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반바지 입고 베를린 거리를 어슬렁거리기

[기획연재]나의 버킷리스트③ 강동수(소설가, 부산문화재단 대표이사, 전 국제신문 논설실장)

2019-09-14     강동수

40년도 더 지난 고등학교 시절, 내가 매혹됐던 책들의 리스트에는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 끼어 있다. 1970년대, 소도시에서 6남매를 키우던 가난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아들이었던 나는 사교육이란 개념도 몰랐고, 학원에서 보습을 받는 것도 남의 일이거니 했던 까까머리 고교생이었다. 그 와중에 끊임없이 소설책 따위를 밤새워 읽었고, 또 <학원> 같은 당시 인기 있던 학생 문예지 몇 곳에 소설을 투고해 상을 휩쓸기도 했다.

전국의 여학생들로부터 팬레터(?)가 학교로 수십 통씩 답지해 친구들로부터 선망과 질투를 받기도 했고, 얼굴도 모르는 또래 문학 소년들과 편지 교환도 부지런히 했다. 여담이지만, 그때의 문학 소년들 중 어떤 이는 지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 시인과 작가가 돼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대입 중압감에 시달리면서도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었던 불량소년이었던 나는 정신의 자유분방함, 학문과 지식에 대한 끝없는 욕구, 인습적 억압으로부터의 탈출 따위를 격정적으로 토로한 전혜린의 에세이를 읽으며 대리만족을 얻었던 모양이다. 이미륵 묘소 참배기나 목숨을 걸고 나치와 투쟁을 벌였던 뮌헨 대학생들의 희생담을 읽고 느낀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50년대 독일 청년들의 해방구와 같았던 뮌헨의 슈바빙 이야기를 읽고 느꼈던 소년다운 동경과 선망도…

대학 2학년에 올라가면서 학과 배정을 할 때 국어과와 독어과를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독어과를 고른 것은 헤르만 헤세, 토마스 만, 귄터 그라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나라가 독일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전혜린의 글이 준 강렬한 인상도 한몫했을 거다.

글쎄, 80년대 초 그 엄혹했던 시기에 지하서클에 가입해 불온서적을 읽고 토론하고, 도서관 난간에 기어 올라가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 주동을 한 끝에 학교에서 제명당하고 감옥에 끌려가 징역살이를 하고, 그리고 부평의 공장에 위장취업 하는 따위 어수선하고 곡절 많은 청춘을 보내느라 순정한 독일문학 연구자가 되겠다던 신입생의 꿈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강동수(소설가,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복학해 대학을 졸업한 이후 아주 우연한 계기로 아는 사람 하나 없던 부산으로 왔다. 신문기자 노릇을 하면서 처자식을 거두어 먹이느라 꼬박 3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내 마음 한 귀퉁이엔 독일이란 나라는 일종의 이상형처럼 간직돼 있었다. 삶에 지칠 때 나는 편집국 한 귀퉁이의 내 자리에서 책상 위에 턱을 괴고는 취재 일로 두어 번 가본 뮌헨이나 베를린의 거리 풍경을 떠올리곤 했다.

‘베를린에서 1년 살기’라는 버킷리스트가 언제부터 내 마음속에 똬리를 틀었는지는 분명치는 않지만 적어도 10년쯤은 됐을 거다. 베를린 교외의 허름한 오피스텔이라도 얻어서 낮에는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브란덴부르크 거리나 티어 가르텐을 어슬렁거리고 밤에는 선술집 한 귀퉁이에 끼어 앉아 낯선 외국어의 소음을 귓속에 담으며 생맥주를 찔끔거리는 내 모습 말이다. 심야엔 혼자 불을 밝혀 실용적 목적을 가지지 않는 독서를 하는 건 또 어떤가. 베를린영화제가 열리면 극장가를 기웃거리고 싶기도 하다.

글쎄, 1년쯤 살아보고 싶은 도시로 하필이면 베를린을 고른 이유가 무어 특별하지는 않다.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유서 깊은 도시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물가가 싸다는 점일 터다. 이를테면, 베를린을 거점(?) 삼아 한 달의 반은 베를린에서, 나머지 보름은 유럽의 이곳저곳을 떠돌아 볼 생각이다. 열흘에서 보름 정도의 여정으로 1년 열두 번을 돌아다닌다면 유럽의 곳곳을 얼추 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젊을 때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유럽의 사상과 정신 체계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면 더 좋으리라. 역설적(?)이지만 동아시아의 고전을 베를린 한 귀퉁이 허름한 아파트 구석방에서 탐독해보고도 싶다. 그래서, 독일로 가게 된다면 짐 보따리에 주역, 논어, 맹자, 중용, 그리고 당시(唐詩) 따위 지금 내 책장에 꽂힌 동양고전 전집을 담아 들고 가서 다시 찬찬히 읽어 보고 싶다.

말 꺼내기엔 좀 쑥스럽지만 ‘유럽에서 되돌아본 동아시아’ 정도의 주제로 유럽과 동아시아 문명사, 정신사를 비교론적으로 다루는 글을 써 보는 것도 은밀한 버킷리스트의 하나이기도 하다. 눈 밝은 어느 신문기자가 이 글을 읽고 입도선매(?)로 사전 청탁을 해 준다면 기꺼이 응할 용의가 있기도 하다. 

글쎄, 자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내 머리 한 귀퉁이에 소설 아이디어가 비 온 후의 웅덩이처럼 천천히 괴어든다면 한국과 유럽의 문명사를 다룬 장편 소설을 써보고 싶기도 하다. 이건 영업비밀이지만, 구한말 유럽에 밀반출된 고서화의 출처를 찾아다니는 어느 한국 유학생의 이야기를 지금 구상하고 있기는 하다.

30년 가까이 소설가와 저널리스트 노릇을 했고, 최근 한 4년쯤 대학 언저리를 기웃거리며 교수 노릇도 하다가 지금은 부산문화재단의 책임자를 떠맡아 문화행정가로 변신(?)한 것이 내 삶의 이력이다.

기자나 대학 선생 일도 쉽지는 않았지만, 부산문화 전반을 보살펴야 하는 공조직의 CEO 일은 내게는 벅찬 도전이다. 수많은 사람의 주목과 비판을 감내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때로는 보람도 있지만, 더 많은 시간은 고뇌와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은 소설이나 다른 잡문 쓰기에 눈 돌릴 겨를도 없지만, 한 3년 후쯤 이름 없는 이방인으로 베를린 어느 거리를 어슬렁거릴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시간을 견딘다. 상상에는 돈이 들지 않는 법이라, ‘베를린에서 1년 살기’의 꿈은 ‘미국에서 1년 살기’와 ‘일본과 중국에서의 1년 살기’로 끝없이 확장된다.

그럼 그때를 위해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느냐고? 글쎄, 지금 처지에서 무슨 별다른 준비를 할 수 있을까만 짜장 아무 준비를 하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출퇴근길 지하철과 버스에서 휴대전화 속 일본어 사전 앱을 꺼내 단어를 왼다든지, 휴일 낮 잘 알아듣지는 못해도 CNN과 NHK를 틀어놓고 멍청히 앉아 있기 따위.

3년쯤 후 지금의 일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됐을 때는 책장 한 귀퉁이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처박혀 있는 대학 시절의 독일어 교재를 다시 꺼내 들지도 모르겠다. 아, 하나만 더. 지난해부터 적금을 붓고 있다는 사실도 슬쩍 밝혀 두겠다.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같은 것에 선정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지금 내가 아내에게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노후 공약은 물론 ‘베를린에서 1년 살기’이다. 노년에 접어든 부부가 베를린의 낡은 아파트 부엌에서 호젓하게 마주 앉아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손을 맞잡고 거리를 함께 어슬렁거릴 수 있다면 이 또한 호사가 아니겠는가.

금요일이면 가끔 술타령을 벌이다가 휴일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구는 내게 아내가 바가지를 긁을 때, 나는 딱 한 마디만 한다. “베를린엔 안 가실 껴?” 그러면 아내는 눈을 흘기면서도 바가지를 슬며시 거두니 약발 좋은 방어무기 하나 장착한 셈이 아닌가.

글쎄, 아내에 대한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적금을 부어가며 지금의 일에 충실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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