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아닌 ‘사람책’을 빌려줍니다"....'위즈돔' 선풍
다양한 경험 소유자와 오프라인 대화 주선...구독료는 무료~ 1회 1만원
도서관은 도서관인데 종이책이 아닌 ‘사람책’을 대여해주는 ‘사람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에는 수 천, 수 만 권의 종이책이 있고,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대출하고 반납한다. 사람도서관에는 종이책이 아니라 사람책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사람책은 곧 사람이다. 저마다의 인생과 경험을 남에게 전하기를 원하는 사람, 즉 사람책이 사람도서관에서 사람들과의 만남, 즉 대출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책을 골라 대출을 신청하면 그 사람책을 읽을 수 있다. 즉, 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살아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사람책을 빌려주는 곳은 사회적 자본 공유 기업 ‘위즈돔(www.wisdo.me)’의 이야기다. 기업 이름 위즈돔 (wisdome)은 wisdom(지혜)과 dome(공간)을 합쳐서 만든 단어로, 지혜를 나누는 공간인 사람도서관이란 뜻이다. 위즈돔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각자의 인생 경험과 지혜가 담긴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해 ‘사람책’을 전시하고 누구나 전시된 사람책을 만날 수 있도록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운영된다.
위즈돔을 만든 한상엽 대표는 2006년에 국내 최초의 사회적 기업 대학 동아리인 넥스터스(Nexters)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적 기업이 어떻게 하면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경영을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했다. 대학 졸업 후에 잠시 일반 회사에 입사한 적이 있지만 소셜 벤처 창업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1년여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대안 기업가 80인>이라는 책과 스위스 태생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설립한 ‘인생학교’에 영감을 받아 ‘지혜를 나누면 삶이 바뀐다’는 것을 모토로 2012년 2월 위즈돔을 설립했다.
위즈돔은 올해 7월 기준으로 약 3,000명의 사람책이 전시돼 있고, 5,111건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만남에 참여한 사람은 총 3만 4,045명이다. 위즈돔을 통한 사람책 모임은 월 120회에서 150회 정도가 개설된다. 모임 중 80%는 회원들이 사람책으로서 자발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20%는 위즈돔 측에서 기획과 주최를 맡아 행사가 이루어진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다양한 사람책과의 만남이 진행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부산을 비롯한 대전, 대구 지역에 사람도서관이 개설되어 사람책과의 만남이 지역별로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서비스를 확대했다. 서울, 부산, 대전 등 전국의 사람도서관들 사이의 관계는 중앙 본사와 지방 본사로 설명된다. 위즈돔이라는 대표 브랜드 아래에서 지역별 사람도서관은 각 지방의 개성과 색깔을 살리면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큰 규모의 행사가 기획될 때는 함께 모여 진행하기도 한다.
위즈돔은 지혜를 나누는 사람을 사람책, 또는 ‘위즈도머’라고 부르며, 그 만남에 참여하는 사람을 참가자, 혹은 ‘위즈도미’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을 ‘위즈도밍’이라고 부른다. 한 대표는 위즈돔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이 소규모 강연이나 멘토링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멘토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도 위즈돔에서는 모두 사람책이 될 수 있다. 진정한 삶의 지혜와 인생경험을 가지신 분들이 너무나도 많다. 멘토와 멘티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상하관계보다는 편하고 진솔한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책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소개와 프로필을 위즈돔 홈페이지에 입력한 후, 자신이 나눠주고 싶은 이야기와 주제를 정해 등록을 신청하고 승인절차를 기다려야한다. 참가자의 안전과 위즈돔 운영 원칙에 따라 불순한 의도로 만남을 이용하거나 거짓된 정보를 올리는 사람은 관리자의 승인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위즈돔은 사람책의 얼굴 사진과 직업을 참가자에게 공개하고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 주소를 입력하도록 하고 있다. 다단계를 권유하거나 영업 행위를 하는 등 부적절한 모임을 주선하는 회원이 있을 시에는 참가자들의 신고를 통해 즉시 사람도서관 서비스에서 배제시킨다.
사람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참가자들이 사람책을 만나기 위해서는 위즈돔 홈페이지에 접속해 회원가입을 하고, 전시 중인 사람책 중 만나고 싶은 사람책에게 직접 만남을 요청하면 된다. 진행 중인 만남이 있으면, 참가 신청버튼을 누르고 만남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고 시간 맞춰 그 곳에 가면 된다. 사람책이 정한 일정 수 이상의 참가자가 모이면 오프라인에서 만남이 성사된다. 만남시간과 장소, 회비는 전적으로 경험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책이 설정하기에 따라 달려 있다. 만남은 무료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회비를 지급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며, 평균 비용은 1만 원 정도다. 참가자가 회비를 내면 20%를 사람도서관에서 수수료로 가져가며, 이 비용은 도서관 운영에 쓰인다. 나머지 비용은 사람책이 참가자들과의 만남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식사나 음료, 장비 및 장소 대여 등에 쓰인다. 사람도서관은 주로 소규모 만남을 지향하며 만남에 참여하는 인원은 평균적으로 5명 정도다. 너무 많은 인원이 모이면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을 뿐더러 사람책과 직접 자유롭게 소통한다는 취지에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즈돔을 통해 사람책과의 만남에 참석했던 이지원 씨는 만남 후기를 통해 “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잘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위즈돔을 접하게 되었고 만남에서 알게 된 분들을 통해 지금은 새로운 시작의 첫발을 내딛었다”고 말했다.
사람책과의 1:1 상담과 해결분석 만남에 참석했던 김지은 씨는 “정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머리와 마음에 있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나열해 푸는 것을 도와주셔서 맘속의 돌멩이를 빼낸 기분인 것 같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주제의 시간들로 다양한 사람책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위즈돔의 부산 버전으로 설립된 ‘부산 사람도서관’에는 지금까지 총 225명의 사람책이 등록됐다. 사람책의 직업도 가지각색이고, 나누고 싶은 경험도 가지각색이다. ‘30년 동안 음식물 쓰레기를 한 번도 배출한 적 없는 슈퍼 할머니,’ ‘여섯 평 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하는 청년 창업 이야기,’ ‘부산의 원도심과 산복도로를 알리는 부산여행 특공대’ 등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경험을 나누는 사람책이 부산 사람도서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후쿠오카 100번 다녀온 부산 싸나이로부터 듣는 여행 싸게 가기,’ ‘구제시장 쇼핑만 10년차에게 구제쇼핑 노하우 전수받기,’ ‘나만의 결혼 준비 힘드시죠? 저만의 방법 알려드릴게요’ 등 자신만의 여행 방법과 쇼핑 노하우, 취업성공 노하우, 연애 비법, 결혼과 육아 노하우 등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경험을 나누는 만남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8일, 부산 사람도서관이 주최한 ‘사람책이 되고싶다면? 열어보세요!’라는 만남이 있었다. 여기에는 50대 주부와 30대 직장인, 위즈돔을 운영하고 있는 매니저들이 참석했다. 만남은 부산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담다’라는 곳에서 치킨과 음료 등을 먹으며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친 뒤, 부산 사람도서관을 접하게 된 계기와 현재 자신의 고민, 인생을 살면서 겪었던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며 함께 2시간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즈돔의 만남은 평범하고, 편안하고, 유익하게 보였다.
다문화 가정을 위한 사회적 기업을 준비 중인 50대 주부 김모 씨는 부산 사람도서관을 통한 만남이 처음이었는데 투자한 시간과 비용에 비해 만남의 가치가 기대 이상이었다며 만족을 표했다. 김 씨는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모임에 나온 것도 처음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뜻 깊고 값진 시간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이렇게 편하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놀라웠다”고 말했다.
만남에 참석한 전북 사람도서관 총괄매니저 오윤덕 씨는 참가자들이 의미 있고 즐거웠다는 말을 할 때마다 뿌듯하고 보람을 느낀다. 오 씨는 “앞으로 많은 분들이 사람도서관을 통해 더 많은 만남과 지혜, 친구를 얻길 바란다. 사람 간의 연결을 통해 사람책과 참가자 모두 함께 성장해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 사람도서관를 운영 중인 정지나 부산 총괄매니저는 위즈돔을 통해서 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이야기, 지혜라는 훌륭한 무형 자원을 함께 나누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정 씨는 “꼭 누군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만 사람책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 누구나 서로에게 좋은 사람책이 될 수 있다. 앞으로도 사람책이 더욱 늘어나 부산시민 모두가 사람책이 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사람도서관은 이 시대 사람 냄새가 나는 보기 드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