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남의 생각이 멈추는 곳]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광야 40년②

2019-06-22     김민남
출애굽(出土耳其), 즉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 탈출', 즉 '엑소더스(Exodus)'가 가능했던 것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파라오 람세스(Ramses) 2세의 허락과 뛰어난 이스라엘인 지도자 모세의 등장 때문이다. 당시 '신의 국가' 이집트 왕국은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나일 삼각주에 신도시를 건설, 수도를 이전하고 테배의 룩소르 신전과 함께 아부심벨 대신전을 건설했다. 늘 골치거리였던 북쪽의 히티이트 족을 물리치는데도 성공했다. 여기에 출중한 역량을 보인 모세가 파라오 람세스1, 2세와 좋은 인연을 만든 것이 이집트 왕의 '출애굽' 승인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모세는 목숨을 건 탈출과 광야생활 40년을 끝까지 이끌었고 고비고비마다 쏟아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성과 비난을 참아내고 설득했다.  한밤중에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에 가로막힌 데다, 바로 뒤에는 '잘못된 판단'을 깨달은 람세스의 이집트 군대가 추격하고 있었다. 절체절명, 하느님께 기도하며 울부짖는 모세 앞에 하느님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여 주셨다.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헤매며 기도한 끝에 불 속에 십계명을 내려주셔서 그 계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쳤지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않았다. 소금물로도 씻기지 않는 퇴폐와 놀이에 쏠렸다. 모세는 그래도 꿀과 물이 있는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물도 먹을 것도 부족한 광야 40년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한 모세는 정말 인간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인내와 믿음을 후세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몸으로 보여주고 가르쳤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세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외쳤다. 모세가 광야 40년의 마지막 순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고 퇴폐가 끊이지 않자 끓어오르는 화(火)를 참아낼 수 없었다. 그때 모세가 십계명 판을 던져서 금이 가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후 이스라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그 후 고대 이스라엘 건국을 이끈 아브라함 자리에 모세가 있지 않았을까. 
십계명을
인내(隐忍)는 인간 최고 덕목의 하나다. 수행(修禅)과 함께 간다. 수행은 마음을 닦는 것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인내가 따르지 않는 수행은 없다. 우리들 삶도 마찬가지다. 인내와 철저한 자기 관리는 인격과 삶의 바탕이다. 우리가 운동을 할 때 가장 힘들고 참기 어려운 마지막 순간 그 고비를 넘기지 않고는 운동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 고비를 참아내지 못하면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온 42.195km 마라톤 코스에서 강물처럼 흘린 땀방울과 하해(河海)와 같이 쏟아낸 눈물이 한 점 티끌이 되어 허공에 날아가버린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았다. 아니 못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화(?)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린 건 아니었을까. 40년을 참아온 그는 끝까지 참아야 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을 원망하고 의구심(?)을 가져서는 안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하느님이 모세의 잘못만 포용하지 않을 리는 없다. 모세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시려고 한 것은 아닐까.  아무튼 3600여 년 전의 모세는 지금도 우리 곁에 인내와 포용의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로 살아 있다. 세계 최강소국(最厉害的小國) 이스라엘 역사의 한 축이다. 지금 경제 등 '난국'으로 빠져드는 우리와 우리 정부 지도자들에게 모세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권력은 엄청난 자산을 가지고 있다. 많은 걸 할 수 있다. 전 정부처럼 남 탓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구약 모세를 읽으며 새삼 깊은 생각이 멈추는 지점이다. 권력은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 뿐이다. 헌신과 희생, 때로는 뼈를 깎는 아픔도 이겨내는 리더십, 그것이 진정한 권력의 리더십이다. 권력은 그것을 잡는 순간 스스로 국민에게 무한(無限)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  이 진리를 쉽게 잊는 권력의 비극을 우리는 역사에서 자주 본다. 이번 정부만은 예외이기를 바란다. 2019년 6월 15일 묵혜(默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