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11/나다요가
나다요가(Nada Yoga)의 비밀
다시 시바난다 아쉬람을 찾았다. 뭔지 모르지만 아직 내가 파악하지 못한 결정적인 비밀이 더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더 이상 외국인 제자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요가를 배울 수 없다는 것도 오히려 나를 부추겼다. 오래전 나는 이 길에서만은 어떤 방해와 장애가 있더라도 절대 후퇴하거나 포기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두 번째 방문한 시바난다 아쉬람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적막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수백 명이 잠자며 수행할 수 있는 시설들도 대부분 비어 있었다. 인도인들에게 더 많이 요가를 배우게 하고 싶었겠지만 요가를 배우겠다는 인도인들은 드물다.
아쉬람 내부에 들어가니 마침 사제 두 명이 신전에서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의식에 동참하는 신도는 키가 훤칠하게 큰 할머니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나는 합장을 하고 의식에 동참했다. 그런데 의식 중간에 옆에 선 키 큰 할머니가 자꾸 나보고 뒤로 가라고 손짓을 한다. 허 참. 외국인이라고 옆에 서지도 못하게 하는 건가. 인종은 달라도 자기나 나나 평범한 신도에 불과한데. 세계로 뻗어나간 아쉬람 답지 않게 차별이 심한데.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이만한 일로 국가 간에 분쟁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 할머니의 요구대로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차별이 아니었다. 곧 이어 어떤 순서에서 할머니가 씩씩하게 종을 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바로 그 종 밑에 내가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키가 큰 이유가 있었다.
조금 더 뒤로 물러날 걸 그랬다. 바로 내 1미터 앞 천정에 매달린 사람 머리만한 종이 뎅그렁 뎅그렁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귀가 멍멍할 정도로 컸지만 너무나 청량하고 맑고 깨끗했다. 눈을 감았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종소리가 울려 퍼져 짜릿짜릿했다. 몇 번이나 치려는 것일까. 내 몸의 안과 밖이 온통 종소리로 채워져 나는 천상에 오른 느낌이었다. 아, 그리고 그 순간 마침내 나는 알았다. 멈출 줄 모르고 끝없이 이어지는 종소리가 시바난다 아쉬람의 비밀을 가르쳐 주었다. 이곳은 비밀리에 나다요가(Nada Yoga)를 가르치는 곳이었다.
나다요가(Nada Yoga)는 크리야 요가와 함께 인도의 대표적인 비밀요가다. 수련법이 비밀이라는 것은 그만큼 단계가 높다는 것이다. 낮은 단계인 아헹가 요가, 아쉬탕가 요가, 하타 요가 등은 비밀 수련법이 아니기 때문에 세계의 어디서나 쉽게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나다요가는 공개적으로 일반인에게 가르쳐 주는 곳도 없고 발간된 책도 없다. 만약 공개적으로 가르치거나 책으로 판다고 하면 장담하는바 99.9% 가짜다. 국선도의 진기단법도 마찬가지다. 책에 설명한 대로 수련해서 될 것 같으면 절대 일반인이 볼 수 있는 책으로 펴내진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키 큰 할머니가 타종을 멈췄다. 천상을 떠돌던 나도 아쉽지만 지상으로 내려왔다. 뭐 하는 할머니지? 복장은 아쉬람에서 일하는 차림인데 고령의 나이에도 인도의 다른 노인들처럼 배도 나오지 않았고 기운이 넘쳤다. 할머니는 종을 친 뒤 의식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는 듯 휑하니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녀가 가고 나서도 한동안 종소리는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마치 꿈속 같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의식에서는 종을 치지 않았었다.
소리를 갖고 어떻게 요가를 한다는 걸까? 요가를 모르는 사람들은 황당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종교나 어떤 수련단체이든 모두 소리를 쓴다. 기독교의 아멘과 찬송가도 소리를 활용한 경우다. 불교에서는 옴마니반메훔 관세음보살 등 무수하게 많다. 국선도에서 청산선사의 선도주에 맞춰 수련을 하는 것도 소리의 효과를 활용한 것이다. 그 외에 종을 치거나 북을 치거나 목어를 치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활용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한 영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창세기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셨다. 보통 말의 뜻만 생각하는데 뜻보다 사실은 소리 자체의 힘이다. 하나님이 소리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은 우주가 다양한 소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사람 몸도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소리가 내재되어 있다. 내 몸 안에도 소리가 있고 내 몸 밖 우주에도 소리가 있기 때문에 소리를 통한 신과의 합일(Yoga)이 가능하다. ‘옴(Aum)’은 일반적으로 우주의 근본소리라고 하며 근본 신을 상징한다. 그래서 요가수행의 끝에 항상 신과의 합일을 위하여 함께 ‘옴’을 함께 제창한다.
나는 3년 이상 요가를 한 사람들에게 늘 이제 기초는 그만하면 됐으니 한 단계 더 높은 요가를 해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내가 만난 사람 중에 내 말을 듣고 요가의 단계를 높인 사람은 1%도 안 된다. 초등학교 6년을 다녔으면 이제 중학교에 올라가야 하는데 10년 또는 심지어 20년 넘게 초등학교만 고집한다. 축구로 치면 밖에서 패스 연습만 잔뜩 하고는 정작 게임을 뛰지 않겠다는 사람들이다.
요가는 과정이 정확하게 나뉘어져 있는 수련법이다. 기초과정에 해당하는 요가가 대개 우리나라의 요가학원에서 가르치는 요가들이다. 아헹가요가, 아쉬탕가요가, 하타요가, 핫요가 등등이다. 이러한 자세들을 하는 이유는 그러한 자세들을 통하여 몸을 유연하게 하고 몸에 쌓인 독(毒)을 씻어내고 나아가 육체를 정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다. 대개 이러한 기초의 과정은 3년 정도면 충분하다. 그 다음은 한 단계 높은 요가로 올라가야 한다.
왜 그래야 할까? 기초과정은 기초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기초과정을 20년, 30년, 아무리 오래 한다고 해도 신을 만나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신과 합일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도 혹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자기만은 예외로 될 수도 있으니까 고집스럽게 기초만 닦는 사람들이 있다. 단전호흡을 하는 국선도도 마찬가지다. 정각도 단계를 아무리 오래 한다고 하여 통기법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 모래를 아무리 오래 정성스럽게 찐다고 하여 절대 밥이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리시케시에는 한국의 요가강사들이 많이 와서 요가를 배운다. 어떤 사람은 10년 전부터 거의 매년 리시케시에 와서 요가를 배우는 사람도 있다. 왜 계속 같은 걸 배우냐고 물으면 더 완벽한 아사나 자세를 완성하기 위해서란다. 더 완벽하고 더 예쁜 자세를 완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패스 연습을 하고 드리블 연습을 하는 것은 경기장에 들어가 경기를 하기 위한 것이지 패스 연습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한국요가의 특별한 분위기이자 문제점이다. 대개 요가학원을 찾는 사람들의 동기는 예쁘고 날씬한 여배우들이 요가를 하는 장면들을 보고 그들처럼 예쁘고 날씬해지기 위해 요가학원을 찾는다. 요가의 뜻은 인도말로 신과의 합일인데 한국에서 요가의 뜻은 날씬하고 예쁜 사람 되기다. 요가의 아사나 동작을 통하여 육체를 뛰어 넘고 육체를 초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요가를 하면 할수록 몸에 집착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해본 사람은 알지만 패스연습보다는 실제의 축구 경기가 훨씬 재밌다. 일단 한번 경기를 뛰어 본 사람은 패스 연습 따위는 시시한 일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나중에 패스연습과 드리블 연습을 따로 하라고 해도 말을 잘 듣지 않게 된다. 중학교에 올라간 학생에게 다시 초등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라고 하면 누가 말을 듣겠는가.
라자요가(Raja Yoga)는 요가의 단계 중에서도 최고의 단계다. ‘라자’라는 말은 인도말로 왕(King)이라는 뜻이다. 라자요가 중에서 대표적인 요가가 바로 소리를 통한 ‘나다요가’와 빛을 통하는 ‘크리야요가’ 두 가지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최고 단계의 두 요가는 모두 자격을 갖춘 제자에게만 비밀리에 계승된다.
내가 두 번째 시바난다 아쉬람을 방문했을 때 나는 운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다요가를 가르치는 장면을 살짝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바난다를 모신 경내의 왼쪽 벽으로 의자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나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중간쯤의 의자에 앉아 잠깐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른손에 배낭을 멘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경내로 들어왔고 안에서 두 사람의 사제도 급하게 나왔다. 아마 약속시간보다 많이 늦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밖에서 보이지 않게 얼른 커튼을 쳤고 늦게 온 신도에게도 꿇어앉게 하고 몸 전체에 천으로 된 보자기를 씌웠다. 그리고 두 명의 사제가 어떤 주문을 외웠는데 내 귀에도 어떤 소리인지 분명하게 들렸다. 이 모든 것이 비밀의 의식이라 밖에서 보이지 않게 커튼을 쳤지만 급하게 하느라고 커튼의 1/3쯤이 열려 있었고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어떤 의식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나는 아쉬람이나 사원에 갈 때면 늘 운이 좋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키 큰 할머니가 갑자기 평소와 다르게 종을 치는 바람에 나는 이 아쉬람이 나다요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힌트를 얻었고 시바난다를 모신 경내에서는 전수받을 제자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들의 비밀의식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시바난다 요가의 책에는 나다요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언급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일반적인 제자들에겐 허용되지 않고 일정한 단계를 거친 특별한 제자에게만 전수되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관음법문이라고 이름붙인 칭하이 무상사도 이곳 시바난다 아쉬람에 1년 정도 머물렀다고 하는데 아마 여기서 두 가지 모두를 배웠을 것이다.
나다요가는 여러 가지 소리에 집중함으로써 진리를 깨닫는 방법이다. 정신을 집중하면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리는데 마지막에 해조음(海潮音)이라고 하는 파도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때 들리는 소리는 귀를 막아도 귀를 열어도 들리는 소리다. 즉, 일반적인 소리의 차원을 넘어선 소리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절이 일종의 나다요가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유명한 관음성지는 대부분 바다 옆에 있다.
소리뿐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몸에 있는 여섯 가지의 수단(눈,귀,코,혀,몸,마음)으로 여섯 가지(빛,소리,냄새,맛,촉감,생각)를 인식하는데 수련이 깊어지면 여섯 가지의 인식기능이 모두 향상되어 새로운 감각이 개발된다.
즉, 빛은 눈을 감아도 보이고 눈을 떠도 보이게 된다. 소리는 귀를 막아도 들리고 귀를 열어도 들린다. 일반적인 향뿐만 아니라 내 몸에서 나는 특별한 향을 맡을 수 있다. 특별한 맛, 특별한 촉감도 느낄 수 있다. 마음의 인식은 확장되어 의문을 가지면 곧바로 답이 떠오른다.
이러한 상태가 깊어지면 비로소 자신의 빛나는 영혼(眞我)을 보게 된다. 그 상태까지 되어야 내가 육체로부터 파생된 존재가 아니라 빛나는 영혼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내 육체가 죽더라도 내 중심의 빛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육체가 죽으면 끝이라느니, 전생이 없다느니, 한번 살다 죽는 인생이니 해볼 거 다 해보고 죽어야 한다는 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게 된다. 실제 체험하지 않고 논쟁하고 추측하는 것으로는 이러한 진리를 절대 깨달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경지가 되었을 때, 내가 보는 영혼이 바로 내 안의 신(神)이다. 내 안에 빛나는 바로 이 신이 내 밖에 있는 궁극의 신과 결합하는 것이다. 이때 안과 밖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아무튼, 이것이 바로 신과의 결합을 뜻하는 요가(Yoga)의 정확한 의미다. 내 안의 신만이 궁극의 신 하나님께 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유일한 길이며,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한다고 하신 뜻이며, 하나님은 내 안에 있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신 뜻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도 절대 스스로가 하나님이라고 단정하면 큰 오산이다. 이때 자기가 하나님이니, 자기가 부처님이니, 나를 믿으라느니, 나를 숭배하라느니 따위로 기고만장한다면, 그는 최종면접에서 탈락이다. 시중에 그런 스승이 있다면 어떤 능력을 가졌더라도 그는 최종에서 탈락한 사람이다. 1점 차이로 아깝게 떨어져도 탈락은 탈락이다. 예수님이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단 한 번도 내가 신이라고 하며 나를 숭배하고 받들라고 하신 적이 없다. 후대 사람들이 본인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렇게 만들었거나 잘못 해석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게 당연히 쉽지는 않다. 또 아쉬탕가요가, 아헹가요가, 하타요가 등 기초에 해당하는 요가를 아무리 열심히 오랫동안 수련한다고 해서도 절대 불가능하다. 안타깝게도 이 대목에서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자신이 하고 있는 요가를 열심히 하면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국선도 수련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더 하면 뭔가 될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수련의 단계를 높이지 않으면 절대 될 수가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무리 오랫동안 열심히 모래를 찐다고 하더라도 절대 모래가 밥이 되지 않는다. 뜨겁기만 할 뿐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한 단계 높은 요가이고 시바난다 아쉬람에서 가르치는 나다요가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인도는 나다요가를 수련하기 좋은 곳이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노래 부르는 걸 정말 좋아한다. 밤낮없이 어디서나 노래를 하는 바람에 명상에 방해를 받을 때가 많다. 왜 이들은 이렇게 노래를 좋아할까?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봤지만 마땅한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의 허공은 매우 고요한데 비해 인도의 허공은 온갖 영적인 파동들이 많이 지나간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조금 곤란한데 아무튼 허공에 가득한 에너지 파장들이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에 잘 반응한다. 그래서 인도에는 나다요가를 수련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작년에 리시케시에서 장장 스무 시간 버스를 타고 해발 4천 미터에 있는 히말라야 바드리나트라는 곳에 갔었다. 인도인들이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어 하는 최고의 성지지만 1년의 대부분이 눈으로 덮여 있고 길도 위험해 실제 가는 사람은 드물다.
그곳에서 나는 해발 4천 미터쯤의 만년설 밑에 토굴을 파고 수행하는 젊은이를 만났다. 추위와 바람을 피해 납작하게 토굴을 만들어놓아 밖에서는 토굴인지 산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를 보기 위해 그곳을 지나가다가 나는 어떤 느낌에 고개를 들었는데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간 먼 거리였고 머리만 삐쭉 나와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마스떼! 인사를 하고 그곳에 올라가 봐도 되는지 물었다. 그는 흔쾌히 손짓으로 올라오란다. 덕분에 나는 그의 토굴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입구는 작았지만 내부는 아늑하고 길었다. 폭은 3미터 정도로 좁았고 길이는 10미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흙바닥도 깨끗하고 간단하게 음식을 끓여 먹을 수 있는 작은 냄비도 깨끗하게 씻겨 있었다. 큰 바위를 중심에 두고 기역자로 꺽은 형태로 흙벽을 쌓아 방을 만들었는데 온실효과가 있어 내부는 훈훈했다.
처음 들어온 곳이지만 어쩐지 자주 와 본 듯 익숙하고 아늑했다. 늘 나는 히말라야의 이런 토굴을 꿈꿨었다. 얼마나 있었느냐고 묻자 2년 정도 되었다고 하며 토굴은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한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의 추위와 두려움과 외로움을 그는 어떻게 견딜까. 기특했다.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옆을 보니 안으로 문이 하나가 더 보였다. 저 방은 뭐냐고 물으니 신전이란다. 보고 싶다고 했더니 안 된단다. 안 된다 한다고 순순히 물러설 내가 아니지 않는가. 딱 한번만. 담에는 절대 보여 달라고 안 할게. 딱 한번만. 내가 또 언제 이곳에 오겠는가. 한번이면 충분하다.
그는 내 지갑과 혁대가 짐승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안 된단다. 허 참 답답한 사람이네. 벗으면 되지. 나는 지갑과 혁대를 벗어 놓고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 내부는 세 평 정도 되는 넓이였고 한쪽에 못이 박힌 침대와 도끼 두 자루가 있고 신전에는 나라얀과 시바를 모셨다. 작은 신전 앞에는 촛불 하나가 타고 있었다. 밤에 못 침대 위에 자느냐고 물으니 그는 자지 않고 그의 스승이 와서 잔다고 하는데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지 붉은 녹이 쓸었다.
그때 내 눈에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자서전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그는 크리야요가 아니면 나다요가를 수련할 것이다. 나는 책을 가리키며 나의 스승도 된다며 너는 무슨 수련을 하느냐고 물으니 나다요가란다. 그렇다면 너는 무슨 소리를 듣느냐고 묻자 깜짝 놀라 입을 다문다. 놀라 입을 다무는 모습이 천진하다. 북소리나 종소리를 듣느냐고 하자 놀라며 그건 비밀이라 말할 수 없단다.
나는 촛불 옆에 약간의 시주금을 얹어 놓고 신전을 나왔다. 인도인들에겐 꽤 거금인데 그는 크게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가 차를 끓이겠다고 했지만 아래에서 기다리는 일행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와 헤어져 산길을 내려오다 돌아보니 그가 토굴에서 나와 나를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한참을 내려와 또 되돌아보자 그는 아직도 멀어지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행만 아니었으면 하룻밤 자고 올 걸 산을 내려오며 내내 아쉬웠다.
간밤에 꿈을 꾸었다. 그때 그 토굴이었다. 그 젊은이는 보이지 않고 나만 보였다. 그는 어디 갔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토굴은 내 것이었다. 못 침대 위에 둔 두 자루의 도끼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새벽에는 저 도끼로 곰을 내쫓았다. 며칠씩 계속되는 눈보라와 배고픔에 지친 흰 곰이 잠든 새벽에 내 토굴을 침범했다. 고함을 질러도 나가지 않아 도끼로 곰의 가슴팍을 때렸다. 도끼의 등으로 쳤기 때문에 멍은 들어도 큰 상처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곰에게는 야박했겠지만 따듯한 털이 있으니 밖에서도 얼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눈은 그쳐 있다. 하늘을 보니 초승달이 서산에 걸려 있고 별은 쏟아져 내릴 듯 뚜렷하고 빈 곳 하나 없이 모든 곳을 덮고 있는 하얀 눈도 별빛을 받아 반짝인다. 움직이는 게 아무것도 없어도 외롭거나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늘 오르는 큰 바위 위에 앉아 눈을 감으니 내 안인지 밖인지 모를 곳에서 작은 소리들이 들려온다. 처음엔 벌이 앵앵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나무가 타는 소리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 피아노 선율 같은 소리도 들린다. 꿈밖의 나는 처음 듣는 소리지만 꿈속의 나는 익숙한 소리인 듯 당황하지 않는다. 귀를 막으니 소리는 더 맑게 들린다.
이윽고 둥둥 북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종소리는 다른 모든 소리들을 누를 만큼 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시바난다 아쉬람에 갔을 때 키 큰 할머니가 쳤던 바로 그 종소리다. 모든 게 뒤섞여 뒤죽박죽이다. 여기가 리시케시인가? 아니면 작년 여름에 갔던 히말라야 바드리나트인가? 아니면 한국의 내방인가? 그러나 꿈속의 나는 개의치 않는다. 아무려면 어떤가. 시간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이윽고 쏴하는 파도소리가 들리고 영롱한 빛이 열렸다. 주위에 바다가 있었던가? 맞다. 토굴 바로 위에 폭포가 있었다. 그러나 폭포소리는 아닌 것 같다. 저 멀리 하늘의 은하수가 흐르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지극히 행복하다. 토굴 속에는 깨끗하게 씻은 냄비 하나와 겨울을 버틸 약간의 식량 밖에 없지만 내 행복은 지구를 덮고도 남는다. 아,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야, 얼마나 많은 권력과 명예를 쌓아야, 이 행복을 가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