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시집이 내 손에… 복각본 초판 시집 열풍

<진달래꽃>,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사슴> 등 SNS 타고 베스트셀러 올라

2016-04-07     취재기자 안지혜, 안정호
최근 영화 <동주>를 보고난 뒤 오보영(27, 부산시 남구) 씨는 인터넷 서점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집 초판본을 복간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구입했다. 시집 초판본 복간이란 당대에 ‘처음으로 나온 책’을 원본과 똑같이 재출판하는 것을 말한다. 오 씨는 “이미 윤동주 시집을 가지고 있지만 새롭게 나온 초판본을 보자마자 주문하고 싶었다” 며 “겉표지부터 아날로그 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고 했다. 실제로 윤동주 시인의 초판본 복간 시집 겉표지는 세련되진 않지만, 1940~50년대를 느끼도록 투박하게 디자인되어있다. 초판본의 표기는 물론 활자까지 복원해낸 복각본(復刻本·원형 그대로 살려낸 인쇄물)이 최근 큰 인기다. 특히 윤동주, 김소월, 백석 시인의 초판 복각본이 베스트셀러에 자리해 화제다. 소와다리 출판사를 시작으로 그여름, 파란책, 지식인하우스, 더스토리 등 많은 출판사들이 시집 초판본 경쟁을 벌이고 있다.
초판 복각본의 열풍은 출판사 소와다리가 지난해 11월 출간한 <진달래꽃>에서 시작됐다. 지난해 12월 20일 김소월 시집 초판본이 경매 최고가인 1억 3,500만원에 낙찰되면서 <진달래꽃>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복각 출판된 <진달래꽃>은 한 달 만에 인터넷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영화 <동주>의 개봉과 함께 두 달 새 5만 부 이상이 팔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정지용 시인의 <정지용 시집>과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도 20위 안에 들어가 있다. 또 1936년에 100부 한정으로 출간된 백석 시집을 그대로 재현한 <사슴>은 예약 하루 만에 2,500부가 팔리는 등 출간과 동시에 큰 인기를 끌었다. 지금까지 <진달래꽃>은 10만 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5만 부, <사슴>은 2만 5000부, 최근에 나온 한용운 시인 <님의침묵>이 4,000부 정도 판매됐다. 초판본 복각 시집이 인기를 끄는 데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퍼진 입소문이 큰 역할을 했다. 출판사 소와다리에 의하면 독자의 절반 정도가 20~30대다. 처음에는 20대 여성독자가 주 고객이었지만 지금은 남녀 성비가 비슷해져 여성과 남성이 6:4 정도의 비율로 복각본을 찾고 있다. 이렇게 젊은 독자들 중에서는 SNS를 보고 책을 구매한 이들이 많았다. SNS 인스타그램에서 ‘초판본’을 검색하면 3,000여 개의 게시물이 검색되는데, 대부분이 초판 복각본을 직접 찍어 올린 인증 사진들이다.
SNS를 통해 복각본을 접하게 된 회사원 정현주(29) 씨는 <진달래꽃>을 시작으로 연이어 나온 초판본들을 모두 소장했다. 그는 인스타그램에서 소와다리 출판사의 사진을 보고 초판본을 처음 알게 됐다. 이어 제일 좋아하는 김소월 시인 초판본 구매를 시작으로 연이어 여러 권을 구매했다. 그는 “세로쓰기나 한자표기 등 현재와는 다른 표기방식 때문에 가독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소장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 다른 초판본이 나온다면 또 구매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대학생 이은영(25) 씨 역시 복각본을 소장 중이다. 김소월 시인을 좋아한다는 그가 처음 구매한 복각본은 초판본 <진달래꽃>이다. 그는 초판본이 아니라 현대어로 번역된 시집이었다면 아마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초판본에 대해 “진달래꽃 시집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책 표지 진달래'꽃'의 표기를 보고 가슴이 찡했다. 표기법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다.”라고 말했다. 저작권 보호 기간이 만료돼 자유롭게 펴낼 수 있는 책들은 출판시장에서 경쟁이 심하다. 소와다리 출판사 김동근(39) 대표는 다른 책들과 차별화를 둘 방법을 고안하다가 책의 처음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생각에 초판 복각본 출간을 기획하게 됐다.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시작한 것이 입소문만으로 큰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시중에는 초판본 외의 모습으로도 다시 펴낸 시집들이 많다. 하지만 독자들이 유독 초판 복각본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 대표는 단순히 책을 읽으면서 얻는 재미도 있지만 책꽂이에 꽂아 모으는 재미, 즉 책을 소장함으로 느끼는 만족감도 중요한 이유로 꼽았다. 그는 “식민지 시절 활동했던 문학가 중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시집은 거의 다 냈다. 앞으로 ‘임화’시인의 시집과 ‘이상’시인의 시집·소설 등 2~3권 정도를 더 내고 근대시집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재밌는 컨셉으로 독자들을 찾아뵙겠다”고 전했다. 이런 초판본 열풍에 대해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황병익 교수는 초판본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대중의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문학잡지든 작품이든 제일 처음 나온 작품을 선호하기 때문에 헌책방(중고서점)에서는 초판본이 매우 비싼 값에 팔리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비싸도 찾는 사람이 있을 만큼 희소가치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925년 중앙서림이 발간한 초판본 진달래꽃은 1억 3,500만 원이라는 가격에 낙찰됐다. 귀한 작품들을 그때 그 모습으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므로 대중들은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그는 책의 구성품에도 주목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시집은 육필 원고까지 부록으로 구할 수 있으므로 대중들은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구입하면 3주기 초판본과 10주기 증보판, 또 육필원고를 받을 수 있고, 김소월의 시집 <초판본 진달래꽃>을 구입하면 1940년대에 직접 소포를 보낸 형식으로 책이 배달된다. 출판사는 이를 ‘경성에서 온 소포 패키지’라 부른다 황 교수는 “앞으로도 이육사 시인 등 인지도 있는 시인의 작품집을 출판 기획하면 그에 버금가는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