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5제(題), 다섯 번째
그동안 황령산 칼럼에 필자는 쓰레기와 관련된 글을 써왔다. 그 맥락을 이어서 2015년 1월 1일부터 매일 쓰레기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올해 12월 31일까지 쓰려고 한다. 그 중에서 우리 주변의 것과 관련된 최근의 12개 꼭지를 황령산 칼럼으로 갈음한다.
262. 2015년 9월 19일 土. 부산. 맑고 이쁜 가을이다.
청소력을 몸소 실천하는 훌륭한 어른
부산의 중구는 서울의 명동과 같은 남포동 · 광복동, 남대문시장과 같은 국제시장 · 부평깡통시장, 남산공원과 같은 용두산공원이 있는 곳이다. 부산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곳이다. 중구의 진정한 매력은 다운타운에 있는 그 모든 지역을 아우르며 바라볼 수 있는 윗동네에 있다. 산복도로 마을이다. 오늘 그 곳에서 인문학 콘서트가 있었다. 산동네에서 버스를 내려 조금 더 올라가는데 동네가 깨끗했다. 내가 지금 사는 동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깨끗했다. 어느 동네에서나 흔히 보는 쓰레기 무단투기도 없었고, 쓰레기통도 없이 집앞에 마구 내놓는 쓰레기도 없었다. 쓸어 담기지도 못한 채 구천을 맴도는 쓰레기도 없었다. 도대체 딴 나라에 온 기분이었다. 계단으로 이어진 골목골목마다 반짝반짝 맑은 정기가 넘치는 것같았다. 그 이야기를 콘서트에서 했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깨끗하게 된 것은 홍순업 어르신 덕분이란다. 이 마을에서 40년을 사셨다는 어르신께서 3년 전부터 청소를 매일 하시기에 그렇게 깨끗해졌단다.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쓰레기를 줍고 치우신단다. 어르신을 소개한 콘서트장 원장님께서 ‘청소력’이라는 말을 꺼냈다. 청소력! 지금까지 쓰레기에 관한 글을 쓰면서 처음 듣는 낱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뜻을 금방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었다. 누군가 청소를 지속적으로 하면 이로 인한 깨끗한 기운이 점점 퍼져 마을 전체가 깨끗해진다는 뜻이다. 마침 이 어르신이 콘서트장에 계셨다. 콘서트 후 잠깐 대화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 동네가 매우 지저분했단다. 그런데 1년 동안 매일 청소를 하니 드디어 달라지더란다. 주민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게 되더란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감동스러웠다. 훌륭한 어르신이다. 대통령 표창을 받을 만하다. 대개 젊은이들이 먹여 살려야 할 고령화 사회를 걱정하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동네 큰 어르신께서 젊은이들을 깨우치는 고령화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다. 나도 커서 그런 어른이 되고싶다.
263. 2015년 9월 20일 日. 부산. 고운 가을날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내 청소활동
여기는 내 청소 관할 구역이다. 그냥 내가 관할하겠다며 엿장수 맘대로 지정한 곳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쓰레기를 치운다. 여기와 50미터 아래 후미진 곳 일대가 내가 청소하는 곳이다. 인적이 드문 일요일에 한다. 오늘 일요일이라 100리터 짜리 쓰레기 봉투와 집게를 들고 쓰레기를 치웠다. 여기는 일명 고양이 마을이다. 이 곳을 지나다니는 인정많은 학생들이 고양이집도 만들어 주고 사료도 준다. 그러니 여기 고양이들은 자신들이 도도한 고양이인줄 까먹고 귀여운 강아지인줄 안다. 학생들이 이쁘다고 쓰다듬어주면 가만히 있는다. 어떤 고양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오며 배를 까고 눕기도 한다. 친근감을 나타내는 몸짓이다. 그런데 나한테는 친근감을 보이기는커녕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 내가 여기 쓰레기를 치우러 내려가니 이상한 아저씨가 자기네 동네에 내려 왔다며 고양이 눈으로 째려본다. 더 다가가니 피해 도망간다. 고양이 마을은 쓰레기 마을이기도 하다. 이 곳을 지나다니다가 쓰레기를 던져 버리기 딱 좋은 곳이다. 특히 저 나무 아래 "여기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라고 적힌 팻말이 달린 곳은 오히려 더욱 그렇다. 저 나무 뒤 숲으로 버리면 쓰레기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 곳을 지나다니는 대다수가 아니라 극소수가 그리 해도 한 달이 지나면 쓰레기가 널린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이 곳의 쓰레기들에 관해 관심두거나 신경쓰지 않는다. 때문에 쓸어져 담기지도 못하고 구천을 맴도는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다. 결국 내가 청소하는 덕분에 비로소 쓸어져 담기는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 봉투 안에서 황천길로 갈 준비를 마쳤다. 내가 여기를 한 달에 겨우 한 번 치운다고 이 곳의 쓰레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제 만난 산복도로 마을 어르신은 매일 마을 청소를 하여 끝내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였다. 나는 그 분의 손끝만큼도 못따라간다. 청소한다고 조금 흉내만 내는 정도다. 그러니 오늘의 청소활동은 문제해결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나름 곱씹어 반추하게 된다.
264. 2015년 9월 21일 月. 부산. 나한텐 아주 조금 덥다.
날씨관측보다 더 중요할 쓰레기관측
예전에 서울 관악산 정상에서 저렇게 골프공 비슷한 것이 올라간 건물을 본 적이 있다. 그 땐 그게 뭔가 했는데 부산 구덕산에서 오고서야 저렇게 생긴 건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기상청에서 운영하는 기상 레이다 관측소였다. 기상청(氣象廳)이라고 하면 날씨 예보를 하는 곳으로 금방 알지만 똑같은 한자를 써도 기상(氣象)이라고 하면 생소하게 들린다. 씩씩한 마음이 기상(氣像)이라면 날씨는 기상(氣象)이다. 대기 중에 일어나는 바람, 구름, 비, 눈, 더위, 추위를 이른다. 저 동그란 물체 안에 레이더가 있다. 전자기계인 레이더를 외부 자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저 골프공 모양 물체다. 레이더에서 쏜 전파를 투과하는 소재로 만들어졌기에 둥그렇게 덮어 씌워도 괜찮단다. 저 안의 레이다는 전파를 발사하여 목표물인 구름 등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신호를 수신한다. 그래서 비를 내리는 구름의 위치와 비가 내릴 강도 등을 관측한다. 관악산, 구덕산 등을 포함해 전국 10여 곳의 관측소들로부터 수신된 신호들은 기상청 본부로 보내어져 종합적으로 분석된다. 전국 날씨는 이를 바탕으로 예측된다. 간혹 일기예보가 틀릴 때도 있으나 대개 잘 맞는다. 그 일기예보는 인간생활에 유용하다. 오죽하면 ‘날씨 마케팅’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러한 필요에 따라 기상관측 및 일기예보 기술은 크게 발전하였고 더욱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쓰레기 관측 및 예보 기술은 미미하다. 쓰레기는 귀찮은 부산물이기에 아직 자세하게 연구할 필요성이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육해공에 마구 버린 쓰레기들은 육지, 해양, 대기에 널리 퍼지며 일시적 날씨(weather)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지속적 기후(climate)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마도 저 레이다 장비 안에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탄소배출물 등 대기 중의 쓰레기를 관측하는 기능도 작동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기상공학이 발전하는 만큼 쓰레기공학(engineering on rubbish)이 발전하여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면 좋겠지만 쓰레기는 그냥 쓰레기로 취급되고 있다.
265. 2015년 9월 22일 火. 부산. 아직 난 좀 덥다.
마구 버려지는 쓰레기의 원인제공자
저렇게 길거리에 쓰레기가 지저분하게 버려진 이유 들 중 가장 아닌 것은 무엇일까? ①사람들이 문이 닫힌 가게 앞으로 버리므로, ②행인들이 원래 쓰레기를 아무데나 잘 버려서, ③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릴 데가 없어서, ④저 가게 주인이 가게 앞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므로, ⑤아까 전 여기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기에. 가장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⑤번이다. 여기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지 모이는 곳은 아니다. ①②③④번은 다 나름대로 이유가 된다. 문이 닫힌 저 가게는 장사를 안하는 중이라 사람들이 만만한 저 곳에 쓰레기를 버릴 수 있다. 그런데 함부로 버리고 싶지 않아도 버릴 데가 없어서 저렇게 버릴 수 있다. 만일 자기 가게 앞 쓰레기 자기가 치우기가 의무적으로 지켜진다면 가게 주인은 비록 지금 장사를 안하더라도 쓰레기를 치워야 하기에 쓰레기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①②③④번이 다 이유가 되는 바를 밝혔지만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③번이라고 생각한다. 이 동네 여기저기를 다 뒤집고 보아도 쓰레기를 버릴 데가 없다. 즉 쓰레기통이 하나도 없다.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고 싶지 않지만 쓰레기통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여기에 버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쓰레기통이 없을까? 쓰레기통이 있으면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버려야 할 쓰레기를 길거리 쓰레기통에 버리기 때문이다. 쓰레기통이 무단투기 장소가 된다. 결국 쓰레기통이 없는 것과 쓰레기 종량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시한 쓰레기 종량제가 길거리에 쓰레기통을 없애고 결국 저렇게 쓰레기를 버릴 데가 없어서 길거리에 쓰레기가 마구 버려지고 있다. 그래도 행정관청에서는 쓰레기통을 없애서 매립지나 소각장으로 가는 쓰레기가 줄어들었다고 실적을 따지고 있을까? 그리고 저렇게 길거리가 쓰레기로 지저분해지는 것은 시민의식의 문제로만 치부하지 않을까? 바른 행정과 바른 시민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시민의식 계몽에 앞서 공무원사고 전환이 필요하다.
266. 2015년 9월 23일 水. 부산.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내가 만들고 싶은 전위적 미술작품
아마도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다. 행인들로 북적이는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어떤 사람이 밥상을 펴고 자기집 안방에서 밥을 먹듯이 반찬을 차려 놓고 태연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웬 미친 사람이려니 했지만 알고보니 그게 미술작품이었다. 전위예술가들이 하는 행위미술(performance art)이었다. 집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밥을 길거리에서 먹을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창작의도였다. 이렇게 위아래를 뒤엎듯 상식을 뒤엎는 전위(轉位)적 예술이 전위(前衛)예술이다. 앞서 나아간다는 뜻의 프랑스어 아방가르드(avant-garde)를 번역한 말이다. 30여 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을 아직도 내가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 걸 보면 그 전위적 행위미술은 나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미술관에서 또 이상한 미술작품을 보게 되었다. 설치미술이라고 한다. 이제 미술은 평면 종이에 그림 그리는 차원에서 탈출하여 행위하며 설치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 미술작품은 휴지를 써서 작품을 만들었다. 미술 용어를 쓴다면 일상의 휴지를 ‘오브제’로 하여 뭔가 낯설은 표현을 한 것이다. 이 작품을 만든 작가의 창작의도 설명문에 의하면, 어느 날 한참을 울고 난 다음 날 눈물을 닦았던 휴지를 보았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단다. 그래서 휴지가 그녀 미술작업의 오브제가 되며 이를 통해 자신이 느꼈던 것을 이미지화시킨 작품이란다. 역시 예술은 주관적인 작가의 세계를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순수예술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예술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부합되어야 하는 목적성 예술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술가가 된다면 그녀처럼 순수예술가는 못될 거같다. 내가 만일 휴지를 써서 설치미술을 만든다면 생태주의 삶을 표현하는 쪽으로 창작할 것같다. 휴지(休紙)를 너무 많이 버려 쓰레기가 된 휴지가 생명체의 숨을 압박하여 질식시키는 쪽으로 표현하고 싶다. 작품을 통해 우리 일상적 삶에 전환적 경종을 주는 전위(轉位)적이며 전위(前衛)적인 생태주의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다.
267. 2015년 9월 24일 木. 부산. 비온 뒤 흐리다.
그나마 몇개 없는 귀하신 쓰레기통
대연동 버스 정류장에 있는 이 쓰레기통을 눈여겨 두었다. 부산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다 길거리 쓰레기통이 몇 개나 있는지 세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굳이 셀 필요가 없었다. 8km 남짓 되는 거리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쓰레기통은 부산시 전역에서 드문 귀한 길거리 쓰레기통이다. 가만히 보면 쓰레기통 모양이 매우 특이하다. 내가 만일 이 근처 황령산에 들어갔다가 비닐 봉투에 쓰레기를 잔뜩 주워 담아서 내려오면 이 쓰레기통에 넣어 버릴 수 없게 되어 있는 구조다. 쓰레기통 옆의 저 파란 쓰레기 봉투는 무단투기된 것이 아니라 환경미화원이 길거리 쓰레기를 청소하여 담아 놓은 공공쓰레기 봉투다. 저 쓰레기통 투입구는 아주 작다. 한 마디로 되게 인색하게 생겼다. 옆에 난 쓰레기 투입구는 작은 쓰레기만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어른 주먹 하나 겨우 들어갈 크기다. 그런데 쓰레기통에 열쇠 구멍이 달렸다. 참 희한한 일이다. 위에는 아예 투입구가 없다. 그냥 담배꽁초나 버리게 되어 있다. 세상 여러 나라를 다니며 쓰레기통을 눈여겨 보았지만 저렇게 인색한 쓰레기통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쓰레기통은 평범한 쓰레기통이 아니라 특수제작된 쓰레기통이다. 무엇을 위한 특수제작인가? 쓰레기 무단투기를 못하도록 하는 특수 쓰레기통이다. 쓰레기 종량제를 지키지 않는 주민이 여기에 무단투기를 못하게 하려는 조치다. 나름 현명하고 타당한 논리적 이유를 들어 저런 모양의 쓰레기통을 결재했을 것이다. 정부의 청소행정 기본원칙은 길거리 쓰레기통을 놓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가 근처라 유동인구가 많아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오기에 할 수 없이 최근에 쓰레기통을 몇 개 더 놓은 것같다. 그래도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가 아주 많지 않은 것은 그나마 우리 시민들의 의식이 높기 때문이다. 이제 공무원의 의식이 높아지기보다 바뀔 차례다. 통계숫자 상으로 쓰레기량을 줄일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길거리 쓰레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원점에서 재고되어야 할 때다.
268. 2015년 9월 25일 金. 부산→서울. 조금 맑아졌다.
건설력보다 중요해질 쓰레기 해결력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된 것은 건설력이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무선 인터넷과 전화가 되도록 하는 등의 기술력도 대단하지만 그런 것들은 길어야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피라미드 등 불가사의한 건축물을 짓는 것은 수천년 전부터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인간의 건설력은 이제 불가능한 건설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막강해졌다. 이미 100여 년 전부터 100층 높이의 건물을 짓더니만 이제는 지구 성층권 이상의 무중력 상태 우주까지 올라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도 지을 수 있단다. 첨단 건설 신소재 덕분이란다. 그렇다면 로켓이 아니라 엘리베이터로 우주여행을 하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경이롭지만 나는 우리 주변에서 늘 마주치는 재개발 고층 아파트 건설 과정이 너무도 신기하다. 복잡한 민원문제 때문에 기존 집들을 허물 때까지 오래 걸리지만 일단 공사에 들어가면 일사천리다. 그 과정을 지켜 보면 경이롭다. 땅파서 기초놓기→건물 층수 올리기→인테리어 공사하기 등 대개 세 단계로 진행되는 건설은 아무리 높은 건물이라도 거의 3년 안에 완성된다. 큰 건물이 아니라 작은 건물을 짓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세 단계 공사가 대개 1/3씩 진행되는 건설공정은 비슷하다. 큰 공사나 작은 공사나 같은 점은 그 공사를 일일이 수고하는 건설 노동자들이다. 아무리 첨단기술의 건설공법을 사용하더라도 건설은 인간의 손이 직접 닿아야 이루어진다. 자동화 불가능 부분이 더 많기에 건설은 가장 노동집약적 공사다. 잠깐 담배 피우며 쉬고 있는 저 허름한 노동자의 작은 손끝에서 웅장하며 화려한 건물들이 들어선다. 그걸 이루어 가는 남자들의 힘은 대단하다. 그런 능력이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데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크게 돈이 안되기에 능력발휘가 적극 안될 뿐이다. 하지만 해결못하면 살 수 없기에 인간의 능력이 우주여행 엘리베이터를 짓기보다 쓰레기 문제를 해결해야만 할 때가 벌써 오고 있다.
269. 2015년 9월 26일 土. 서울. 딱 좋은 날씨다.
고상한 문화와 관계없는 고가격 식당
인류 역사 이래 가장 훌륭한 문화를 가졌던 종족은 인디언으로 잘못 불리게 된 북미대륙 원주민이 아닐까? 정말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책이 이미 있었다. 2013년에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인디언 영혼의 노래>는 ‘시이튼 동물기’로 유명한 시튼(Ernest Thompson Seton, 1860~1946)의 저작이다. 시튼은 북미 원주민이야말로 정신적으로 성숙된 문화를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중남미 원주민들이 이룬 마야, 잉카, 아즈텍처럼 찬란한 문명은 아니지만 자기절제와 타인배려를 바탕으로 고상한 문화를 이루며 살았다. 산 사람의 염통을 꺼내 높은 석조물 제단에 바치는 끔찍한 제사 의식을 치르지도 않았다. 다만 숭고한 신 앞에 자기를 온전히 맡기며 수련하는 의식을 치렀다. 간혹 종족들 간 분쟁이 있었어도 학살하며 강탈하는 짓은 서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민주적인 평화사회를 이루며 살았다. 2300여 년 전 묵자(墨子)가 주장했던 겸애를 실현하며 살았다. 그들은 영국인들이 배를 타고 건너왔을 때 먹을 것을 주며 정을 베풀었다. 하지만 백인들은 그들을 학살하고 땅을 강탈하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내몰았다. 더군다나 인디언에 대한 이미지를 조작했다. 미국 서부영화에서 나쁜 나라 인디언이 좋은 나라 백인을 괴롭히는 이유다. 캐빈 코스트너가 감독하고 주연한 <늑대와 함께 춤을>은 백인중심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반성과 함께 북미 원주민에 관한 헌사다. 1990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 만했다. 인디언 캠프를 모방한 저 캠핑장은 야외 식당이다. 특1급 6성급 호텔에서 운영하니 1인당 가격이 15만원에서 20만 원이다. 소주 한 병도 1만 2,000원. 나같은 사람은 도저히 가까이 하기 힘든 가격이다. 아무튼 저렇게 인디언 풍속을 본따 캠핑장을 만들었다면 비싼 고가격에 걸맞게 북미 원주민의 고상한 정신문화도 접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쓰레기를 덜 버리는 생태적 삶도 체험하면서… 물론 그렇게 절대 못하겠지만 허상적 이미지로만 보이는 저 인디언 도구들을 보니 씁쓸하다.
270. 2015년 9월 27일 日. 서울→수지→서울. 추석 날씨답다.
양기를 주는 해만큼 음기를 주는 달
달력은 우리말 달(moon)과 한자 력(曆)이 합쳐진 낱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달력은 달을 기준으로 하는 음력이 아니라 태양을 기준으로 하는 양력을 쓰니 엄밀히 따지면 달력이 아니다. 양력 역법(曆法) 역사(歷史)에 미친 인간들의 정치적 내막을 알면 웃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달의 지구 공전 주기인 29.5일에 맞춘 음력에는 권력자의 탐욕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다만 양력 1년 365일과 음력 12달 354일의 주기를 맞추기 위해 음력에서는 19년에 7번씩, 그러니까 약 3년에 한 번씩 윤달을 두어 1년 13달이 되도록 했다. 아울러 태양의 공전주기에 맞추어 1년 365일을 24절기로 구분했다. 양력에서 1년을 12달로 나눈 것은 달의 지구 공전 주기인 29.5일에 꿰맞추기 위한 후속 조치였다. 지금의 달력은 양력 위주지만 달이 들어간 이름답게 달의 움직임에 따른 것이다. 음력에서 매달 가운데 15일에 뜨는 달 중에서 8월 15일 달은 지구와의 근접거리가 가장 가까워 가장 크게 뜨기에 한(big) 가위(middle) 보름달이다. 이 아름다운 가운데 날(仲秋佳節)을 기리는 추석은 양력 11월 4째주 목요일인 미국인의 추수감사절처럼 신께 감사드리는 날이 아니라 다만 1년 중 가장 밝은 달 아래에서 조상께 감사드리는 날이다. 아마도 45억년 전 지구와 행성이 충돌했을 때 나온 파편들의 응집으로 탄생했을 저 달의 은밀한 음기 덕분에 지구 생태계는 생명을 키울 수 있었다. 태초에 어떤 엄청난 사건으로 23.5도 기울어진 지구 자전축이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 주는 것은 저 달이 지구를 잡아당기는 인력(引力) 덕분이다. 이로 인해 사시사철과 밀물썰물이 생긴다. 하지만 저 달은 늘 똑같지 않다. 매년 3.4cm씩 멀어지고 있다. 달과의 이별 시간이 서서히 오는 중이다. 하루도 바삐 사는 우리 인간이 그 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달에 사는 계수나무와 토끼 한 마리를 상상하며 사는 게 재미 있겠다. 토끼가 우리를 보기에 푸른 별 지구가 육해공 쓰레기로 뒤덮혀 누런 별 지구가 되지 않도록 달님께 소원을 빌어야겠다.
271. 2015년 9월 28일 월. 서울. 전형적 가을이다.
저 앞에서 아버지께 드린 굳은 약속
아버지와 함께 망우리 공동묘지에 갔다. 아버지가 날 데리고 간 것일까?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간 것일까? 전자이고 싶다. 추석과 한식, 일 년에 두 번 간다. 가서 산소를 관리하시는 분께 약간의 수고비도 드린다. 아버지의 요즘 고민 중 하나는 당신 살아 생전에 산소를 이장하는 문제란다. 할아버지는 매장, 할머니는 화장해서 함께 묻히셨는데, 저 산소 밑에 남아 있을 할아버지 유골을 다시 화장하는 것이 풍수지리적으로 어떨지 모르시겠단다. 만일 아무 상관없다면 내년에라도 수목장으로 이장하실 생각이 있으시단다. 아버지 말씀을 듣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러지 마시라고 했다. 이 산소가 얼마나 귀한데 일부러 복잡하게 옮기려고 하시냐고 했다. 나중에 정부에서 이 관영 공동묘지를 정리하기 전까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지금 이 좋은 산소자리를 얻을래야 얻을 수도 없는데 일부러 나갈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일 년에 두 번 산소오는 일이 기분좋다고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약속을 드렸다. 아버지가 산소에 못오시게 되더라도 제가 일년에 두 번 꼭 오겠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아버지는 나의 이 깜짝 약속을 듣고 안심하시며 흐뭇해 하셨다. 그리고 산소를 향해 말씀하셨다. “아버지, 어머니! 저 손자 놈이 제가 없더라도 앞으로 오겠답니다. 염려 마시고 편안하게 쉬세요!” 나도 얼굴도 못뵌 두 분께 말씀드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가 나중에 모실 테니 걱정마시고 편안하세요!” 오늘 아버지의 큰 고민을 해결해 드린 것같아 기분좋다. 정말로 나는 산소 앞에서 아버지께 드린 약속대로 실천할 것이다. 나는 산소가 좋다. 무섭기보다 저 동그란 모양이 정겹게 느껴진다. 산소(山所)는 죽은 자의 육신이 흩어지는(散) 곳(所)이니 산소(散所)다. 그런데 흩어지지도 못하여 구천을 맴도는 쓰레기들이 산소 주변에도 많다. 이들을 수습하면서 내려오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칭찬하시는 것같다. “귀여운 손자구나. 덕분에 우리 쉬는 자리 주변이 깨끗해졌구나. 착하다, 아가!”
272. 2015년 9월 29일 火. 서울→부산. 아직은 시원한 게 좋다.
버려진 음식을 보며 가지는 잡념들
추석 다음 날의 잔인한 풍경이다.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하게 저 전(煎)은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어느 여인네가 힘들게 부친 음식일 게다.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나서 맛있게 먹고 남은 음식일 게다. 어느 어머니가 혼자서 사느라 힘들 자식을 위해 정성껏 싸준 음식일 게다. 그리고 이 동네 어느 젊은이의 방으로 들어간 음식일 게다. 그런데 오자마자 조금 쉰 듯하니까 그냥 저렇게 버려졌을 것이다. 귀한 음식이 버려진 모습을 보니 기분이 안좋다. 사진을 찍으려고 저 음식 가까이 다가가니 그리 쉰 것같지는 않다. 아직도 동그랑땡과 고기산적 특유의 씨즐감이 살아 있다. 맛있게 보인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으면 저렇게 버리지 않아도 될 음식이었다. 올 때 얼려서 온다든지, 그리고 오자마자 냉장고에 넣는다는지 했다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렇게 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음식을 싸가지고 왔다. 추석날 차례를 지내고 닭고기, 북어조림, 나물이 많이 남아 어머니가 싸주셔서 오기 전 날부터 냉장고에 넣어 얼렸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 집어 넣었다. 덕분에 어머니의 손맛을 느끼며 며칠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지며 먹을 것이다. 그 음식을 내가 먹기 위해서는 어느 생명체의 희생이 있었다. 어느 닭과 어느 명태가 자신의 몸을 주었고, 어느 고사리와 어느 도라지가 자신의 몸을 주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두 살아 숨쉬는 생명이었다. 그 생명체들이 자신의 몸을 주어(供) 내 몸을 기르는(養) 공양(供養)이 있었던 것이다. 절에서 스님들이 “식사하셨습니까?”의 의미로 “공양하셨습니까?”라고 하는데 그 말은 “공양받으셨습니까?”라는 뜻이다. 그런 공양의 깊은 뜻을 안다면 우리는 음식에 관하여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저렇게 무참하게 마구 함부로 버릴 수 없다. 저 음식물 쓰레기를 보니 경제적으로 아까운 것이 아니라 생태적으로 아프다. 이 땅의 황무함이 느껴진다. 기껏 버려진 전 몇 개 나부래기 가지고 너무 괜한 요란스런 생각일까?
273. 2015년 9월 30일 水. 부산. 햇볕이 없이 흐리다.
쉽게 버려지도록 하는 제품판매 정책
예전에 프린터 토너가 떨어져서 토너 카트리지를 매장에 가지고 가서 토너 가루를 채워 쓴 적이 있었다. 프린터를 오래 잘 썼는데 또 토너가 떨어졌다. 그래서 다시 채우러 갔더니 이제 그리 못한다고 했다. 예전에는 카트리지에 토너 가루를 채워 쓸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정품 토너에 칩이 붙어서 나오기 때문이란다. 결국 아무 고장도 없는 정상의 카트리지였지만 토너 가루를 채울 수 없게 된 불구의 카트리지를 버리고 칩이 부착된 토너를 살 수밖에 없었다. 그 칩의 용도는 토너를 프린터에 끼웠을 때 인쇄 매수를 체크하여 어느 장 수 이상 인쇄하면 인쇄가 안되도록 제한하는 것이다. 가령 1000장이 최대 프린트 매수로 제한되어 있다면 글자나 그림이 적어 토너 가루가 그리 많이 들지 않는 1000장을 인쇄했었기에 토너에 가루가 많이 남아 있어도 인쇄가 안된다. 이러한 토너 판매정책은 전자제품 회사가 프린터보다 토너를 판매하기 위해서다. 기계인 프린트를 싸게, 소모품인 토너를 비싸게 팔면 더 많은 판매수익을 올릴 수 있다. 물론 소비자들이 비싼 정품 토너를 안사고 값싼 재생 토너를 사기에 짜낸 고육지책이겠지만 소비자와 싸우듯 대결하려는 모양새다. 시중에는 이를 피해 가려는 무한 칩 등의 비정상 편법들이 등장한다. 기업의 편법에 소비자들도 편법으로 맞서는 것이다. 지금 길바닥에 함부로 버려진 저 프린터는 고장나서 버려진 것같지는 않다. 프린터 가격은 토너나 잉크 가격보다 상대적으로 싸기에 소모품처럼 버려도 괜챦다고 여기기에 쉽게 버리는 것이다. 멀쩡한 카트리지를 버리도록 하고 멀쩡한 프린터도 버리도록 하는 판매정책을 시행하는 곳은 일년에 수십조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는 대기업들이다. 수익을 위해 저렇게 쓰레기를 촉진하는 제품판매를 하면서 고객 감동경영(CSM),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공유경제 창출(CSV), 기업의 지속가능한 경영(CSM) 등을 한다고 주장한다. 일년에 한 번 그런 관련 실적 보고서도 자랑스럽게 낸다. 도대체 진정성은 어디에 있을까?
274. 2015년 10월 1일 木. 부산. 비가 많이 내린다.
쓰레기가 가져 올 인간의 길흉화복
그 자리에서 직접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점토로 모양을 빚는 이벤트에 나도 참여를 했다. 지난 봄 4월 8일에 썼던 시를 조금 수정했다. 그림을 못그리기에 궁여지책으로 쓰레기통에서 그림 소재로 쓸 적당한 것들을 끄집어내 저렇게 종이에 붙이고 그 밑에 시를 썼다. 저렇게 걸어놓으니 근사한 작품같다. 제목이 원래는 ‘거지 쓰레기’였는데 이번에는 ‘쓰레기의 애원소리’라고 바꾸었다. 지금 보니 ‘쓰레기들 애원소리’가 더 낫겠다. 시 본문은 제목에 맞게 후반부를 조금 보완했다. “받아 들이니까 바다라 했을까요? 꼬시니까 꽃이고 도니까 돈이고 보니까 봄이고 사니까 사람이겠지요. 쓸어질 것이라 쓰레기일텐데 쓸어지지도 못하고 구천을 맴도는 쓰레기가 애원하는 듯합니다. 부디 저를 거두어 주세요. 사람님!" 정말로 나는 그 애원소리를 듣는다. 특히 산에서 낙엽에 묻혀가는 쓰레기를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깊게 묻힌 쓰레기들은 애원을 넘어 절규하는 듯하다. 그 쓰레기들을 수습하여 내려오면 나는 이런 덕담을 듣는다. “고맙습니다. 사람님! 제가 나중에 복으로 갚을께요!” 말도 안되는 쓸데없는 상상 탓일까? 그까짓 쓰레기에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중요하지도 않은 쓰레기에 괜히 요란을 떠는 짓일까? 하지만 나의 시각이 쓰레기로 향하니 쓰레기 문제는 단순한 쓰레기 문제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총체적, 복합적, 전반적 문제로 여겨진다. 다만 쓰레기이기에 이 시대 우리 세상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할 뿐이다. 관점은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이룬다. 내 주관적 관점을 남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 공감이 가도록 소통할 수는 있다. PR(Public Relations)이 공중과 호의적이며 우호적 관계를 맺는 일이라면 쓰레기와도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인간이 생산하여 인간이 소비한 후 폐기하는 쓰레기와 척(隻)을 짓는다면 흉(凶)하다. 결국 화(禍)가 되고 말 것이다. 쓰레기들의 역습이 시작되면 그 재앙은 걷잡을 수 없다. 그 전에 잘 보살피면 길(吉)하다. 덕(德)을 짓는 일이고 복(福)이 올 것이다.
275. 2015년 10월 2일 金. 부산. 시원하게 맑아졌다.
왼쪽 사진에 담겨진 작가의 마음
중년의 나이가 되어 정신적 허기를 느낄 때 시도하는 전형적 세 가지. 시, 사진, 색소폰이다. 각각 문학, 미술, 음악을 위한 것이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즉 예술하는 인간이기에 문학, 미술, 음악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시, 사진, 색소폰을 시작하게 된다. 시가 소설보다, 사진이 회화보다, 색소폰이 피아노보다는 쉬워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쉬워 보이기에 오히려 훨씬 더 힘들다. 만만하게 시작해서 모방적 흉내는 낼 수 있어도 감동적 예술을 하기는 아주 어렵다. 오늘 사진전에 갔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기간에 배우 조민기가 사진전을 여는 곳이었다. TV에서만 보던 인물을 실제로 만나면 처음 보는데도 잘 아는 사람처럼 친근감이 든다. 드라마에서 꽤 연기를 잘 하는 그를 보기도 했지만 다큐멘타리에서 그를 본 적도 있다. 쿠바를 소개하는 여행 프로그램이었다. 그의 손에 늘 카메라가 들려 있었는데 그 때 찍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수십 점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내 주의를 끈 것은 저 왼쪽 사진이다. 저 오른쪽 사진과 함께 가장 크게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전시작들 중 대표작인 것같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방파제에 앉아 있는 시민들을 저 위의 카리브해가 압도하고 있다. 작가 조민기는 저 멋진 객관적 피사체를 보고 사진으로 찍었을까? 아니면 저 뻔한 일상의 피사체를 보고 가진 주관적 마음을 사진에 담았을까? 전자였다면 그냥 자기만족적 취미에 그치겠지만 후자라면 사진예술을 한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는 후자같다. 바다를 아주 크게, 인간을 아주 작게 나타낸 구도로 보아 그렇다. 뒤늦게 시작했어도 나름 예술적 경지에 오른 사진이다. 과연 어떤 마음을 작가는 담았을까? 내가 작가라면 쓰레기 버리는 인간(Homo rubbish)을 언제라도 덮칠 수 있는 대자연의 바다로 느껴지는 마음을 담을 것같다. 사진 제목이 없던데 나는 ‘위협’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 오늘 그로부터 한 수 배우게 되어 고맙다.
276. 2015년 10월 3일 土. 언양. 좋은 가을날이다.
조용해야 할 산에서 울리는 하이 볼륨
음악은 사람들이 모인 실내 공간이나 사람들이 몰리는 실외 광장 등에서 연주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산에서, 그것도 높은 산 정상 부근에서 음악을 연주하면 어떨까? 색다른 맛이 날 것이다. 이를 노린 것이 바로 저 음악회장이다. 간월재에서 10월의 가을날에 음악회를 여는 것은 대범한 기획이었다. 이제 6회째로 접어든 이 음악회의 이름도 폼난다. 울주 오디세이. 오디세이(Odyssey)는 2700여 년 전 이름만 있을 뿐 정체가 없는 호메로스의 장편 대서사시다. 고대 그리스에서 오디세우스라는 사내가 트로이전쟁에서 승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10년 간에 걸친 모험담이다. 모진 풍파를 다 겪었을 오디세우스가 부르는 오디세이아, 즉 오디세이는 조용히 부를 수 없는 노래다. 볼륨을 높여야 한다. 과연 소리 큰 음악이 조용한 산에서 어울릴까? 또한 울주와 오디세이는 서로 엮이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단지 오디세이라는 근사한 단어를 빌려다 울주 오디세이라 하고 울주군 관할의 신불산과 간월산 사이의 높은 억새 평원인 간월재에서 음악회를 여는 것이다. 그 비주얼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하지만 대형 앰프와 스피커를 동원해야 가능한 음악회를 정숙해야 할 산에서 연다는 것은 파격적이면서도 배역적이다. 순리에 어긋나는 배역(背逆)이다. 산에서 꼭 음악회를 열어야 한다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를 불러 들여야 했다. 그가 작곡한 <4분 33초>처럼 그냥 산에서 잠시 4분 33초 동안 만이라도 인간이 아무 소리내지 않고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명상해야 했다. 명상이란 자기 내면의 생각을 억지로 집중하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소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며 몰입하는 것이다. 나는 저 야외 음악회장의 볼륨에 나 자신을 맡겼다. 산에 올라오는 동안 들었던 쓰레기들의 신음소리와 애원소리를 떠올리면서. 산 정상 부근에서 음악회를 여니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산길에 쓰레기들이 유난히 더 많았다. 그들을 수습하며 내려오니 신원(伸寃)이 풀렸는지 조용해졌지만 또 다시 새로 들릴 것이다.
277. 2015년 10월 4일 日. 부산. 조금은 흐리다.
어지러운 쓰레기도 이용할 권력자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뚱> 책에서는 그를 권력 괴물이라고 했다. 그럴 만도 하다. 인류 역사에 새겨진 수많은 지도자들의 권력의지 순위를 매길 때 그는 압도적 1위에 올라갈 법하다. 1921년 상하이에서 열렸던 중국 공산당 창립 멤버 13인 중 한 명이었던 마오(毛澤東, 1893~1976)는 공산 게릴라전 두목으로 자신의 지도력을 쟁취한다. 미국기자 스노우(Edgar Snow, 1905~1972)는 그 당시의 마오를 취재했다. 그가 쓴 <중국의 붉은 별>에서 마오는 인민의 사랑을 받는 영웅이다. 왼쪽 사진에서처럼 청초했을 때다. 인민을 위해 일한다(爲人民服務)는 사진 밑 친필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결국 기적적으로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다. 하지만 건국 후에 마오는 실책도 아닌 과오를 범한다. 그가 주도한 반우파투쟁(1957~59), 대약진운동(1958~60), 문화대혁명(1966~76)으로 중국은 끔찍한 참상을 겪으며 정신적, 물질적으로 황폐해졌다. 오른쪽 사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지켰던 당시의 노회한 모습이다. 권력 괴물을 너머 권력 천재답다. 그가 죽어서도 그의 권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정치적 권력의 심장부인 북경 천안문에 그의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고, 중국 모든 화폐의 획일적 모델이다. 신적인 존재로 경배되며 복스런 인물로도 추앙된단다. 레닌이 이끈 공산당과 세계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은 1991년에 망했지만 마오가 이끈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더욱 막강해졌다. 공산당이 결정하면 인민들은 군말없이 따라간다. 의회 민주주의 국가들이 얕보며 곧 망하리라 여겨졌던 공산당 일당독재의 중국은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국가다.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라는 신경제체제 모델은 순항중이다. 미국과 함께 G2(Global Two)가 된 중국은 쓰레기 배출량에 있어서도 G2다. 마오는 이승의 혼란을 이용해 저승에서도 사후권력을 어찌 유지할 것인지 노련하게 고민할 것같다. 그가 생전에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던 혼란 증폭 쪽은 아니길 바라지만 꼭 그럴 것같은 어두운 예감이 든다.
278. 2015년 10월 5일 月. 부산. 아주 맑지는 않다.
폭스바겐 만이 아닌 전지구적 문제
2차대전 직전 히틀러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폭스바겐은 국민(Volks) 차(wagen)다. 럭셔리카의 대명사 포르세가 디자인했다는 것과 안어울리게 실용적 싼 차다. 2차대전 후 미국시장에 진출하며 광고사에서 가장 훌륭한 캠페인을 벌인다. 그 대표작은 ‘Think small’ 광고다. 고정관념을 깬 위대한 광고였다. <딱정벌레에게 배우는 광고발상법>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다. 크고 긴 대형차 일색이었던 미국에서 작고 짧은 독일산 소형차 폴스바겐은 충격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1955년 한 해에만 100여만대나 팔렸다. 이 광고를 지휘했던 DDB사의 번벅(William Bernbach, 1911~1982)은 신화적 거장이 되며 명예의 전당과 카피라이터 전당에 올랐다. 내가 폭스바겐에 대해 아는 지식은 딱 여기까지였다. 폭스바겐이 GM과 도요타를 누르고 현재 세계 1위의 자동차 제조업체이며, 람보르기니, 아우디 등 10여개 유명 브랜드를 소유한 자동차 재벌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 딱정벌레(beetle)가 커졌으니 욕심도 커졌을 것이다. 더 많이 팔아 1위 자리를 지켜야 했다. 급기야 디젤 엔진 자동차의 배출 가스량을 실제보다 훨씬 적게 나오는 것으로 조작하였단다. 폭스바겐 등 독일 자동차에 밀린 미국 자동차 기업들의 음모라는 설도 있다. 폭스바겐에게 막대한 벌금을 매기는데 그 진위여부는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자동차 기업들의 끝없는 욕심이다. 단지 폭스바겐, 그리고 배출가스량 조작 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대기 중에 배출가스 쓰레기를 내뿜는 전지구적 문제다. 싱가포르는 자동차 제조기업이 없기에 자동차 가격보다 비싼 차량취득권리증 제도를 실시하여 자동차 댓수 증가를 억제한다지만 아주 특수한 경우다. 자동차 제조가 주요 산업 기반인 나라들은 어림도 없다. 길거리와 주차장에 차가 넘치고 있다. 한 대 폐차되어야 한 대 구매허가를 내주는 제도가 절실한 세태에서도 돈만 있으면 몇 대라도 살 수 있고 얼마든지 운전하며 배출 가스를 내뿜어도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279. 2015년 10월 6일 火. 부산. 맑은 날이다.
다세대 주택이 아니기에 남은 정원
내가 사는 대연동 여기는 한 때 부산에서 부촌이었다고 한다. 정말로 그랬을 것같다. 지금 빽빽하게 들어선 원룸 다세대 빌딩들 사이에 간혹 남아 있는 양옥집들을 보면 그렇다. 대저택은 아니지만 나 어릴 적 잡지에서 보았던 선망의 부자집들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런 집들이 부러워서 엄마에게 우린 언제 이런 집에서 사느냐고 물었던 기억도 난다. 이 동네에 그런 양옥들이 즐비했을 것을 생각하면 아름다운 동네였을 것같다. 하지만 그런 양옥촌은 별 미감이 느껴지지 않는 원룸촌으로 변했다. 집주인들이 양옥을 허물고 원룸 임대를 할 수 있는 다세대 주택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동네 부동산(reality) 가치는 높아졌을 지언정 미감(amenity)적 가치는 떨어졌다. 그런데 내가 지금 사는 2층 원룸의 창문을 열면 저런 경관(view)이 펼쳐진다. 이 동네에서 귀하며 희소한 양옥집의 정원이다. 비록 좁은 공간의 정원이더라도 나한테는 숨통을 트이게 귀한 장소다. 가끔 저 양옥집에서 사는 할머니가 옥상밭에 열린 고추나 상추를 따러 올라오는 장면을 보면 비록 내가 먹지는 못하더라도 싱그러움과 함께 포근함을 느낀다. 만일 저 자리에 원룸 다세대 주택이 들어 섰다면 문을 열어도 답답했을 것이다. 열어 보았자 별 매력없는 회색빛 건물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을 열면 앞이 틔었다. 아주 시원하게 틔인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감사하게 틔었다. 저 정원 안에 심어진 야자수와 과실수가 나를 아름다운 녹색 이상향(greenpia)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런데 이 세상은 저런 공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같다. 언젠가 저 장소도 없어지며 그 공간에 다세대 주택이 들어설 것같다. 아니면 원룸촌도 모자라 이 동네 일대가 초고층 복합건물이 들어설지도 모른다. 이렇게 높아만 가는 부동산 개발 흐름을 역행하여 거꾸로 낮아지는 부동산 개발의 시대가 올 수 있을까? 쓰레기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1층 주택들이 들어서는 날을 상상한다. 상상만으로는 기분좋지만 그게 아직 불가능할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다.
280. 2015년 10월 7일 水. 부산. 적당히 맑다.
진작부터 했어야 할 도시기반 공사
프랑스의 위고(Victor Hugo, 1802~1885)가 쓴 <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발장이 사위 마리우스를 엎고 구출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장소가 하수도다. 150여년 전에 어찌 그리 커다란 하수도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 이전에 어떻게 그런 하수도 만들 생각을 했었을까? 하수도(下水道)는 똥물길이거나 구정물길인 오수도(汚水道)다. 이 오수도 기반부터 잘 갖추어져야 도시가 도시다워진다. 일찍부터 하수도 시설을 완벽히 갖춘 파리에는 파리하수도박물관이 있다. 자랑할만 하니까 자랑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높은 건축물이 올라가는 것을 자랑할 수 있어도 낮은 하수도를 자랑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 지하에는 대개 합류식 하수관이 매설되어 있다. 빗물인 우수(雨水)와 생활하수인 오수(汚水)가 같이 흐른다. 이를 분류식으로 바꾸어 우수와 오수가 따로 흐르도록 하는 저 공사는 화장실, 주방, 욕실로부터 배출되는 쓰레기 물의 하수관을 빗물이 흐르는 하수도와 분리하여 뭍는 공사다. 이렇게 하면 홍수 때 우수와 오수가 섞여져 강을 오염시키는 일이 적어진다. 또한 우수와 분리된 오수가 모여진 하수관거(下水管渠)에서 하수정화 처리를 잘 하여 하천으로 내보내면 수질오염을 현격하게 줄일 수 있다. 강을 살리려면 우선 우리나라 곳곳에 흐르는 하수관 공사부터 제대로 해서 강으로 흘러가는 지천들이 깨끗하도록 했어야 했다. 강바닥 흙을 파내는 준설(浚渫), 강물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제어하기 위한 보(洑) 건설 만으로는 강이 절대 살아날 수(水)가 없고 리(理)도 없고 법(法)도 없다. 이는 근본 대신에 말단을 손보는 얕은 짓이다. 토목공학 전문가가 아니어도 물이 흐르는 순리를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저런 분류식 하수관이 뭍혀 있는 곳은 전국에서 아직 절반도 못된다. 이제라도 생태 관점에서 강이 깨끗하게 살아나도록 하는 분명한 사업부터 하면 좋겠다. 하지만 뭔 이유에서인지 분명한 일에 대해서도 왈가왈부, 설왕설래, 갑론을박하니 어지럽고 헷갈리지만 물의 순리를 생각하면 분명해진다.
281. 2015년 10월 8일 木. 부산. 맑고 환하다.
크리에이티브 페스티벌에서 수상가능작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자는 지역사회 캠페인을 한다면 어떤 문구가 담긴 피켓이 좋을까? 크게 몇 가지 방향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직접적인 방향이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맙시다!”와 같은 문구다. ▶두 번째는 긍정적인 방향이다. “쓰레기 없는 깨끗한 동네 이루어 가요!”와 같은 문구다. ▶세 번째는 엄포적인 방향이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벌받습니다!”와 같은 문구다. ▶네 번째는 우회적인 방향이다. “하나님이 굽어 보시는 아름다운 우리 동네!와 같은 문구다. 과연 네 가지 방향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쪽은 어디일까? 이런 독창성을 기리는 세계적인 대회가 있다. 칸느 크리에이티브 훼스티발(Cannes Lions International Festival of Creativity)이다. 프랑스의 작은 해변 휴양도시 칸느에서 영화제가 열린 후 6월에 광고제가 열린다. 영화제의 극장광고 한 부문으로 있다가 1953년에 독립되었다. 2011년에는 광고제(Festival of Advertising)에서 창조제(Festival of Creativity)로 바뀌었다. TV, Radio, 신문, 잡지라는 4대매체 광고에 한정하는 광고제에서 벗어나 인터넷, 모바일, 디지털, 온라인, 사이버 등을 포괄하는 소비자 지향의 전반적 커뮤니케이션 영역으로 확대하기 위해서다. 세계 각국에서 수만 점이 출품되며 여기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영예다. 수상하기 위해서는 위의 네 가지 방향 중에서 네 번째 방향으로 접근하여야 유리한다. 뭔가 우회적으로 돌려 표현하면서 재미있는 광고여야만 광고제작 크리에이터로 이루어진 심사위원의 눈에 들어 수상권에 들 가능성이 커진다. 쓰레기통 위에 올려진 저 피켓은 수상권에 들 자격이 충분히 있다. 쓰레기를 그냥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으로 보아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자는 문구는 직설적, 긍정적, 엄포적인 문구들보다 우회적으로 생각거리를 준다. 물론 바쁜 세상에 머리를 한 번 굴리도록 해야 이해할 문구지만 뒷여운을 남긴다. 이처럼 쓰레기 관련 공익광고도 칸느 등 세계적 광고제에서 수상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