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무엇인가. 해피엔딩? 그렇지 않다. 죽음 혹은 허무, 그리고 망명. 모두 빛을 등지고 어둠 속의 뒤안길을 걷게 된다. 그들은 화려하다. 그러나 그 뿐이다.

과연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쯤에서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도처에 널려 있는 완벽함은 오히려 우리를 웃게 만든다. 기계 같은 움직임과 대사, 정물화로 그려놓은 듯 딱딱한 건물과 배경들은 마치 마리오네트 인형극처럼 느껴진다. 솔직히, 조금은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주변을 둘러보자.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완벽한 삶을 꿈꾸고 있진 않은가. 틈새 하나 없이 빼곡한 일정, 24시간 불타는 열정과 경쟁, 대로처럼 뻗은 승승가도, 남에게 우러러보이는 화려함과 성공, 우리가 꿈꾸는 것들은 이름만 다를 뿐, 결국엔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던가.

영화는 우리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왜 완벽함을 꿈꿉니까.” 마치 작가가 무스타파에게 그랬듯, 예의에 어긋나지만, 그러나 영혼이 미치도록 갈구하는 그런 질문에 당신은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완벽함은 결국 허무함과 환상으로 가득 찬 껍데기만을 남길 뿐이다. 그러나 그 달콤하고 짜릿한 느낌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완벽함을 쫓는다. 반듯한 성공과 보장되고 든든한 보람, 뭐 그런 것들을 말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뭘까. 구스타브는 남들 앞에서 화려한 언변을 뽐내지만 정작 자신의 저녁 식사는 홀로 골방에서 먹는 시리얼 한 그릇이 다다. 가만 보자니 우리가 사회 속에서 탄탄한 성공을 위해 하는 짓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회생활은 찌드는 일상의 연속이다. 앞서 밝힌 구전처럼 이 또한 슬프게도 우리가 변할 수 없는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속설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네 삶이 이렇듯 얼룩지고 피폐해져가며 허무하고 환상적인 화려함과 완벽함을 쫓는 불나방 같기만 한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영화 속에서 구스타브는 말한다. “도살장처럼 변해버린 이 잔혹한 세상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은 있는 법이지.” 구스타브의 말처럼, 우리에겐 언제나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은 다른 무엇도 아닌, 우리의 순수함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마치 아가사가 그랬듯이 말이다. 비록 우리네 삶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고 끝없이 타성에 젖는 위험한 줄타기일지라도 순수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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