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5제(題), 세 번째

2015-06-22     칼럼니스트 박기철

그동안 황령산 칼럼에 필자는 쓰레기와 관련된 글을 써왔다. 그 맥락을 이어서 2015년 1월 1일부터 매일 쓰레기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올해 12월 31일까지 쓰려고 한다. 그 중에서 우리 주변의 것과 관련된 최근의 12개 꼭지를 황령산 칼럼으로 갈음한다.

인간편의 우선주의가 만들어낸 장치

부산. 진달래를 활짝 피운 봄날이다. 2015년 3월 28일 土.

마호메트(570~632)가 창시한 이슬람교을 믿는 무슬림들인 중동 지역의 아랍인들은 하루에 다섯 번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 성전을 향하여 이마를 땅에 대며 기도를 올린다. 절대복종해야 하는 알라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이므로 기도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래서 손과 발을 흐르는 물로 씻고 기도를 드린다.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가 보더라도 그들의 의식은 매우 정결하며 경건해 보인다. 우리가 산에 들어갈 때는 무슬림들이 예배실을 들어갈 때의 마음과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산신령을 믿어 왔다. 산에 사는 신령님이 산신령이다. 보름달이 뜰 때 그릇에 물을 떠놓고 산신령님께 빈다. 이를 잘못된 미신(迷信)으로 무조건 폄하하기보다 애니미즘에 속하는 토속 신앙으로 보면 편하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산신령을 믿지는 않더라도 산을 경건하게 여겨야 하는 마음까지 내던져 버릴 필요는 없다. 산은 속세와 달리 자연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입산 전에 속세에서 찌든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한 후에 들어 가야 옳다. 저기 산 입구에 설치된 먼지털이 장치가 산에 들어 가기 전에 속세에서 묻은 먼지를 터는 데 쓰이는 것이라면 좋겠는데, 정반대다. 산에서 묻은 먼지를 터는 데 쓰인다. 산에서 내려와 뭐 그리 털 게 많을까? 오히려 산의 정기를 품고 내려 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설령 신발에 흙먼지가 조금 묻었다면 그냥 신발을 벗어서 한 손에 한 짝씩 잡고 마주쳐서 툴툴 털면 그만이다. 굳이 저렇게 전기장치를 동원해 요란한 굉음을 내며 주변을 시끄럽게 하는 일은 밉쌀스럽다. 더군다나 산에 쓰레기를 버렸던 사람이 내려와서 자기한테 묻은 먼지를 턴다면 더욱 그렇다. 저 주변에 사는 편백나무들은 인간에게 좋다는 피톤치드를 발산해 주면서도 저 소음을 온몸으로 매일 듣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짜증날까? 결국 인간이 편하자고 만들었지만 없으면 더 좋을 것이다. 산 아래에 산에서 주워 가지고 내려 온 쓰레기를 버릴 쓰레기통이나 있으면 좋겠다.

쓰레기가 조금만 나오는 원시적 방식

부산. 흐린 봄날에 진 벚꽃잎이 아련하다. 2015년 4월 5일 日.淸明.

터키식 커피는 가장 오래된 방법으로 커피를 추출한다. 구리로 만든 작고 좁은 냄비인 이브릭이나 체즈베에 갈아진 커피 가루를 넣고 세 번씩이나 거품이 나도록 끓여서 진하게 우려낸다. 이후 커피를 추출하는 다양한 방식이 개발되었다. 모카포트, 사이폰, 프렌치 프레스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끓이는 방법도 있다. 또한 커피가루를 여과지 위에 얹어 뜨거운 물을 천천히 내려서 추출하는 핸드 드립 방식도 있고, 찬 물을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 뜨려 내려서 추출하는 워터 드립 방식도 있다. 후자는 네덜란드인들이 배 안에서 항해할 때 쓰던 방식이라 네덜란드식 지불인 더치 페이처럼 네덜란드식의 더치 커피라고 한다. 커피 몇 잔 분량을 추출하는데 열 시간 이상이나 걸리고 또 냉장고에 넣어 숙성까지 시켜야 하니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슬로우 커피다. 급행(express)에 해당하는 이태리말인 에스프레소(espresso)는 말 그대로 가장 빠르게 커피를 추출하는 패스트 커피다. 기계에 볶은 원두를 넣고 단추만 누르면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가 나온다. 여기에 2차대전 때 미군병사들이 했던 것처럼 물을 타 마시면 아메리카노가 되고, 우유를 섞어 마시면 카페(coffee) 라테(milk)가 된다. 캡슐에 든 커피를 작은 기계로 추출하는 방식도 있다. 공장에서 만드는 인스턴트 커피는 커피 농축액을 물에 녹기 쉬운 과립 상태로 건조시킨 것이다. 오늘 난 가장 원시적인 터키식을 본따 내 방식대로 커피를 추출했다. 작은 스테인레스 주전자에 갈아진 커피 가루를 넣고 세 번이나 거품이 나도록 끓여 우려내 쌍화차 마시면 딱 좋을 토속적인 잔에 우아하게 따라 마셨다. 커피 미분이 조금 씹히면서 바디감이 헤비한 진한 커피맛을 즐겼다. 바리스타가 보면 무식한 방법이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마시면 쓰레기 버릴 일이 별로 없어서 좋다. 밖에만 나가면 여기저기 커피 가게다. 밖은 물론 매장 안에서 마실 때 쓰는 일회용 커피 컵은 쓰레기 분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별 규제도 없다.

가장 아름답게 떨어지는 동백꽃

부산. 벚꽃이 지는 흐린 날이다. 2015년 4월 6일 月.

김유정(1908~1937)은 경춘선 김유정역 부근 마을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 그의 대표작 <동백꽃>은 점순이와 '내'가 일으킨 이야기를 짧게 그린 단편소설이다. 소설 말미에 클라이막스 구절이 나온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점순이와)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나는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아마도 두 남녀는 이 사건 이후로 정분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노란 동백꽃에서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가 난다니 이상하다. 여기서 동백꽃은 나무 줄기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고 하여 생강나무라고 불리는 동백나무에서 열리는 노란 꽃이다. 꽃 모양이 노란 산수유꽃을 닮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빨간 동백꽃과 전혀 다른 동백꽃이다.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에서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다고 하지만 동백(冬栢)꽃은 꽃 이름처럼 겨울에 한창 피는 겨울꽃이다. 벌과 나비가 아니라 동박새가 수분을 돕는 조매화(鳥媒花)다. 봄에 꽃이 한창 필 때 지기 시작한다. 이미자가 너무나도 구슬프게 불러서 금지가요가 되었던 <동백아가씨>에서 동백꽃이 빨간 이유는 그리움에 지치고 울다 지쳐서 빨간 멍이 들어서다. 베르디의 오페라 <La Traviata>를 일본인들은 <춘희(椿姬)>라 번역했다. 오페라 원전 소설의 제목인 <La Dame aux Camélias>은 동백꽃 여인(Camelia Woman)이란 뜻이다. 이 오페라와 소설의 줄거리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처럼 슬프다. 창부(娼婦) 비올레타의 비극적 사랑이다. 우리네 여인들이 머리를 예쁘게 손질할 때 쓰는 동백기름을 열리게 하는 꽃이 왜 그렇게 비극적 소재가 될까? 아마도 동백꽃이 떨어지는 모습 때문이 아닐까? 다른 꽃들이 꽃잎을 한잎한잎 떨구며 시들어 떨어지는 것과 달리 동백꽃은 한창 요염하게 필 때 똑 떨어진다. 동백꽃은 가장 아름답게 떨어지는 꽃이다. 이렇게 농염할 때 떨어져 쓰레기가 되지 않고 흙으로 돌아가려는 자태가 너무도 아름답고도 아련하다.

성악설이 더 맞을 것같은 주변 일상

부산. 스산한 봄날이다.2015년 4월 7일 火.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여긴 맹자는 공자와 함께 유가사상을 이루었다. 악하다고 여긴 순자는 유가에 속했으면서도 법가의 창시자가 되었다. 한비자를 거쳐 법가사상은 진시황에게 수용되어 중국 최초 통일왕국인 진나라(BCE 221~206)를 세우는 데 기여한다. 그런데 15년 만에 망했다. 세상을 치밀하고 정교한 법(law)으로 다스리는 법가 사상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는 유효했을지언정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아무튼 인간의 본성을 성선설과 성악설로 구분하는 건 너무 이분법적이다. 고자(告不害)는 달리 생각했다, <맹자>의 고자편에 기록된 논쟁에서 맹자가 고자에게 밀리는 느낌이다. 고자는 인간 본성에 선악의 구분이 없다고 했다.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이다. 비슷한 시기 고대 그리스에 에피큐로스는 인간의 본성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 했는데 고자와 생각의 맥락이 비슷하다. 2000여 년이 지난 후 절대적 선은 없다고 했던 니체도 사고의 방향이 엇비슷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과 악을 확실히 구분하는 맹자와 순자보다 선과 악의 이분적(二分的) 경계를 허문 고자, 에피큐로스, 니체에게 공감이 간다. 그런데 인간 본성에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은 없어도 악한 사람은 있는 것 같다. 극악무도하며 잔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악한에 대해서 만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에서도 선하지 않고 악한 사람이 있다. 특히 산에서 자기 입에 단 사탕 또는 자기 몸에 좋을 양파즙 등을 먹고 쓰레기를 산에다 버리는 사람들이 그렇다. 자기 주머니나 가방에 넣어와 쓰레기통에 버리면 될 텐테 작은 수고도 귀찮다는 심사다. 오로지 자신의 편리 만을 쫓는다. 그들을 악하다기보다 무심코 그런 짓을 한다고 가볍게 여길 수 있으나 그런 무심함이 나는 악하게 여겨진다. 벚꽃이 흩날리는데 누군가가 나무 홈에다 지지고 담배꽁초를 버렸다. 이러고 싶을까? 말없는 생명체 나무에 얄미운 짓을 하는 사람들 속은 도대체 어찌 생겨 먹었을까? 내가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쓸어지니까 쓰레기인데 아닌 쓰레기

부산. 겨울이 다시 온 것같다. 2015년 4월 8일 水.

시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감히 시를 썼다. 시는 설명(explanation)이 아니라 표현(expression)하는 것이라는데 나름대로 우리말에 관해 표현했다. 산문식 수필에 익숙하기에 압문식(壓文式) 시를 쓰려니 어색하다. 내용은 바다, 꽃, 돈, 사람, 봄이라는 순우리말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 나타내는 글이다. 다섯 개 낱말들을 모아 놓으니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 온다. 시는 독자로 하여금 낯설음을 유도하려는 글이라는데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이들 낱말들에 관해 낯설음이 느껴진다면 이 글은 시가 될 자격이 있다. 세상의 모든 물을 가장 아래에서 받아 들이니까 바다고, 벌과 나비를 꼬시니까 꽃이고,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여기저기 이리저리 도니까 돈이고, 햇쌀의 기운을 머금은 쌀을 먹고 몸에 살을 키우며 사니까 사람이고, 겨울이 지나면 울긋불긋 아름다운 꽃을 보니까 봄이다. 그렇다면 쓰레기라는 낱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낱말도 역시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다.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하게 쓸다라는 동사에서 왔을 것이다. 더러워서 비로 쓸어지니까 쓰레기다. 영어로는 쓰레기를 뜻하는 낱말이 많다. waste, litter, garbage, trash, rubbish …. 휴지통에 버려질 쓰레기는 waste, 어질러져 있는 쓰레기는 litter,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나오는 생활 쓰레기는 garbage, 캔 등 재활용 쓰레기는 trash, 영국에서 일반 쓰레기는 rubbish라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다 그게 그거같다. 중국어로도 拉圾, 渣滓, 脏土, 狗屁东西, 破烂儿 등 여러 낱말이 있다. 우리에게는 폐기물, 오물 등의 한자어가 있지만 거의 쓰레기라 한다. 그런데 쓰레기도 못되는 거지 쓰레기가 너무 많다. 쓰레기란 쓸어져 담아야 할 것들인데 담아지지도 못하고 구천을 맴돌며 헤매는 떠돌이 쓰레기들이다. 그래서 비로 쓸어질 쓰레기라는 구절을 이 시에 넣기가 뭐해도 넣었다. 쓸어져 쓰레기통이나 봉투에 담겨질 쓰레기도 못되어 황천길도 못들어서는 非쓰레기들은 분해되기도 쉽지 않다. 때문에 세상은 점점 더 혼탁해진다.

엄청난 종이컵 사용량에 따른 결과

부산. 조금은 포근해졌다. 2015년 4월 9일 木.

실체와 이미지! 현실(reality)과 조작물(simulacra)! 원래 있는 그대로의 실재와 시뮬라시옹된 시뮬라크르! 이런 문제를 비판한 프랑스 철학자가 보들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였다. 그에 의하면 시뮬라크르는 실재(實在)보다 더 실재같아진다고 했다. 보들리야르는 시뮬라크르로 가득찬 현대사회를 비판했다. 시뮬라시옹이란 영어 시뮬레이션(simulation)의 불어 발음이다. 인위적으로 조작(simulation)되어진 환상적 결과물이 시뮬라크르다. 라틴어로 시늉, 흉내, 모의, 가상, 거짓, 모조, 가짜를 뜻하는 시뮬라크룸에서 온 단어다. 두 커피컵이 있다. 무엇이 진짜고 가짜일까? 즉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제물일까? 하나는 종이컵이고, 하나는 도자기컵이다. 1회용 종이컵은 원래 도자기컵을 본따서 만들었는데, 도자기컵은 또 다시 1회용 종이컵을 본따서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본따면서 무엇이 시뮬라시옹된 시뮬라크르인지 도무지 헷깔리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는 데는 종이컵의 폭발적인 증대가 결정적이었다. 1년에 우리나라 사람이 무려 230억개나 사용한단다. 대한민국 인구가 5000만명이니까 1인당 한 해에 500개나 사용하는 셈이다. 종이컵을 너무도 많이 사용하게 되다 보니까 종이 컵이 진짜 컵보다 진짜가 된 것이다. 보들리야르의 통찰대로 시뮬라시옹된 시뮬라크르가 실재보다 더 실재같아진 생생한 사례다. 그러다 보니까 진짜 도자기 컵이 가짜 종이컵을 시뮬라시옹하여 이렇게 종이컵과 똑같은 시뮬라크르를 만들게 되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보다 더 헷깔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달걀보다는 닭이 먼저인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어느 것이 진짜 컵이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다. 진짜 도자기 컵이 가짜 종이컵을 모조하여 너무도 똑같이 가짜처럼 만들어졌다. 진짜를 능가하는 가짜 종이컵 사용은 무지막지하게 늘어나고 재활용을 위한 종이컵 회수율은 1%밖에 안되니 쓸어져 담기는 쓰레기도 못되는 거지 쓰레기가 난무한다. 정말로 혼란한 세상이다.

주의를 받지 못하는 맑은 물의 정체

부산.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봄날이다. 2015년 4월 10일 金.

1999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을 했다. 흰옷 입은 3명과 검정옷 입은 3명이 두 개의 농구공을 들고 나온다. 이 때 문제가 주어진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몇 번이나 공을 패스했냐고? 그런데 이 문제는 실험을 위한 속임수였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이 공을 주고 받는 동안 고릴라가 그 틈새로 지나가는 걸 보았느냐는 것이다. 나도 이런 실험을 당했다. 나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고릴라가 유유이 지나가고 있었다. 중간에 서서 고릴라 특유의 몸짓까지도 했었다. 어찌 눈에 분명 확실하게 보이는 걸 왜 보지 못했을까? 주어진 문제만 맞히려고 농구공 패스 숫자만 세느라 고릴라가 지나가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이 선택적 주의 실험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가 주의를 집중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다른 것들은 무심하게 지나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나도 오늘 이 것과 비슷한 맥락의 실험을 했다. 동천 주변의 길을 걷는데 물이 맑았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나는 깜짝 놀랐다. 위에서는 저렇게 폭포처럼 맑은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바다와 가까운 동천의 저 하류 쪽은 몰라도 조금 더 상류 쪽인 이 동네 만큼은 생활 오수(汚水)에 대한 정화시설을 잘 갖추었나 보구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좀 수상했다. 여기부터 동천이 복개되어 쓰레기 물이어야 맞는데. 그래서 혹시 저 인공 폭포물이 바닷물이 아닌지 의심했다. 물 맛을 보았다. 짰다. 동천을 희석하려고 바다에서 공수되어 뿌려지는 물이었다. 나만 이렇게 몰랐던 것인 줄 알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게 산에서 내려오는 물인가요, 바다에서 끌어오는 물인가요? 다섯 명 모두 전자라고 했다. 어느 어르신은 아무럼 어떠냐고 내게 핀잔까지 주었다. 우리는 내 것에만 온통 주의를 집중하다 보니 바로 옆에 흐르는 동천물이 어찌 되는지 그만 무심해지고 말았다. 백양산 당감천에서 내려와 여기를 흘렀을 맑은 계곡물이 똥물로, 또 바닷물로 변하는 것도 모른 채…

만일 개가 인간에게 욕을 한다면?

부산. 그럭저럭한 봄날씨다. 015년 4월 11일 土.

주인 뒤를 능숙하게 따라 가는 개를 보았다. 주인이 어느 가게 앞에 들어가니까 이 개는 가게 앞에 편하게 앉았다. 다가가 말을 건넸다. 형씨! 여기서 뭐하세요? 아무리 말을 건넸지만 이 개는 내게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았다. 주인이 가게에서 나오니 다시 주인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이 개가 몇 살이지요? 15세란다. 암놈이었다. 새끼를 세 번이나 낳단다. 암놈한테 형씨라고 하니까 기분 나빠서 나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나 싶었다. 아주머니, 아니 할머니라고 불러야 했었다. 이름은 송이인데 새끼 때부터 키웠다고 했다. 어르신께서 송이한테 사랑을 많이 주어서 송이가 아직 건강한가 보네요? 주인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대답했다. 주인밖에 모르는 진돗개 종자인 송이는 애교는 없어도 이 동네의 귀염둥이였다. 시장을 나온 동네 사람들이 “송이야!”라고 마치 동네 아이 부르듯 다정하게 불렀다. 하도 오래 살아서 그런지 사람 말을 다 알아 듣는 것같았다. 만일 송이가 사람 말을 모두 알아 들으면 어떻게 될까? 개만큼 인간과 친한 동물은 없어도 개만큼 인간에게 욕먹는 동물도 없다. 개가 들어간 낱말은 모두 부정적이다. 개새끼, 개망나니, 개뼉다구, 개코, 개지랄, 개나발, 개소리, 개차반, 개수작, 개구멍, 개털, 개죽음, 개뿔, 개쪽, 개망신, 개고생, 개똥참외…. 개가 쓰여진 속담도 대개 나쁜 뜻이다. 개눈엔 똥만 뵌다.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 개팔자가 상팔자, 오뉴월 개패듯 한다. 제 버릇 개주랴, 개가 웃을 일이다. 개밥에 도토리다. 개가 똥을 마다하랴…. 인간과 가장 친숙하며 인간에게 가장 충직한 동물인 개가 이렇게 인간으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니 개는 억울하다. 송이도 인간 말을 다 알아 들으면 기분나쁠 것이다. 말까지 한다면 ‘사람새끼’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송이는 지금까지 15년 평생을 살면서 쓰레기를 하나도 버린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15년 동안 엄청난 쓰레기를 버리고 사니 개의 욕에 할 말은 없다.

산에 와서까지 벌어지는 무단투기

부산. 살짝 흐리지만 포근하다. 2015년 4월 12일 日.

인간 사회는 다양한 성격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다르다. 나와 다른(different) 것은 틀린(wrong) 것이 아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 다양성이 수용되는 사회는 살기 좋은 사회다. 생태계에서 다양성은 곧 건강성이다. 반면에 다양성이 아니라 획일성이 판치는 사회에서는 살기 힘들다. 하나로 획일화된 생각과 이념, 방향과 방법 만이 존재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유일한 획일성으로 통일된 사회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한 쪽이 한 쪽을 차별하게 된다. 차이(差異)와 차별(別)은 유사어 같지만 반대말이다. 차이에서 이(異)는 글자 모양대로 네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진 밭(田), 예를 들자면 콩밭, 팥밭, 보리밭, 수수밭을 함께(共) 일구는 일로 해석될 수 있다. 내 주관적 생각이다. 네 개의 밭은 서로 다르지만 틀리지는 않다. 반면에 차별에서 별(別)은 드나드는 곳(口)이나 싸인 것(勹 )을 칼(刂)로 두 동강 낸 것으로 해석된다. 수평으로 갈랐다면 상하로 갈리고, 수직으로 갈랐다면 좌우로 갈린다. 칼로 억지로 갈렸으니 두 쪽은 서로 틀렸다며 싸운다. 나는 다양성을 존중하며 차이를 추구하며 산다. 그런데 이런 꼴을 보면 도무지 인간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기 싫다. 도대체 산에까지 와서 벌이는 이런 행위를 어떻게 여겨야 할까? 이건 그냥 무심코 그냥 버린 것이 아니다. 일부러 슬쩍 버린 것이다. 이러고 싶을까?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아닌가 보다. 산에서 이랬으니 쓰레기 무단투기의 죄질이 중하다. 이런 파렴치한 작자들을 다양성 차원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담겨진 쓰레기로 보아 막걸리와 커피를 마셨다. 알코올와 카페인을 섭취했으니 취해서 그랬을까? 우리 인간사회에는 다양성과 차이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악의 무리들이 있다. 자기 혼자만 편하면 된다고 이런 짓을 하니 악하다. 잔혹한 범죄자가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 사이에 퍼져 있다. 물을 흐리는 소수(少數)의 악은 대다수의 선보다 끈질기기에 걱정스럽다.

쓰레기 문제 연구소도 겸할 소락도암

부산. 가는 비가 봄을 적신다. 2015년 4월 13일 月.

심봤다! 산꾼들이 산에서 산삼을 발견했을 때 외치는 환호의 소리라지만 나는 산에서 요 나무 조각을 발견하고는 기쁨에 겨워 심봤다를 외쳤다. 누가 이렇게 벤 것인지는 모르지만 딱 나를 위해 버려진 것같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거들떠도 안볼 나무 쪼가리에 불과했겠지만 내게는 보물처럼 여겨졌다. 딱 내 꺼였다. 대단한 횡재라도 한 것처럼 이 걸 가지고 집에 가는 길이 즐거웠다. 여기에다 인두로 지져서 글씨를 쓸 심산이었다. 내 소박한 꿈 중에 하나는 나의 터전을 만드는 것이다. 지리적 주소를 가진. 물론 내 연구실도 있고 작은 소굴과 같은 내 방도 있지만 내 호를 딴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산 중턱에 허름한 집을 하나 사서, 여기에 내 공부방이면서 놀이터이자 쉼터를 만들고 싶다. 물론 그 집은 절대로 재개발되어 헐리는 집이면 안된다. 여기에 친구들 오라 해서 노래도 부르고 곡차(穀茶)도 마시고, 내 세프 실력도 발휘하고, 동네 애들한테 무료로 한자,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국어, 기타도 가르치고 싶다. 작은 전시 공간도 만들며 소박한 즐거움인 소락(素樂)의 철학을 펼치고 싶다. 그 공간의 이름을 처음에는 소락교원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너무 종교적인 냄새가 진해서 소락도원이라고 바꿨었다. 그런데 이 이름도 사이비 같았다. 한참 후 내가 스무살 때 받은 자(字)인 청암이 떠올랐다. 푸른 암자 靑菴. 암자라는 것이 내가 꿈꾸는 그런 공간과 딱 맞았다. 그래서 소락도암이라고 최종 결정했다. 이제 글씨를 나무판에 새기는 일이 남았다. 납땜하는 작은 인두가 아니라 큰 인두가 필요했다. 5만원을 주고 샀다. 이 도구로 글씨를 지져 새겼다. 자칭 목판 인두 서예가로 등극했다. 이 작품을 우리 동네 어느 집 대문 앞에 걸고 여기가 소락도암인 양 사진을 찍었다. 제법 근사하다. 이 간판이 달려질 소락도암이 생긴다면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한 본부로도 쓰일 계획이다. 이런 나의 생각이 덧없는 드림일까? 남다른 비전일까? 다만 환상은 아닐 것이다. 정말 언젠가 꼭 이렇게 하련다.

요 차이로 백만 그루가 살아난다지만

부산.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의 날씨다. 2015년 4월 14일 火.

오른 쪽 페트병은 내가 몇 달 전부터 물통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좀 특별했다. 뚜껑이 일반 페트병에 비해 높이가 절반 이상이나 낮았다. 사용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뚜껑이 낮다고 물이 새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페트병에 적힌 내용들을 유심히 보았다. 일반 페트병의 뚜껑보다 높이가 절반 이상 낮아서 연간 100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는 효과가 난다고 적혀 있었다. 무게로 따지면 일반 페트병 뚜껑과 비교하여 0.7g 정도 가볍다는데 그 정도 작은 차이로 100만 그루의 소나무를 살린다니! 가만히 생각하니 놀라웠다. 돌려서 생각하니 더 놀라웠다. 이 병뚜껑은 페트병 전체의 부피나 무게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 되지 않는다. 대략 1/30 정도 밖에 안된다. 만일 그렇다면 30배× 1,000,000그루=30,000,000그루로 계산되니까 3000만 그루의 소나무를 죽인다는 뜻이 된다. 결국 이 페트병에 물을 담아 파는 업자들은 100만 그루의 소나무를 살린다고 생색내지만 이 페트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소나무에 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프레임을 어느 쪽에 들이대느냐에 따라 논지는 달라진다. 물론 높이가 낮은 병뚜껑을 사용하는 취지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100만 그루의 소나무를 살린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지금 페트(PET)병 만이 아니라 PE, PVC, PP, PS, ABS, HDPE, LDPE 등 화학공업 전문가들이나 알 수 있는 온갖 플라스틱들이 용기나 포장재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지금 편리하게 쓰는 플라스틱 때문에 나오는 쓰레기로 인해 죽어가는 생명체들을 모두 헤아리면 얼마나 될까? 너무 크고 많아 무지막지(無知莫知)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자연분해가 되는 플라스틱 소재를 개발하는 일이 꼭 제발 반드시 필요하다. 생분해성 소재가 개발은 되었어도 단가가 높아 시장성이 없다면 사용이 안된다. 아직은 경제주의 패러다임이 강해서 그렇다. 하지만 생태주의 패러다임이 우세하게 되는 날이 점점 당겨져 오고 있다. 죽어가는 생명체들의 소리없는 아우성 속에서.

아름다운 뒷 모습을 배린 쓰레기

부산. 벚꽃이 거의 다졌지만 맑아졌다.015년 4월 15일 水.

사람은 첫 인상이 좋아야 한다지만 나중감이 더 중요하다. 나중감이란 내가 만든 조어(造語)다. 어떤 사람의 첫 인상이 아무리 좋아도 나중에 헤어지고 나서 느껴지는 감정인 나중감이 나쁘면 좋았던 첫 인상은 금방 사라지고 만다. 첫 인상은 그 사람의 겉에서 나오지만 나중감은 그 사람의 속에서 나온다. 비슷한 맥락으로 어떤 사람의 앞 모습보다 뒷 모습이 더 중요하다. 뒷 모습이 좋으면 좋은 사람이다. 신기하게도 뒷 모습에서는 그 사람의 앞 모습에서 느끼지 못한 내면까지 묻어 나오는 수가 있다. 나도 첫인상보다 나중감,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좋은 사람이고 싶다. 말은 쉬워도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기 공부(工夫)와 수양(修養)이 부족하면 안된다. 그런데 길을 가다 뒷모습이 좋은 사람을 만났다. 딸인지 손녀인지 모를 여자 아이를 업고 가는 아저씨의 앞 모습은 못 보았다. 그런데 뒷 모습 만으로도 이 아저씨의 넉넉한 사람됨이 느껴진다. 얼마나 저 딸인지 손녀인지를 사랑하는지도. 꼬마 숙녀가 머리에 쓴 리본, 어깨에 맨 핸드백을 뒤에서 보아도 얼마나 예쁘고 귀엽고 앙증맞은 꼬마 아가씨인지 알 것만 같다. 특히 요즘 도시에서 보기 힘든 돌담길 옆을 걸어가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같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저 쓰레기다. 정겹고 포근한 모습을 그만 배리고 말았다. 저 쓰레기 때문에 이 동네가 살벌하게 느껴진다. 설마 절대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런 살벌한 동네 분위기 때문에 저 아저씨가 유괴범이 아닐까 잘못 의심될 수도 있다. 쓰레기가 많은 곳에서는 범죄율도 높다. 살기 좋은지의 여부는 크고 넓은 무엇보다 작고 좁은 요런 골목길에서 판가름 난다. 깨끗한 골목길을 가진 지역이 살기 좋다.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 없이 골목길이 깨끗하면 깨끗함 만으로도 아름답다. 곳곳에 꽃길이 있다면 한층 아름답다. 그 곳에서 사는 주민들도 아름답다. 부디 저 꼬마 숙녀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자라면 좋겠다. 저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쓰레기 골목길이 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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