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서 남 주자!

2016-02-29     편집위원 장동범

비록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경계가 다소 애매하지만, 우리에게 네 계절이 있음은 다행이다. 특히 긴 겨울 끝에 봄이 옴에 사람들은 봄의 문턱에서, '입춘대길'이란 춘방(春榜)으로 오는 봄에는 뭔가 풋풋하고 좋은 일이 생기기를 은근히 바란다. 하지만 시절은 늘 수상해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고 그래서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어찌 아는가? 계절이 돌고 돌아 사노라면 좋은 날도 오리니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함을. 필자도 그 희망의 새봄과 함께 모든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는다. 언론인과 교수 등 대외적 직업을 떠나 평생 업인 시 쓰는 일과,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남편 역할 등 비로소 자연인으로 돌아가면서 새삼 ‘이것이 나라고 할 바 없는’ 제법무아의 이치를 실감하고 있다.

살 날보다 산 날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과거로 회귀하는가 보다. 요즘 들어 과거를 되새김질하면서 나름으로 주변을 정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 4년, 그리고 늦깎이 두 석사과정을 포함하면 21년을 어쨌든 공부하는 데 보낸 셈이다. 그 덕분일까. 직장생활하면서 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해 지난 학기까지 강단에 섰으니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teaching is learning)이라면 그 7년을 합쳐 내 나이 8세 이후부터 인생 절반을 공부하는 데 보냈다.

도대체 한국인들이 이렇게 매달리는 공부란 무엇일까? 나는 몇 해 전 안동 도산서원을 들러 퇴계 이황 선생이 생전에 지은 기숙사가 한자로 공(工)자 구조인 것을 눈여겨 본 적이 있다. 당시 유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잘 몰라 궁금해 하다가, 얼마 전 타계한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강의 <담론>을 읽어보며 비로소 알았다. 선생은 이 책에서 파자(破字) 법으로 공부를 설명하고 있는데 한자 ‘공’은 하늘을 땅으로 잇는다는 뜻이고, ‘부’(夫)는 하늘을 땅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사람(人)이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공부란 하늘의 이치를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알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공부는 여자(工)가 길쌈을 삼듯, 남자(夫)가 씨 뿌리듯 간곡해야 한다는 설명도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공부를 원론적으로 나열했지만, 왜 공부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나는 비교적 짧은 기간 대학 강단에 서면서 학생들이 왜 그토록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대학에 오는지, 또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는 학생이 얼마나 되는지 늘 궁금했다.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이 ‘남 따라 장에 가듯’ 대학가고, 적어도 대학을 나와야 한국사회에서 뒤쳐지지 않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도 할 수 있다는 극히 막연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강의시간 앞부분은 늘 나의 사회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대학생의 자세는 어떤 것이 돼야 하는지 인생 선배로서 ‘지루하지 않은’ 조언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 학생이 아닌 한국의 대학 교수들에게 주어진 공통 숙제는 가르친 학생들을 얼마나 많이 4대 보험이 보장되는 직장에 취업시키는가에 있다. 대학은 흔히 아는 진리를 추구하고, 학문을 연구하고, 인격을 닦는 상아탑의 큰 배움터가 아니라 직업 양성소나 취업을 알선하는 곳으로 변질되고 있다.

1998년 가을 무렵, 나는 아는 스님이 작품 전시회를 연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건너편에 ‘학교종이 땡 땡 땡’이란 이색 간판을 단 찻집이 있어 들른 적이 있다. 찻집에는 나의 옛날 초등학교 시절 짝지와 티격태격하며 연필깎이 칼로 경계선을 긋고 함께 썼던 초록색 책상에 키 낮은 나무 걸상들이 옹기종기 놓여있었고, 창문에는 시골학교 운동장 사진을 배경으로 추억을 자극하는 예전의 교실 모습 그대로였다. 난로 위에는 양은 도시락에 옛날 건빵이 들어있어 차와 함께 간식으로 먹을 수도 있었는데 칠판을 쳐다보다 깜짝 놀랐다. 흰 분필로 크게 쓴 교훈이 “배워서 남 주자!”였고, 그보다 작은 글씨의 급훈은 “음주운전 하지 말자!”였다. 복고풍의 찻집도 분위기에 어울렸지만 교훈과 급훈은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종업원에게 찻집 주인이 누군가 물어보니 1세대 개그맨이었던 전유성 씨의 전 부인이었고, 분위기 연출과 칠판 글씨는 전 씨의 아이디어였다고 했다. 이 찻집의 교훈은 그래서 오래오래 내 기억에 남았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1주일에 한 번 전교생을 모아놓고 운동장이나 강당에서 교장 선생님이 주로 훈시를 하셨는데, 내용이 ‘학고’(學苦), 즉 배우는 고통에 관한 것이 많았다. 또 담임이나 과목 선생님들은 “공부해서 남 주나? 자기 하지”를 되풀이하시며 3년 동안 죽기를 각오하고 공부하기를 독려했다.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 나와 출세하는 것을 으뜸의 가치로 여긴 당시의 현실인식에서, 우리는 친구를 경쟁자로 여기며 모의고사 성적순에 따른 서열화에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같은 의식화는 뒷날 동기생들 모임에서도 과거 학창시절 성적에 따른 호불호(好不好)로 이어지고 우리들의 2세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성보다 학력을 우선하는 줄 세우기 풍조가 만연한 것이다. 왜 공부해야 하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 없이 단순히 출세지향의 맹목적 공부는 성과주의 사회에서 우리를 황폐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었다.

70년대 나의 대학 생활은 권위주의 정권의 오로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경제 발전을 앞세우면서 민주주의가 후퇴하자 학생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유신방학으로 이어지며 자연 공부하는 분위기와 멀어졌다. 시조를 가르쳤던 교수는 나에게 공부를 계속할 것을 권했으나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해 결국 언론계로 직장을 구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언론도 앞서 나의 <시빅뉴스> 칼럼(“사람이 곧 하늘이다,” 2015년 11월 9일자)에서 지적했다시피 가장 기본적 역할도 하지 못하고 권력의 하수인 노릇하기에 바빴다. 언론 내부의 민주화와 함께 저널리즘의 진정한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공부가 간절했던 것도 이 때부터였다. 노조 활동과 더불어 틈틈이 독서도 했는데 그 가운데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의 자서전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서문에서 “나의 인생에 움직일 수 없는 세 가지 큰 명제가 있는데, 첫째가 사랑에 대한 동경이요, 둘째는 지식에 대한 탐구이며, 세 번째는 인류의 고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의 정”이라고 밝혔다. 안팎으로 답답했던 당시 상황에서 러셀의 좌우명은 나에게 상당한 울림을 주었으며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적어도 이 정도 인생 목표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묘한 결기 같은 게 생겼다.

아무튼 대학시절 제대로 공부도 못하고 졸업한 나로서 90년대 들어 직장생활이 안정되자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해서 교육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하고 99년에는 시인으로 뒤늦게 등단도 했다. 러셀의 좌우명 가운데 지식에 대한 탐구만큼은 노력하면 할 수 있겠다 싶어 2,000년대 들어 저널리즘 공부를 위해 대학원 석사과정을 또 밟았다. 그러나 공부도 때가 있는지라 나이 들어 하는 공부는 자연 힘이 들고 몸에 무리도 많이 따랐다. 그러나 그 덕분에 나는 대학 강단에서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언론사 퇴직 뒤에도 5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는 복을 누렸다. 이 같은 나의 학구열 때문인지 우리 집에는 아내를 비롯해 아들, 딸 등 4명이 모두 대학원을 나온 소위 ‘가방 끈 긴’ 가족이 되었다. “자식들에게 재산은 못 물려주더라도 저 공부하고 싶은 만큼 시키면 밥벌이는 할 수 있겠지”라는 믿음에서 나온 결과이다.

나는 10여 년 전, 몽골 남쪽 사막(으믄 고비) 천막에서 하루 밤을 보내면서 접시처럼 둥근 여름밤 하늘에 쏟아질 듯 초롱초롱한 별들을 바라보며 인간의 상상력이야 말로 빛보다 빨리 갈 수 있는 유일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불과 5세기 전까지만 해도 하늘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며, 지구는 장방형으로 바다 멀리 나가면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믿었다가 밤하늘을 끊임없이 관찰한 과학자들에 의해 오늘 날 우리가 문명인으로 살게 된 것이다. 호기심이야 말로 모든 학문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마틴 루터에 의해 이단으로 몰렸고, 조르다노 부르노는 악마로 낙인찍혀 화형에 처해졌으며,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다가 가까스로 살아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 다소 황당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식에 대한 탐구가 얼마나 놀라운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공부하면 공자를 빼놓을 수 없다. 오죽하면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배워서 때때로 익히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겠는가. 공자는 군자는 옮음(義)을 쫓아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소인배는 이익(利)을 쫓아 옮은 것을 버린다고 했다. 이 말을 우리 현실 사회에 비춰보면 학문적 양심을 버리고 여기서 이말 하고 저기서 저 말하며 권력에 부침하는 학자나 교수, 또 본분을 저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정치판을 넘나드는 언론인이나 법조인들은 어떠한가? 똑똑한 제자들을 데리고 춘추전국의 중원을 돌며 그의 이상을 정치로 실현하려 했던 공자도 결국 낙향 길에 강가에 앉아 “저처럼 흘러가는가. 밤낮으로 쉬지 않고”(<논어>, 자한편)라고 탄식하며 오로지 제자 가르치는 일에 남은 생을 바친다. 그는 나이 50에 교사라는 직업이 천명임을 알았다.

영재교육하면 공자지만 천하의 바보를 깨달음의 최고의 경지(아라한)에 올려놓은 붓다의 예도 빼놓을 수 없다. 붓다의 제자 가운데 스승의 말씀을 한 구절도 제대로 못 외우는 주리반특이란 바보가 있었다. 하루는 신자 집 공양 초대에 빠지게 된 주리반특이 울고 있자 사연을 안 붓다가 물었다. 네가 제일 잘 하는 일이 뭐냐고. 청소라고 답하자, 붓다는 주리반특이 걸레질할 때마다 제자들에게 “요조 사라랑! 요조 사라랑!”(떼를 닦아라, 떼를 닦아라)하고 다섯 글자를 외치라고 명했다. 마루를 부지런히 닦던 주리반특은 걸레질을 할 때마다 주위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았다. 깨끗했던 걸레는 더러워지고 대신 마루는 깨끗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음을.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제행무상의 진리를 터득한 것이다.

근래 아내와 얼굴 마주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지혜롭게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늙어가며 건강에 관한 걱정을 많이 한다. 개중에는 먹고 살만 한데 건강에 대한 걱정이 지나쳐 오히려 마음의 병을 키우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해주고 싶은 말이 “병을 양약으로 삼아라”(<보왕삼매경>)이다. 만물은 생기면 머물다가 허물어져 사라지고, 사람은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상식인데도 사람들은 이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장자>에서는 “저 대지는 몸을 주어 나를 싣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큰 스승편) 하지 않았는가?

이제 맺어야 할 때다. 나는 틈틈이 황령산 숲길을 걸으며 우리에게 자연의 쉼터인 푸른 산이 있듯, 저자거리 곳곳에도 숨은 스승과 달인들이 있음을 알았다. 얼마 전 전통시장 국수집에 들렀다가 화장실 벽에 붙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자!”라는 글귀를 보며 느낀 게 그 한 예이다. 그들에게 나는 앞으로도 계속 배울 것이다. 또 남은 시간 오랜 생명력을 지닌 옛글(고전)들을 두고두고 천천히 읽고 음미할 것이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글에서 배운 바가 있다면 그 느낌을 간혹 기록해 남길 것이다. 일찍이 로마 원로원에서 카이오 티투스는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남는다(Verba volant, scripta manent)”라 했다. 이 세상 모든 기록물들은 ‘배워서 남 주자!’의 실천에 다름 아니다. 앞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시를 쓸 수 있어 좋고, 끝으로 그동안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한 대학 강단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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