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고용 약자들, 언어폭력에 ‘속수무책’
당해도 고발하기 힘들고, 적절한 보호 법규 없다
“야, 이 xx 새끼야, 이렇게밖에 못하냐?” 부산에 있는 한 조선 기자재 납품 업체 신입사원 이모(29, 부산시 사하구) 씨는 직장 상사로부터 업무에 대해 이런 욕을 들었다. 여자인 이 씨는 자신을 향한 인격 모욕적인 이 욕에 분통이 터졌지만 연신 죄송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로 돌아온 이 씨는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일을 하려고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008명을 상대로 조사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직장인 68%가 직장 상사 등으로부터 폭언을 들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대답했다. 회사 내 수직적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언어폭력으로 국내의 많은 직장인들이 정신적 피해를 보고 있다. 하지만 취업난 속에 얻은 직장을 잃을까 피해자들은 문제를 해결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 이 씨는 상사의 폭언에 상처를 받고 혼자 속을 앓았다. 동료들과 이런 문제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잘못된 문화를 바로 잡자는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정작 나서는 사람들은 없었다. 자신 또한 취업난 속에 힘들게 구한 직장이라 선뜻 총대를 멜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서 사장에게 상사의 불합리한 잘못에 대해 건의했다. 그러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회사를 그만뒀다. 그녀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죠”라고 말했다.
직장인 성모(29, 부산 중구) 씨도 상사로부터 ‘xx 놈, xx 새끼’ 소리를 듣는 것이 낯설지 않다. 특히 상사가 개인적으로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거나, 하는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면, 성 씨는 평소보다 심한 욕설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평소 상사가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더욱 난폭해지기 때문이다.
성 씨는 자신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를 회사에 건의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참는데, 본인만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포기했다. 노동청에 정식으로 신고하고 도망치듯 이직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결국 같은 업종의 회사로 이직할 때, ‘별난 사람’이란 이름표가 따라붙을 걱정에 그마저도 포기했다.
회사 내 언어폭력의 형태는 호칭에서도 나타난다. 직장인 이모(26, 부산 사하구) 씨가 회사에서 불리는 호칭은 ‘야’다. 그녀는 엄연히 이름과 직급이 있는데도, ‘야’라고 불릴 때면, 자신이 회사에서 그렇게 작고 하찮은 존재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야’라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지만, 또 다른 부하를 부르는 소리였음을 알고 허탕을 치는 일도 많다.
나이가 어린 상사가 나이 많은 직원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직장인 배모(26, 부산 사하구) 씨는 상사가 다른 직원에게 욕설 퍼붓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여러 사정으로 생산 라인에서 회사가 계획한 생산량을 맞추지 못할 때면, 현장 관계자가 사무실로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 많은 해당 직원들을 불러 욕설을 퍼붓는다. 배 씨는 “젊은 상사한테 한 집안의 가장인 나이 많은 직장 동료가 폭언을 듣는 것을 보니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회사의 관리직 상사들도 나름대로 거친 언어를 사용할 이유가 있다고 항변한다. 경남 거제도의 한 조선소 현장에서 근무하는 최모(28. 경남 함안) 씨는 위험한 현장에서 화를 내고 욕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도 처음에는 언어폭력을 하는 상사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됐지만, 자신이 현장을 책임지는 위치가 되니 그런 언어폭력이 이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사소한 것 하나가 위험한 상황으로 직결될 수 있는 곳이 현장이기 때문에 진심은 그렇지 않아도 소리치고 욕해서 긴장감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도 많습니다”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통신사 노조 간부 김모(49) 씨는 최근 언어폭력으로 노조에 접수된 사건은 없다고 했다. 김 씨는 회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합리한 상황들에 대한 처벌, 대처방안 등 규칙들이 체계화되어 있는 회사에서는 회사 내 언어폭력 등 갑의 횡포가 일어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래서 언어폭력은 노조가 없는 작은 영업장이나 상대적 고용 약자들에게서 더 빈번히 일어날 개연성이 높다. 부산 중구 남포동의 한 보세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손모(26, 부산 다대포) 씨는 어느 날 업무를 보고 있는데 가게로 들어온 중년의 부부 손님을 맞게 됐다. 손 씨는 옷이 쉽게 망가질 수 있는 보세의 특성상 ‘결제 후 옷 착용’이라는 규칙을 그 부부 손님에게 설명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옷을 입었다가 벗기를 반복했다. 손 씨가 규칙을 한 번 더 말하려는 순간, 그 손님은 “알았다고, 문디 가시나야. 똑같은 말을 몇 번 하노? 알았다고 한다이가!”라며 손 씨에 면박을 줬다. 손 씨는 “열악한 조건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것도 서러운데,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언어폭력에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같이 고용 약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작년 동아일보가 외국인 근로자 178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응답자의 62.4%가 언어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사장에게 하고 싶은 말 없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외국인 노동자가 “사장님, 욕 좀 하지 마세요”라고 한 말은 한 동안 우리 사회의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근로기준법 제8조에 의하면, 어떠한 이유로도 근로자에게 폭행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5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근로자가 직장 내 폭행을 당했다면, 가까운 지방노동 관서에 진정서, 또는 고소장을 제출하면, 적절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에는 포괄적인 근로자 폭행을 금지하고 있을 뿐, 별도로 언어폭력을 규제하는 조항은 없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언어폭력은 폭행 여부를 별도로 확인하기 어려워 피해 입증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는 “자체적으로 세미나도 열고 있고, 올바른 사내 문화 정착을 위해 각종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