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한형조 편④] "결국 인문학은 인간적 삶을 구현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다"

동양고전 전문가 한형조 교수에게 인문학의 길을 묻다 / 차용범

2018-11-07     차용범
[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한형조 편③]에서 계속

잠시 소식 나누기에 게을렀던 지우(知友)가 그의 역작 한 권을 보내왔다. <성학십도, 자기 구원의 가이드맵>(퇴계 이 황 편집‧한형조 독해, 2018,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이다. 지난 주말 D통운 택배원으로부터 카톡 한 통이 왔다. "교보문고께서 주문하신 상품을 ◯◯◯ 상임감사님(필자 차용범)께 배송 완료하였습니다." 교보문고에서? 내가 주문한 적 없으니 누가 책을 보냈나? 직책을 쓴 것을 보니 직장으로 보냈겠네! 역시 월요일 출근하니 책상 위에 책배달 상자가 놓여 있다. 배송 스티커의 ‘주문자’는 ‘한형조 님.’

한형조, 그와 나 사이를 ‘지우’로 표현하는 게 이를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를, ‘지우’(知遇, 자기의 인격이나 학식을 남이 알고 잘 대해 줌)는 아닐지라도, ‘지우’(知友,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한 벗) 정도로는 사귀고 싶어 하고, 그 역시 나의 마음을 조금은 간취하리라 기대하고 있는 사이이다. 책 앞날개에 붙은 그의 소개는 이렇다. "동해안의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들풀로 뒤덮인 고전의 옛길을 헤쳐 왔다. <왜 동양철학인가>(2000), <왜 조선유학인가>(2008), <조선유학의 거장들>(2008), <붓다의 치명적 농담>>(2011), <허접한 꽃들의 축제>(2011)를 썼다." 그렇다. 그는 고전을 통해 삶의 길을 배우고, 문명의 비평적 전망을 탐색하는 동양고전 전문가다. 나와는 좋은 인연으로 만나, 가끔씩이나마 숨은 정을 나누고 있고.

그와 나의 인연은 2014년부터. 내가 잡지 ‘부산이야기’의 인물비평 코너 ‘차용범이 만난 부산사람’에 그를 초대하면서부터다. ‘타이틀’은 ‘동양고전 전문가 한형조 교수에게 인문학의 길을 묻다’. 이 글의 첫머리를 보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한학·철학 전공 한형조(韓亨祚) 교수(56). 동양고전의 현대적 해설을 통해 삶에의 통찰과 행복의 길을 전파하는 한국 인문학계의 쟁쟁한 고수다. 고리타분할 것 같은 동양철학을 오늘 '삶의 문제'로 널리 귀환시킨 입심 좋은 얘기꾼·인기 높은 글쟁이다.

<유교, 희로애락의 기술>, <붓다의 치명적 농담>, <허접한 꽃들의 축제>... 그의 저술과 문장은 모던하고 경쾌하되 엽기와 과감을 넘나든다. 이 양의 동·서와 시대의 고·금, 진지함과 레토릭을 넘나드는 종횡무진은, 그가 모든 원전과 원전에의 다양한 해석을 형형한 눈빛으로 꿰뚫고 있기에 가능했다는 찬사다.

동양고전의 현대화를 통해 삶의 문제를 천착해 온 집념은 어디에서 출발했나? 위대한 불교경전에도 인문학적으로 접근, 종교의 정수를 쉽고 깊이 있게 설명하는 그 저력의 뿌리는 무엇인가? 한국의 인문정신을 찾는 열정으로, 우직하고 성실한 대중강연·글쓰기를 통해 인문학의 심화·확산에 헌신해 온 그의 남은 숙원은 또 무엇인가?...“

이 도입평문을 읽으면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나는, 그해 12월 초, 굉장히 매서웠던 서울추위 속에서 ‘한국 인문학계의 쟁쟁한 고수’를 만나, 실상 그에게 푹 빠져 버린 것이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 그 인문학 얘기에 내가 오래도록 집중하자, 그는 되물었다. “내 얘기가 (정말) 재미 있나요. 고리타분하지 않고?“ 그만큼 그와의 첫 만남, 그의 인문학 세계는 깊고 넓었고, 나의 흥미를 한껏 자극했다.

물론, 그를 대면하기부터가 쉽지 않았으니, 귀한 만남에서 ‘묻고 답하기’를 통해, 그가 살아온 길(road)과 그의 인문학 풀(pool)을 두루 섭렵해야 했기도 하다. 그와의 ‘관계맺기’ 과정? 내가 붙인 작은 제목은 “번거로움 싫어하는 인문학자 '천막'에 끌어넣기”다. 그만큼 첫 만남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대략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형조’를 알았다. 그가 제시하는 '인문학 속 행복의 길'을 '부산이야기' 2015년 신년호에 실을 요량으로, 2014년 여름 인터뷰 요청 메일을 보냈다. 그는 늦은 답장을 주며, "국제 세미나를 하고 왔고, 공부하는 재미가 만사(?)를 잊게 해 주었다"고 얘기를 시작했다.

“...편지와 기획을 읽고, '부산이야기'와 '차용범'이란 인물을 검색해 봤다. <부산사람에게 삶의 길을 묻다>(차용범 저) 서평을 보고, 기획의 의도와 방향을 대강 짐작했다. 인터넷에 건축가 승효상 편이 있어 읽어봤다. 정리 잘 했더라. 깔끔한 고수의 칼 솜씨(?)를 보는 듯 했다...”.

이 부분까지 읽고 인터뷰의 성사를 낙관한 것은 성급한 것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피하는 이유를 열거했다. 아주 흥미 있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나는 거기 끼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인문학은 실용이나 건축, 예술에 비하면, 한가한 소리 아닌가, 하고 싶은 얘기는 책에서 하고, 가끔 신문에 적기도 했고, 인터뷰를 하자면 오가는 번거로움도 번거롭고..., 그렇게 이해해 주면, 마, 고맙겠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이메일의 각주에 붙은 한자성어가 예사롭지 않았다. 원전은 <중산간괘(重山艮卦)>, "간기배(艮其背) 불획기신(不獲其身) 행기정(行其庭) 불견기인(不見其人) 무구(无咎)..."로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얻지 못하며, 그 뜰에 행하여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으리라", 대략 이런 풀이였다. 현대어로 번역하면 '생각이 적절한데서 멈추어 본래의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정도였다.

그의 내심을 짐작했다. 그는 "공부하는 재미"를 얘기했으니 공자의 말대로 행복을 얻는 길을 즐거이 걷고 있다. 그는 "번거로움도 번거롭고"를 말하며 "허물이 없으리라"를 넌지시 들이미니, 그 역시 행복을 즐기는 길의 한 갈래겠다. 이런 사연을 딛고, 한 두어달 묵혀가며 대시한 끝에 성사에 이른 인터뷰이다. 그는 "낙타가 천막에 들어가는 수에 걸렸다"고 한탄했지만.

사전 질문지를 주고받고, 서울에서의 인터뷰를 거쳐, 초고를 그에게 보냈다. 사실관계의 오류, 전문용어의 오해, 나아가 그의 얘기에 나온 ‘깊은 뜻’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는 원고에 대략 만족했던 모양이다. 답변을 보내왔다. “원고 잘 정리했더라. 역시 깔끔한 고수의 칼 솜씨(?)를 보는 듯 했다”고-.

이 원고를 ‘부산이야기'에 게재한 뒤, 그와는 가끔씩 연락을 주고 받곤 했다. 당시 재직하던 회사의 직원 교양강좌에 초대하고, 부산일보 주최 ‘부일 CEO과정’의 초청강사로 추천하며, 그를 부산으로 불러(?) 내려 반가운 해후를 하기도 했다. 회사강좌를 다녀간 뒤 보낸 이메일에서 그는 괜한 민망함을 털어놨다. “청중들은... 불확실한 미래, 닥친 비즈니스와 조직에 적응하기 바쁜데, 인문학이 한가한 사치일 수 있는 시절을 살고 있어서, 늘 강의에 조심스러운 바 있다...”고.

연락해 둔 친구들과 용호동 바닷가의 카페에 들린 얘기도 들려줬다. 자리를 파할 무렵, 주인장이 종이와 펜을 주면서, 한 마디 적어달라더라. 처음 겪는 일이라, 일순 당황(?)했지만... 이내 스탠스를 수습하고, 밤에 화려한 전등불 속의 야경을 적은 다음, "일일시호일, 사소한 것들의 축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얼마나 작고 흔한가?"라고 적어줬다.

그는 "부산 나들이, 아주 신선한 여행"이었다면서, 나에게 주는 덕담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해운대의 바람에 비할 바는 아니군요. 그곳 차 선생님 사무실도 부러웠고요... 벽의 글귀도, 딱 있을 곳에 있다 싶었습니다. 그 도회 안의 무릉에서, 좋은 시간들... 누리시고, 늘 프레쉬하게, 젊음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벽의 글귀’? 그는 사무실 벽에 걸어둔 한시 족자를 보곤 그 뜻을 새긴 모양이었다. 내가 부산시 미디어 센터장으로 있을 때, 고교 교장으로 정년하신 존경하는 원로화가가 직접 붓글씨를 써서 책상 앞 벽에 걸어주신 족자였다. 나의 생활이 너무 번잡한 듯 하다며 시의 뜻마냥 좀 여유 있게 살아가라는 도움말씀을 주신 터였다.

나는 그 부분도 호응했다. “제 사무실의 그 족자, 명(明)대 고계(高啓)라는 분의 ‘심호은군(尋胡隱君)’인가 하는 시입니다. 주신 분은 그 제목을 ‘벗에게 가는 길’로 풀어 주시더군요. 말씀대로, 참 즐길 만한 내용이구요. 책상에 앉았다가 눈 들어 그 글귀들을 되새기면, 주신 분의 권유대로, 친구를 찾아가는 그 광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들의 여유를 한 뼘이라도 흉내 낼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이런 사연을 바탕으로, 나는 그를 ‘지우’로 여기기에 이른 것이다. 그 지우가 일부러 구입하여 보낸 책, <성학십도>. 나는 그가 이 책자에 매달리려 함을, 첫 만남 때 알았다. 그리고, 올 여름 그 책이 나온 소식도 들었다. 다만, 읽기에 힘 좀 들겠고, 언젠가 한번 보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온 터였다. 책은 정말 첫인상부터 만만찮았다. 쪽 수가 814p인가에 이르고, 내용도 한문원문에, 번역, 주석과 해설을 붙였으니 읽으려면 상당한 공력이 필요할 터였다. 책 소개부터 찾았다.

"1568년 겨울, 퇴계 선생이 조정을 떠나면서 선조 임금에게 올린 글이다. 제왕이 감당해야 할 심학(心學), 즉 마음의 경작법을 그림 열 장으로 정리한 것이다. 퇴계는 방대한 유교 고전의 숲을 뒤져 핵심 텍스트를 선별, 순서를 매기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각각의 그림들은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이렇게 부자유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또 그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어떻게 연마해야 하는지를 일러주고 있다."

그렇다. 이 책 서평마냥, 그림은 암호나 같고, 짧은 선언은 난해하다. 한형조 교수는 21세기 현대 한국어를 쓰는 독자들을 이 비밀의 책 속으로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서평엔 이런 내용도 있다. “...풍요의 한 가운데 기쁨은 없고, 삶이 어디로 떠밀려가는지 막막하기만 한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 이 오래된 학문이 전하는 영혼의 치유법과 삶의 기술에 귀를 기울이기를 권한다.,,,”

짐작컨대, 그는 이 책을 독해해 낸 공력을 넌지시 귀띔하며, 나에게 ‘삶의 기술’ 익히는 방법을 더 가깝게 전해 주려 책을 보낸 것이다.

내가 그에게 “가히 인문학 열풍이다. 인문학, 도대체 뭔가? 동양철학에 정통한 인문학자로서, 현대적 어법으로 설명해 달라”고 윽박질렀을(?) 때, 그는 대답했다. "인문학은 삶의 기술(the art of living)을 배우고 연마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에서의 종교, 철학 모두 자아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랑과 성장, 삶을 존중하고 겸손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결국 인문학은 인간적 삶을 구현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라고 할까.”

그는 인문학의 효용 몇 가지도 설명했다. 첫째,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하고, 둘째, 삶을 견뎌내는 기술을 습득시키며, (...) 결국 인문학의 기술은 인생을 견디게 하는 것이며, 고전·역사의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통해 위로를 받고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강조다.

아, 그랬다. 나의, 지우, 그 줏대 있는 ‘딸깍발이 선비’는 이즈음 나에게 꼭 필요한 공부법을 상기시키며, 그 주요 텍스트의 하나로 이 책을 보내준 것이다. 나는 과연 이 책을 읽어가며, 삶을 견뎌내는 기술, 마음을 다스리는 여유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책 한 권이 주는 새 화두는 그리 가볍지 않은데....

[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강남주 편①]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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