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정치판에 그래도 라일락꽃을 피우려면
정치: 주의 주장이라는 멋진 이름에 가려있는 이해관계의 충돌. 또는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운영하는 것.
선거운동: 연단에 서서 자기편은 빛의 아들이며, 상대편은 땅의 지렁이라고 외치는 것.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앰브로스 비어스가 1911년에 낸 <악마의 사전>이란 책에 나오는 단어 풀이들이다. 갖가지 단어를 그 원의와는 관계없이 빈정거리고 비트는 이 책은 그 풍자의 묘미 때문에 미국에선 개정을 거듭하며 지금까지 출판되고 있다. 그러나 비어스의 독설은 한국 땅에선 그 풍자의 맛을 상실하고 만다. 그의 뜻풀이는 우리에겐 풍자가 아닌, 바로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의 현실은 비어스의 독설보다도 훨씬 더 치열(?)하다.
내친 김에 몇 가지 더 소개하자. "어떤 운동의 선전에 이용되는 활동기 슬라이드.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에 버림을 당하고 만다." 이것은 무엇의 뜻풀이겠는가? 정답은 ‘개혁’이다. 비어스에 따르면, 주권자인 ‘국민’은 이렇게 추락한다. "법률 제정에서 무시해도 되는 요소. ‘국회’는 법률을 무효로 하기 위해서 모이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렇다면 오는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일은 "법률 제정에서 무시해도 되는 요소들이 법률을 무효로 하기 위해서 모이는 사람들의 집단"을 뽑는 날이란 걸까. 너무 씁쓸한 정의인가? 어쨌든 국민들의 정치 불신이 극점으로 치솟건 말건, 당장의 감투에 눈먼 정치인들의 이전투구를 신문으로, TV로 지켜보자니 비어스의 단어 풀이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또 어찌할까.
후보자의 됨됨이에 대한 평가도, 여론 지지도 여부도, 지난 의정 성적에 대한 고려도 없이 권력자와의 친소 관계가 유일한 잣대가 되고 만 집권 새누리당의 공천 작업은 지켜보는 것조차 어지럽다. 대통령에게 대들었다가 찍힌 인사라면 역적이라도 된 듯 씨를 말릴 기세가 아닌가. 그 밉보인 인사와 친하다는 이유로 공천에서 무더기로 탈락한 사람들은 또 무슨 꼴인지.
목을 치려면 곱게나 치지 공천 탈락조차 시켜주지 않은 채 질질 끌면서 “내 손으로 피를 묻히기는 싫으니 네 스스로 네 목을 쳐라”고 으르는 건 또 무슨 짓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내를 집에서 몰아내려는 사내가 “내가 조강지처를 쫒아냈다는 욕을 먹기 싫으니 네가 직접 이혼장에 도장 찍어 법원에 제출하라”고 강요하는 격이 아닌가.
그 와중에 집권당의 대표와 공천관리위원장이 서로 얼굴을 붉혀가며 ‘바보’라느니 뭐라니 듣기 민망한 언사를 쏟아낸다. ‘친박’이니, ‘비박’이니, ‘친유’니 해 가면서 정치적 성향이나 가치관이 아닌, 특정인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패당을 지어 치고받는 것이 21세기 집권당의 민낯인가 싶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렇다고 야당 꼴이 나은 것도 아니다. 불과 두어 달 전에 ‘친노 패권’이니 뭐니, 지지고 볶다가 한 지붕 밑에선 도저히 살지 못하겠다고 뛰쳐나갔던 이들은 요즘 무얼 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딴살림을 차려 나갔으면 보란 듯이 잘 살아야지, 그 집에서까지 의견이 갈려 옛 집에 돌아가자니, 안 된다니 실랑이를 벌인 게 엊그제 일이다.
야당의 큰집이랄 ‘더불어민주당’이 돌아가는 꼴도 하수상하긴 마찬가지다. 제 힘으로는 땅에 떨어진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어서 한때 박근혜 대통령의 책사였다가 버림 받아 앙앙불락하던 김종인 씨에게 비상대권까지 한 손에 쥐여 줘가며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자존심도,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네가 난장판으로 만든 제 집 뒷설거지를 남의 손에 맡긴 제1야당의 체모가 처량하다.
김종인 대표 역시 분란을 수습해 가면서 이른바 ‘친노’ 몇 사람을 쳐내며 공천 작업을 그럭저럭 지휘하는 것 같더니 다시 그릇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구원투수를 자처한다면 ‘투 아웃 만루’ 상황에서 타자를 삼진아웃 시키는 데나 열중할 일이지 이 와중에 자신을 비례대표 2번으로 ‘셀프 공천’하고 학맥으로 잘 아는 이들을 당선권에 전진배치한 건 무슨 심사인지 모르겠다. 이거야 원, 불난 집에 쭈그려 앉아 타다 남은 쌀알 주워 먹는 격이 아닌가.
감투싸움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요즘 정치판을 욕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터이니 이쯤에서 그치겠다. 그래도 그렇지, 여야를 막론하고, 독과점적 지위를 악용해 소비자에게 함량 미달의 상품을 내놓고 물건 사라고 배짱 내미는 악덕업자가 따로 없으니 국민들로선 분통이 터질 노릇이 아닌가. 소비자로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 중에 그래도 질이 덜 나쁜 상품을 고를 수밖엔 없으니 딱하다. 바로 그걸 믿고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을’이 거꾸로 ‘갑질’을 하고 있지 않나. “여당이고 야당이고, 기성이고 신인이고 다 그놈이 그놈”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이러니 투표일이 와도 심드렁할 수밖에. 국민들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투표하라고 권하기도 쑥스러울 지경이다.
그래도 말이다. 차선을, 아니 차악이라도 뽑는 게 선거 아닌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정당과 인물에게 정치를 맡겨야 그 수준만큼이라도 국민의 삶이, 정치의 수준이 나아진다. “그놈이 그놈”이란 ‘싸잡아 꾸짖기 화법’의 함정에 빠져선 안 될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국 사회를 두고 ‘헬 조선’이라 자조하는 젊은이들에게 권한다. 그래도 투표하라. 스스로 흙수저를 들었다고, 그래서 금수저에게 절망하는 청년들에게 권한다. 투표로 당신들의 분노를 표현하라.
대학 등록금이 바가지라고 생각한다면, 일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편의점과 식당 '알바'로 시드는 청춘이 부당하고 억울하다면 투표로 말하라. 투표하지 않으면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그대들의 고통과 울분을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정의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투표장에서 냉정하게 심판하라. 그래야 그들이 그대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한다. 투표하지 않는 자, 정치를 욕하지 말라. 알량하긴 해도 4월 13일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속의 주권자가 돼 보는 날이다. 납세와 병역의무를 지켜 얻어낸 주권이다. 날려버리기엔 아깝지 않은가. 찍어야 조금이라도 바뀌는 것이다.
4월이 오면 자주 인용되는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를 읊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겠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라일락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
과연 우리의 4월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꽃피우고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우는 계절이 될 수 있을까. 척박한 황무지를 갈아엎고 불임(不姙)의 땅에 씨앗을 뿌리는 희망의 계절이 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선거는 과거에 대한 심판이자 미래에 대한 선택이다. 국민은 지난 4년 동안 각 정파의 정치행위에 대한 잘잘못을 냉정히 심판해야 한다. 미래의 정치행위에 대한 약속을 꼼꼼히 살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쪽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엘리엇의 시구대로 우리의 4월은 ‘잔인한 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죽은 땅에서 라일락꽃을 피우는 사람은 그래도 우리 자신이어야 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