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의 경성만필(慶星漫筆)]10-노인과 여인
처음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방향으로 엇갈린다. 하나는 예술성을 강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측면을 고려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작품의 완성도와 배경에 문외한인 일반 관객들이 도달하는 논쟁의 종착점은 결국 ‘예술이냐, 포르노냐’로 모인다. 두 관점 모두 타당성이 있다.
늙은이와 젊은 여인의 부적절한 관계를 예술로서 슬쩍 가린 포르노!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이 그림 앞에 선 부모의 대다수가 이렇게 외칠는지 모른다. 비난에 감정이 보태지면, 작품의 가치 같은 것은 아예 밀쳐버린다. 반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더 다가서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그림은 한동안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 작품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하자면 뭘 나타내려 한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 열쇠가 노인의 손발과 여인의 표정에 있다. 노인의 손발은 묶여 있고, 그를 위해 열어 놓은 여인의 젖가슴과 약간 고개 돌린 얼굴을 보자. 어느 곳에도 쾌락이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상황은 절박함이다. 그러나 여기 등장한 두 사람에게서는 전혀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화가의 천재성이 만들어 낸 역설적 표현일까. 이 작품의 독특한 예술성은 노인과 여인의 표정 이면에 숨어 있는 비사(秘史)와 연결된다.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민주를 위해 한평생을 바친 투사였다는 둥,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던 독립영웅이었다는 둥, 근거 없는 얘기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던 그림 속의 노인은 ‘시몬(Cimon)’이라는 고대 로마의 사형수였고, 여인은 그의 딸 ‘페로(Pero)’이다.
형벌은 죽는 순간까지 물 한 모금 주지 않는 가장 잔인한 것이었다. 손발이 묶인 채 캄캄한 지하감옥에 갇혀 죽어가는 죄수에게 마지막 순간 면회가 허락되었다. 갓 출산한 딸이 감옥에 들어섰을 때, 바닥에는 바싹 말라 죽어가는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녀는 아버지를 알아보았고, 거기서 통념을 뛰어넘은 ‘헌신과 사랑’이 베풀어졌던 것이다.
서기 30년경, 로마의 사학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Valerius Maximus)’는 페로(Pero)의 헌신이야말로 ‘가장 고결하고 숭고한 효도의 예’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해서 16∼18C에 걸쳐 유럽의 많은 화가들이 상상의 화폭을 펼쳤고, 이 그림은 루벤스의 것이다.
위의 그림을 보는 눈처럼, 흔히 사람들은 감정에 치우쳐서 사물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칼을 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다 위험인물은 아니지 않은가. 강도도 있고, 요리사도 있고, 의사도 있다. 말의 이면에, 행동의 이면에 숨어 있는, 때로는 도저히 나타낼 수 없는 진실을 안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경험과 사유의 폭을 넓히고, 이성적 판단을 해야만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사회병리현상에 대한 진단도 다르지 않다.
모르고 보면 음란물일 수도 있는 저 그림의 뒤에는 ‘천륜을 향한 애끓는 사랑’이 있었고, 그것을 꿰뚫어 본 ‘역사가의 눈’이 있었고, 예술로 승화 시킨 ‘화가들의 상상력’이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을 높이 평가한 ‘미술관 측의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도 암스테르담의 미술관에서 아름다운 젖가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