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2
마지막 승부
매주 금요일에 서창덕의 <영성기행>을 연재한다. 필자는 BNK부산은행 1급 지점장(부곡동지점) 출신으로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필자는 오랫동안 국선도, 요가, 도교, 불교, 명리학, 풍수지리 등을 공부했으며, 지난해에 범어사 말사인 청련암 벽화의 비밀을 추적한 영성 수련 책 <당신은 길 잃은 神이다>를 펴내기도 했다. 현재 국선도 세계연맹 사범,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설립 자아실현협회(S.R.F) 크리야 회원, 중국 도교 전신화산파 입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내 전부를 거는 거야
‘마지막 승부’는 내가 30대 초반이던 1994년에 유명했던 청춘 드라마다. 그때는 나름 재밌게 본 드라마였는데, 지금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출연배우가 누구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승부’ 라는 제목의 노래와 가사의 일부는 지금도 흥얼거릴 정도로 기억에 남아 있다.
-내 전부를 거는 거야 모든 순간을 위해
넌 알잖니 우리 삶엔 연습이란 없음을-
나는 힘든 시기에 가끔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까맣게 잊고 있던 노래가 그 순간 어떻게 불쑥 떠오른 건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한 일이지만 그래도 노래 가사 덕분에 무너졌던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3시간을 쉽게 넘기는 야구시합에서도 게임을 좌우하는 한 순간의 승부처가 있듯이 인생도 전부를 걸어야 하는 중요한 시기가 있다. 나는 리시케시에 가기로 결심하면서 이것이 내 인생의 승부처임을, 그것도 9회말의 마지막 승부처임을 알았다.
고대부터 인도인들은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면 재산을 모두 자식에게 넘겨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다. 나중에 자식이 보고 싶다고 찾아와도 만나주지도 않고 스승 밑에서 걸식하면서 수행에 집중한다. 지금도 그런 전통이 남아 있어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출가를 하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그런 삶을 늘 동경했다.
갠지스강의 불꽃 무더기
리시케시에 도착한 첫날밤에 나는 갠지스강을 밝히는 많은 불꽃 무더기들을 보았다. 뭐지? 작년에 갔었던 바라나시가 떠올랐지만 갠지스강 최상류인 이곳 리시케시에 화장터가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더군다나 화장터 시설을 갖춘 바라나시와 달리 리시케시는 아무런 시설도 갖추지 않았고 강 바로 옆에는 주택가가 밀집해 있다. 그래서 나는 멀리서 날려 온 회색 재가 얼굴에 달라붙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멀리서 헤아려보니 불꽃 무더기는 모두 10군데였다. 간간이 폭죽소리도 들려 축제를 하는가 싶었다. 인도에는 신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축제가 있다.
리시케시에 도착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바나나 한 개와 낮에 얻어온 짜이 한잔으로 저녁을 때운 나는 심란한 마음에 갠지스강 둑을 걷다가 첫날밤에 보았던 불꽃 무더기까지 가게 되었다.
첫날에 본 것처럼 많지도 않았고 그나마 거의 끝난 분위기였다. 빨간 숯불만 남은 두개의 불무더기에서 가끔 가늘고 긴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고, 강둑에는 조명도 없이 어둠 속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들이 바쁘게 그릇과 냄비들을 챙기고 있었다. 담배를 문 남자들도 천막과 이런저런 큰 장비들을 챙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이 짐을 챙길 수 있는지 신기해 한동안 그들의 옆에 서 있다가 나는 어둠 속에 빨간 숯불로 남아 있는 불무더기의 정체를 알았다.
그들 중 누구도 우는 사람이 없었다. 강가를 걷는 사람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도 덩달아 무심해졌다. 아쉬람으로 돌아오며 여기가 만약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 시체를 태운 재와 연기가 저녁밥상에 내려앉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상황 자체가 시작도 되지 않겠지만 허가가 되거나 시도가 되었다면 아마 폭동 수준의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시청 앞에서 한 둘은 분신을 했을 수도 있다. 가슴을 찢는 통곡소리는 또 얼마나 크게 들렸겠는가.
화장터에서의 명상
두 번째라 그런지, 아니면 이곳이 인도라서 그런지 나는 덤덤했다. 불과 1년 전 나는 바라나시에 있는 유명한 화장터의 한복판에서 그들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그때도 내가 묵은 호텔이 강 바로 옆에 있어 저녁을 먹고 갠지스강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인도인들처럼 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갠지스강은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황혼이 내린 강물에 몸을 담근 채 기도하는 사람. 머리를 감거나 양치를 하는 사람. 허벅지까지 치마를 걷어 올린 채 빨래하며 잡담하는 여인들. 여인들보다 더 시끄럽게 강물에 뛰어 들며 노는 아이들. 강물 밖으로 머리만 내민 채 그 모두를 구경하는 소떼들.
그들은 각자의 갠지스강이 따로 있었다. 하나의 갠지스강에서 그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들을 구경하며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하얀 재가 불쑥불쑥 얼굴에 달라붙었다. 무엇을 태우는지 궁금해 연기 나는 방향으로 걸어가 모퉁이를 돌았더니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과 불꽃 무더기들이 펼쳐져 있었다. 불지옥을 세세한 부분들까지 묘사한 대작의 그림처럼, 지금도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순간을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첫날은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호텔로 돌아왔지만 이튿날은 용기를 내 가까이 갔다. 화장터 한복판 조망하기 좋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기까지가 문제지 일단 마음을 먹으면 누구보다 용감해지는 편이다. 처음엔 그들도 외국인을 향해 경계심을 드러냈지만 이내 잡담을 나누고 사진도 찍는 등 내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때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여기가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그들이 관심을 두지 않자 나는 조금 더 진전해 보기로 했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느낌이 달랐다. 태우는 냄새가 아니면 그냥 그곳은 분주한 시장터였다. 인도에서 나온 많은 책에는 화장터에서 명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에서 그런 류의 책을 읽을 때 나는 그 장면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슬픈 통곡의 자리에서 명상을 한단 말인가. 화장터라면 또 얼마나 귀신들이 많겠는가. 나는 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뻥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왜 바라나시를 신성한 곳이라고 하는지도 알았다. 그곳은 웬만한 사원보다 훨씬 성스러운 진동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신도 없었다.
내친 김에 아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지속하고 싶었지만 화장터에서의 명상은 금방 깨졌다. 누군가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손짓을 하며 부르고 있었다. 불꽃 무더기 옆에 서서 쇠막대기로 불길 안을 뒤적이던 남자였다. 아까부터 그 남자는 불무더기를 뒤적이며 타고 남은 큰 뼈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장작을 살 돈이 적었던지 쇠막대기를 든 남자의 몸짓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설마 유일한 외국인인 나를 부르는 건 아닐 테지. 그래도 오라고 하면 못 갈건 없는데. 이미 용기를 낸 나는 용감하니까. 잠깐 갈등을 하고 있는데 바로 내 옆에 서 있던 남자들 댓 명이 우르르 그곳으로 몰려갔다. 내 옆에서 나랑 함께 무심하게 사진도 찍고 잡담하며 시간을 보냈던 그들은 망인의 가까운 가족이었다. 원래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는 곳인데 그들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덕분에 나도 몇 장을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사실은 내가 무척 긴장했는지 쓸 만한 사진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 전망대 위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고인의 가족이었다. 그들은 나와 같은 구경꾼이 아니라 누군가 가까운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을 찍고 농담을 하면서.
물론 그 전망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들처럼 행동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 누구도 가족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슷하게 초연했다. 내 옆에서 뛰어간 사람들이 한 무더기의 타다 남은 장작 주위에 모였다. 그리고 고인의 큰 아들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엉치뼈 쯤으로 보이는 뼈 하나를 골라 간단한 이별의식을 한 뒤 갠지스 강물에 던졌다. 나머지 남자들도 합장을 하며 고인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서 잡담을 나누며 총총히 인파들 속으로 사라져 갔다.
식사를 할지 아니면 다른 일을 먼저 할지 그런 의논들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들과 헤어져 다시 내가 묵은 호텔이 있는 쪽으로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그 곳에는 여전히 기도하는 사람, 양치하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다이빙하며 노는 아이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바라나시에 있는 갠지스강은 유속이 느려 겉으로 보면 흐르는지 멈춰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을 위하여
왜 인도에 오면 죽음이 가벼워지는 걸까? 죽음을 진단하는 규정과 죽음이 미치는 영향은 똑같은데. 왜, 이곳에서만 두렵고 무거운 삶의 마지막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걸까? 한국이 인도보다 훨씬 잘 살고 축구도 잘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만은 그들이 앞서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누구나 죽는다. 어떻게 하면 잡담처럼 가볍게 이 세상과 작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노래가사처럼 연습은 없다. 죽음을 알아야 하고 죽음과의 승부에서 이겨야 한다. 마지막에 가볍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면 아무리 화려한 삶이라도 성공한 삶이었다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