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나무였다가 새였다가…

[기획연재]나의 버킷리스트⑤ 동길산(시인, 월간 '예술에의 초대' 편집위원장)

2019-09-28     시인 동길산
시인

나는 산골에 산다. 경남 고성 대가면 갈천리 산골짝이 내가 사는 곳이다. 1992년부터 살았으니 30년 가까이 된다. 처음 십몇 년 간은 한 달 내내 살았고 나중 십몇 년 간은 산골과 도시를 오가며 보름씩 살았고 지금은 한 달에 열흘 정도만 산골에서 지낸다.

열흘 정도 살아도 산골은 산골. 지인들은 여전히 나를 산골사람으로 생각한다. 이따금 만나면 산골의 풍광을 묻고 산골의 삶을 궁금해 한다. 30년 가까이 살아 이력이 날 대로 난 나는 무슨 질문이든 술술 대답한다. 미주알고주알 척척박사니 산골 도사라고 부르는 친구도 있다.

산골 도사! 듣기는 좋은데 종종 발목이 잡힌다. 산골생활이라면 모르는 게 없을 정도지만 그렇다고 마음마저 비우진 못한 탓이다. 시선은 도시로 가 있기 일쑤고 속된 욕망은 부글부글 끓어도 도사처럼 초연하게 지내는 척하려니 발목이 잡혀도 이만저만 잡힌 게 아니다.

산골 도사인들 욕망이 없을까. 맨날 얻어먹는 술자리가 미안해 술값 정도는 척척 낼 수 있을 만큼 돈이 있으면 싶고 때로는 로또방을 기웃대기도 한다. 거창한 문학상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내었다 하면 베스트셀러인 출판사에서 시집 내고 싶은 마음은 왜 없을까.

그러나 도사는 도사! 마음을 비운 척이라도 해야 나를 도사라고 불러준 지인에게 덜 미안하고 무엇보다 30년 가까이 나를 품어준 산골에 덜 미안하지 않겠는가. 술값 척척 내고 로또 당첨되고 베스트셀러 출판사 시집처럼 내 생애 이루기가 난망한 욕망 대신 도사라면 가능한 욕망도 어딘가에는 있지 싶었다.

나무, 새, 비. 마침내 내가 찾아낸 대상이었다. 도사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이룰 수 있지 싶었다. 도사인데 나무가 되고 새가 되고 비가 되고 하는 게 무어 어려울까 싶었다. 나무 앞에 삼십 분 서 있었고 몇 발짝 떨어져서 새를 보며 해 뜨기 전에 삼십 분, 해 지고 나서 삼십 분 서 있었다. 비가 오면 산골 마당에 서서 비를 맞았다.

새가 내는 소리를 알아듣고

새에게 말을 붙일 수 있다면

해 뜨기 전에 삼십 분

해 지고 나서 삼십 분

서서 있거나

앉아서 있거나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겠네

눈이 마주친 새가 마음을 놓을 때까지

나무처럼 있겠네

나무에 딸린 가지처럼 있겠네

참다가 참다가 삼십 분 다 돼서

목울대 다 보이게 말을 붙이는 새처럼

나도 목울대 다 보이며 말 붙이고 싶네

아침에 삼십 분 저녁에 삼십 분

새도 이상해서

두 눈 말똥말똥 뜨고 갸웃대는

사람 아닌 사람이 되고 싶네 

<동길산 시 ‘비인간’>

그리고, 당신이었다. 내가 가 닿고 싶은 대상은 나무였고 새였고 또 뭐였지만 그 모두가 가리키는 궁극은 당신이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며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당신! 그런 당신이나마 당신이 있었기에 나무는 잎을 틔우고 새는 소리를 내며 비는 오고 있었다.

당신은 궁극이었다. 그리고 적멸이었다. 욕망의 궁극이며 욕망의 적멸이 당신이었다. 당신에게 가 닿으려고, 마침내는 당신이 되려고 나는 나무에 다가갔고 새 앞에서 까닥하지 않았으며 비를 맞았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 모든 욕망의 끝에는 당신이 있다. 이 세상 모든 당신! 당신은 당신의 당신을 이루었는가. 당신의 당신이 되었는가.

그냥 비일 뿐인데

지나가는 비일 뿐인데

좀 젖었다고

소매 끝단을 접었다 펴고

살아는 있을까

이름 끝자를 접었다 펴고 

<동길산 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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