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 간 대학시절의 두 은사님을 잃었다. 한 분은 서울에, 한 분은 부산에 계셨다. 나는 그분들을 통해 소설 보는 눈을 키웠고, 소설가로서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생각하는 소설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분 모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내가 발표한 소설을 읽으면 반드시 전화를 해서 독후감을 말씀해주시곤 했다. 늘 변함없는 격려였고, 진심어린 충고였다.
서울에 계신 선생님의 부고는 뜻밖에 날아왔고, 부산에 계신 선생님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불길한 예감을 가지던 중에 들었다. 두 분 다 통화는 가끔 했지만 뵌 지는 오래였고, 한 번 봬야 할 텐데 하면서도 하루하루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이었다. 그랬기에 두 분의 부고를 받을 때마다 더없이 망연했고, 죄를 지은 것 같았다. 두 분 다 결결하고 강직해서 호오(好惡)가 분명한 성품이었다.
한 분은 감정표현이 좀 더 직접적인 성격이었다. 예술에 관한 한 어떤 전위적인 것에 대해서도 이해의 폭이 넓어 우리의 의식을 확장시켜 주셨다. 학생들의 일탈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젊은이라며, 탓하기는커녕 격려할 적이 많았다. 하지만 비인간적이거나 예의에 어긋난 행동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꾸짖었다. 우리들의 창작행위에 대해서도 다소 어설프더라도 창의성이 뛰어난 작품에 대해선 극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진부한 흉내 내기에 대해서는 눈물이 쏙 날만큼 냉정하게 비판을 하셨다. 또, 선생님께선 당시 유신정권이어서 입조심이 일상화되어 있을 땐데도 우리가 놀랄 정도로 솔직하게 독재에 반대하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시곤 했다.
그런데 훗날 뵌 선생님의 정치적인 견해는 뜻밖에 보수적이었다. 선생님께는 그에 악착같이 맞서는 진보적인 제자가 한 명 있었는데,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치열하게 설전을 벌였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그 제자는 학교 다닐 때부터 선생님과 맞장 뜨기로 소문난 학생이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늘 그 도전을 유쾌하게 받아들이셨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만나 술을 마시고 다투기도 하면서 친구처럼 지냈는데, 어느 날 결국 선생님께서 결별을 선언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날도 정치적 견해 차이로 언쟁을 벌이다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제자에게 화가 나신 선생님께서 다시는 널 보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그 2년 후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에 갔더니 검은 상복을 입은 제자들이 모여 그동안의 선생님 행적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 기행이나 기벽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 제자도 그 자리에 끼어 있다가 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는 몹시 침울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가 버리실 줄 알았다면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어야 했다고, 사과전화를 진작 전화를 드렸어야 했다고 후회 깊은 말을 했다. 나 또한 같은 심정이었다. 서울과 부산에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자주 가 뵙지 않았고, 통화를 해본 것도 거의 1년 전이었다. 부고를 받고 부리나케 서울행 기차를 탔지만 다 소용 없는 짓이었다. 이제 일흔둘 되신 선생님께서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렇게 가버리실 줄 몰랐던 만큼 자주 안부를 여쭤야했던 것이다.
그 후회가 옅어질 즈음, 올해 봄 또 한 분의 은사님이 돌아가셨다. 평소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올곧은 성품에 깊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었다. 선생님은 늦게 등단하셨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집필을 하셨고,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늦깎이 등단을 하신 선생님께서는 소설창작론 첫 수업에 오셔서 "소설가는 역사의 파수꾼이자 현실의 증거자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것은 소설가를 꿈꾸고 있는 내게 던지는 강력한 주문 같았다.
그때는 참으로 엄혹한 시절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신독재를 끝내기 위해 수면 위에서, 아래서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랬기에 선생님의 말씀은 더욱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길지 않았다. 겨우 한 학기의 수업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말씀은 마음에 새겨졌다.
그 후, 선생님을 다시 만난 것은 세월이 많이 흘러 소설공부를 다시 시작했을 때였다. 십 수 년 만에 다시 만난 선생님은 여전히 결곡한 모습에,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 그에 어울리지 않게 구수하고 정감 있는 말투를 갖고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나를 알아보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내 이름과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계셨다. 어찌나 반갑고 놀랍던지. 나를 몰라보실 텐데 인사를 할까 말까 망설였던 것이 괜스레 죄스러웠다. 선생님께는 한 학기의 인연도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던 것을, 나는 그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던 것인가 싶기도 했다. .
그 몇 년 후, 나도 등단을 하여 선생님을 자주 뵙는 관계가 되었다. 선생님께선 스스로 스승이기를 원치 않으셨지만 내 마음 속에선 늘 스승이셨다. 선생님은 그 관계에 얽매이기를 싫어 하시면서도 항상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제 두 분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나셨다. 소설을 발표해도 더 이상 격려도, 조언도 들을 수 가 없다. 두 분의 전화번호는 아직 내 폰에 남아 있지만 전화를 걸어볼 수도 없다. 그동안 가뭄에 콩 나듯 안부전화만 할 것이 아니라 자주 뵈어야 했던 것을,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었을 때 나으면 보자는 말씀을 믿지 말고 기어이 가 봬야 했던 것을…. 바쁘다는 핑계로 사람다운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 뒤늦게 이토록 후회스럽다.
그래서 어느 수사(修士)의 말이 오늘 더욱 깊이 와 닿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놓아야 한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스승의 빈자리가 더욱 쓸쓸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