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사고파는 금은방 골목 안 '응팔 프리마켓'
때묻은 놋그릇 등 고색창연 상품 진열....노점상도, 찾는 사람도 모두 노장년층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다가 갑자기 1월 맹추위가 닥쳤다. 거리의 사람들 발걸음이 총총 빨라졌다. 부산의 귀금속 거리로 유명한 범천동 골드테마거리에도 추위가 왔다. 그런데 추위에 아랑곳 하지 않고, 아직 해가 중천에 뜨지 않은 오전부터 큰 짐을 등에 진 사람들이 금은방 골목으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 사람들은 두꺼운 파카와 마스크를 쓴 채 꽁꽁 언 땅에 돗자리를 펴고, 갖고 온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기 좋게 나열한다. 화려한 금은방 거리에 돗자리와 노점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모여든 사람들이 돗자리를 죽 펴니, 금은방 거리는 금방 노점거리로 바뀌었다. 이 노점들은 이름이 없다. 그러니 그냥 ‘이름 없는 프리마켓’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름 없는 프리마켓’이 신기하게도 금은방 거리를 막고 노점을 펼칠 수 있는 이유는 날마다 노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금은방이 쉬는 날만 생기기 때문이다. 오늘도 금은방이 쉬는 일요일이다. 50대 중반의 아저씨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보니, 수많은 돗자리가 온 거리에 펼쳐져 있고, 그 위에는 낡은 물건들이 놓여있다. 금은방 앞에 깔린 돗자리 위의 물건들은 빛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골동품들이 대종을 이룬다. 그러나 물건을 파는 아저씨들은 기죽은 얼굴이 아니었다.
프리마켓은 젊은 20대, 30대들이 중고품이나 자신들이 만든 물건을 사고파는 곳을 부르는 말이지만, 범천동 골목길의 ‘이름 없는 프리마켓’은 대부분 할아버지들이 일요일마다 자신들의 애장품이나 어디선가 구매한 중고품을 가져와서 장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 골드테마거리 주변은 중앙시장, 자유시장, 평화시장, 그리고 부산 진시장까지 4개의 거대 재래시장들이 밀접 돼있는 거대 상권지역이다. 그 역사는 수십 년이 훌쩍 넘는다. 현재 골드테마거리인 이 지점에는 30여 년 전부터 귀금속상들이 몰리면서 현재의 금은방 거리가 됐다. 그 금은방들 앞에 시계노점상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최근까지도 시계노점상들과 금은방들이 공존한다. 금은방이 문을 닫고 쉬는 날인 일요일에도 시계노점상들은 쉬지 않고 자리를 펼치는데, 이 지역 시장 일대를 전전하던 골동품을 파는 할아버지들이 한두 명씩 금은방 거리로 모여들어 시계노점상들과 같이 일요일에만 노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의 ‘이름 없는 프리마켓’이 생긴 것이다. 프리마켓은 생긴 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았다. 신생 노점이다.
돗자리에 펼쳐져 있는 물건을 살펴보니 신기한 물건도 많고, 오래된 물건도 많았다. 카메라, 화폐, 시계, 옷과 신발, 가방, 비디오, 각종 배터리, 오래되어 보이는 그릇과 장식품 등등 온갖 물건들이 다 있다.
‘이름 없는 프리마켓’에서 팔리는 물건의 특색은 오래된 것이라는 점이다. 오래된 놋그릇, 사기그릇, 백자와 같은 도자기도 많이 보였다. 여기가 조선시대 물건을 파는 곳인가 할 정도로 예스런 물건이 많았다. 또, 부산 남포동의 구제시장을 방불케 하는 중고 옷과 신발, 가방들이 돗자리에 쌓여있거나 옷걸이에 걸려 팔리고 있었다. 지금은 <응답하라 1988>에서 보이던 카세트와 카세트테이프, 비디오테이프, 필름카메라가 있고, 간간히 최신식 카메라나 2G폰과 스마트폰도 보인다.
한 손에 담배를 물고 약간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편하게 장사를 하고 있는 몇몇 할아버지들이 좌판을 지키고 있으니 젊은이들은 무섭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을 걸면 할아버지들은 대단히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주며 미소를 머금는다.
김모(75) 씨는 여러 고물상에서 얻어온 도자기와 옛날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그는 “매주 일요일에 여기서 물건을 팔려고 고물상을 돌면서 좋은 물건들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했다. 벨트와 배터리를 팔고 있는 이모(64) 씨는 “처음에 여러 시장을 돌면서 허리 벨트 장사를 했었다”며 “사람들이 이 골목 주변으로 많이 모여들면서 나도 같이 벨트도 팔고 배터리도 팔고 있다”고 말했다.
주로 신기한 화폐나 오래된 우리나라 돈을 액자에 넣어 팔고 있는 손모(57) 씨는 자신이 모은 화폐 애장품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애장품을 구하게 됐냐는 질문에 손 씨는 “서울에 있는 한국은행에서 새벽에 줄 서서 구한 돈이다. 집에 이런 화폐들이 엄청나게 쌓여있다. 다 팔면 또 구하러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름 없는 프리마켓’의 주손님 층은 물건을 파는 할아버지들과 비슷한 노년남성들이 대부분이다. 누가 상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구별가지 않을 정도로 비슷한 동년배의 남성들이 노점마다 둘러 쌓여있다.
범천동에서 사는 안모(26) 씨는 “매일 다니는 길에 언제부터인지 이런 물건을 팔기 시작해서 놀랐다”며 “지나가다가 물건들을 살펴보곤 하는데, 신기한 물건도 많아 구경할 만하다”라고 말했다. 금은방 가게를 찾아왔다가 사람들이 몰려 있기에 와봤다는 김모(46) 씨는 “이런 거리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며 “골동품 모으는 걸 좋아하는데 잘 찾아보고 하나 사서 집에 가져가야겠다”고 말했다.
이 거리를 자주 찾는 정모(51) 씨는 “보통 시장 같은데 가면 안 살거면 가라고 하는 상인들이 많은데, 여기는 물건을 사라고 강요당하지 않고, 눈치 볼 필요 없이 물건들을 충분히 볼 수 있다”며 “오는 손님마다 물건들이 어디서 왔는지 얘기를 들려주는 아저씨들 얘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말했다.
한쪽에서 시계를 팔고 있는 아저씨와 손님이 작은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손님은 “조금만 가격 깎아주세요”라고 말하고, 할아버지 상인은 “이거는 내가 진짜 어렵게 구한 거라서 안 돼”라고 응수한다. 긴 승강이가 벌어졌지만, 결국 상인이 지고, 손님은 깎은 가격으로 물건을 의기양양하게 들고 사라진다.
화려한 금은방 앞의 초라한 골동품 노점. 이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의 노점 거리에는 금은방에는 없는 것들이 넘쳐난다. 물건은 낡았지만 어렵게 구했다는 상인들의 자부심도 있고, 흥정보다 물건에 얽힌 스토리를 많이 나누는 소통이 있으며, 상인과 손님 간의 훈훈한 인정도 있다. 이곳은 이름도 없는 금은방 앞 골동품 노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