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그리고 영화 <암살>

2015-08-24     편집인 강성보

며칠 전 신문 사회면 하단에 실린 기사 한 꼭지를 읽다가 폐부에 가시가 박힌 듯 통증을 느꼈다. 독립운동가 서왈보(徐曰甫)의 아들이 1953년 당시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보낸 도움 요청 편지가 경매시장에 나왔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기사에 따르면, 서왈보는 일제 초기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 단원으로, 항공을 통해 항일전쟁을 벌인 인물이라고 한다. 1886년 함남 원산 생으로, 1926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2남1녀 자식 중 한 명인 서진동(徐振東)이 자신의 선친과 형님, 아우 하던 신 의장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는 광복후 중국 충칭(重慶)에서 귀국한 뒤 해방공간,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불구가 되어 당시 부산의 장애인 수용시설 ‘신애원’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국한문 혼용으로 쓰인 편지를 보니 상당한 교양인인 듯 했다. 그럼에도 그 내용은 모든 자존심을내던진, 거의 구걸에 가까운 호소였다.

“사는게 너무 어려워 마음을 다잡고 도장파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하지만 돈 한푼 없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1만원을 주시옵기를 피눈물로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편지에 신익희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기사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신문은 김영삼 정부의 국가보훈처가 1990년 뒤늦게 서왈보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하고 유족을 찾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광복 70년. 올해도 독립유공자 후손의 곤궁한 삶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다. 독립운동가 유가족에 대한 샘플 조사결과 10명 중 7명이 최저생계비 수준의 소득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는 통계도 나와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더니 사실인 듯 하다. 서왈보의 아들 서진동의 행적도 나라가 여태 추적을 못하고 있다고 하니, 아마 부산 난민촌 한 귀퉁이에서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통한을 가슴에 품고 비참한 생애를 마쳤을 지도 모른다.

반면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어떤가. 권력자로서, 재벌로서, 저명한 문화인으로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의 맨 마지막 대목에 염석진(이정재 扮)에 대한 반민특위의 재판 에피소드가 나온다. 염석진은 친일파 암살의 임무를 가지고 경성에 파견됐던 여자 저격수 안윤옥(전지현 扮)등을 일제에 팔아먹은 밀정이었지만 해방공간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경무대장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재판에서 교묘한 논리로 무죄를 받고 풀려난 염석진은 자신을 저격하기 위해 나타난 안윤옥이 “왜 그랬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몰랐으니까. 일본이 이렇게 망할 줄 미처 몰랐으니까”라고 말한다. 과거 일본 강점기 일제에 협력했던 일부 문인들이 친일 행적에 대한 사회와 언론의 추궁에 “일본이 패전할 줄 몰랐다”고 말한 것이 떠오른다.

영화 <암살>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 조승우가 분(扮) 한 약산(若山) 김원봉이다. 김구 선생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물로 나온다. 실제 김원봉은 밀양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무장투쟁 만이 나라를 구할수 있다는 신념하에 22세의 나이로 상해임시정부 산하 의열단 단장이 됐다.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임정 군무부장 직 등도 역임했다. 독립군의 무장투쟁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빼면 항일투쟁이 성립도 안될 정도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에 광복후 남한정부에서 외면당했다. 독립유공자 명단에 오르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의 동생 4명은 한국전쟁 당시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참살당하기도 했다.

그 자신도 해방공간에서 노덕술에 의해 화장실에서 용변으로 보던 도중 하의도 채 추스리지 못한채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노덕술은 일제시대 일본 경찰 앞잡이로 조선인들을 무참하게 고문했던 악명 높은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해방이 되자 이승만 정권에서 대한민국의 경찰 고위간부로 변신해 김구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독립운동가를 체포, 고문한 것이다.

김원봉은 이승만 정권에 실망을 하고 북한으로 넘어간다. 평소 아나키스트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던 그는 교조적 공산주의자 김일성에게도 배척당해 고난을 겪다가 1958년 스스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데올로기가 민족의 정기를 뒤헝클어 놓았다. 친일파는 세세손손 잘먹고 잘살고, 독립운동가는 처참한 고통을 겪다가 스러졌으며, 그 후손들 역시 지금도 곤궁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애국인사들을 홀대하는 이런 역사와 전통 아래서 만일 또 한 번 우리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궁지에 몰렸다고 할 때 어느 누구가 목숨을 내던지고 감연히 나설 것인가.

요즘 신보수 등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이승만 재평가 운동이 제기되고 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최근 대놓고 광화문에 이순신 장군과 나란히 이승만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했고, 적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공적이 워낙 크기 때문에 사소한 과오는 넘어 갈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물론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걸출한 영웅이라도 잘못은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이승만의 과오는 묵과할 만한 스캔들 수준의 과오가 아니다.

김구 선생 등 정적을 암살하고,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정치적 반칙을 저질러 민주주의를 훼손했으며, 4.19 혁명 당시 학생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 등은 그렇다 치다. 하지만 친일파 앞잡이를 제대로 처단하지 않고 그들에게 권력과 부를 고스란히 안겨줬다는 점, 민족의 정기를 바로잡지 못한 역사적 과오는 아무리 그 공적이 찬란하더라도 덮어둘 수가 없다.

프랑스 비시 장군은 1차대전 때 어느 군인보다도 더 용맹하게 독일군과 싸워 프랑스 최고의 훈장을 받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2차대전 때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종전후 처형당했다. 비시가 이른바 ‘비시정권’을 세우고 나치 협력자가 된 것은 자신의 부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고 국민들에게 그나마 안전한 삶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프랑스 법정은 그런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족을 배신한 것은 어떤 이유도 들이 댈수 없는 범죄라는 게 판결문 요지였다. 그리고 비시 역시 당시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잘못임을 인정하고 흔쾌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는 그를 처형함으로써 사회의 정의와 민족의 정기를 곧추 세웠다. 그런데 이승만은 오로지 개인적인 안온한 삶을 추구하며 일제에 적극 협조하고, 같은 동포를 괴롭힌 노덕술 같은 친일 인사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에 따라 사회정의는 무너지고 민족의 정기는 시궁창에 처박혔다.

만일 이승만 동상이 광화문에 세워진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바쳐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부림 쳤던 독립투사들은 지하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아마 통한의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영화 <암살>의 여자 주인공 전지현은 “조국을 위해 이름 없이 희생한 독립 운동가 여러분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손편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하물며 나라의 지도급 인사라는 사람들이 애국자들의 후손을 사회 밑바닥에 방치한 채 친일과 매국의 역사를 호도하려 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이승만 동상 추진 운동은 결코 사회적 동의를 얻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구태의연한 말이지만, 잊어버려선 안 되는 애국자를 망각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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