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큰 별, 국민배우 신성일 영원히 잠들다

폐암 3기 판정받고 투병 중 급격한 병세 악화로 별세...<맨발의 청춘>으로 스타덤, 50년간 500편 출연 / 류효훈 기자

2018-11-04     취재기자 류효훈
당대를 풍미했던 한국 영화계의 큰 별 배우 신성일 씨가 폐암 투병 끝에 4일 새벽 2시 30분 향년 81세로 타계했다. 복수의 언론에 따르면, 고(故)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에 힘써왔다. 그는 병세가 좋아져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핸드프린팅’에 참가했으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도 참석했다. 3일부터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된 그는 치료를 받던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전남대병원으로 이송됐다. 결국 4일 새벽 2시 30분에 눈을 감았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따르면, 1937년 경상북도 영덕에 태어난 그는 경북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 가세가 기울어 서울에 올라와 청계천 근처에서 호떡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고교 동창인 손시향이 가수로 성공한 것을 보고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한국배우전문학원을 찾았다. 이후 여러 감독들의 강의를 듣고 신필름의 배우 공모에 합격하며 배우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본명이 강신영이었지만, 신필름을 운영하던 신상옥 감독이 ‘뉴스타 넘버 원’이라는 영어 뜻을 한자 이름으로 지어준 신성일(申星一)을 예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1960년 영화 <로맨스빠빠>의 막내아들 역을 맡아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신성일은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만추(1966)>, <초우(1966)>, <장군의 수염(1968)>, <별들의 고향(1974)>, <겨울여자(1977)>, 등 수많은 히트작에 만들어내며 1960~70년대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특히, 1966년 한 해 동안에만 89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신성일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데뷔작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만난 배우 엄앵란과 1964년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있던 워커힐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4000여 명이 몰렸다. 심지어 초청장이 엄청난 가격에 암거래되기도 했다. 50여 년간 배우로 활동하며 500여 편의 수많은 영화를 찍었던 만큼 수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63년 청룡영화상 인기상을 시작으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 제28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공로예술가상, 부일영화상 영화발전공로상 등 약 30여 개의 굵직한 트로피들을 들어 올렸다. 영화 제작에 참여하거나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신성일이 제작 및 감독을 맡은 작품들은 <연애교실(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이다. 감독한 영화는 <그건 너(1974)>, 제작진으로서는 <코리아 케넥션(1990)>, <남자시장(1990)>, <물위를 걷는 여자(1990)>,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1991)>, <안개 속에서 2분 더(1995)> 등이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강신성일로 개명한 그는 1981년 11대 총선 서울 용산, 마포구에 한국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도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 동구 갑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에서 세 번의 도전 끝에 당선되며 의정활동을 했다. 2001년 한나라당 총재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생전 마지막 공식석상 활동은 지난 달 10월 열린 제 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었다, 당시 만해도 병세가 호전된 듯 보였고 오는 9일에도 서울 충무로 명보아트홀에서 열릴 ‘제8회 아름다운 예술인상’에서 공로예술인상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어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한편, 영화계에서는 고 신성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장례를 영화인장을 치르는 방안으로 세우고 구체적인 절차를 유족들과 논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