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 칼럼] 훈아 형! 부산이 왜 이래?
추석 때 나훈아가 남긴 강한 여운 '신드롬'으로 이어져 부산 초량 출신 수퍼스타, 거리낌없이 부산 사투리 구사 풀리지 않는 지역 숙제, '훈아 형'에게 물어보고 싶어 동구청 '나훈아 거리' 추진... '나훈아의 꿈' 이상 담아야 성공
아직도 귓전에 ‘아~ 테스형!’하고 외치는 매혹적인 목소리가 맴돈다. 신들린 듯 뽑아내는 트로트(뽕짝) 메들리. 기분 좋을 때 젓가락을 두들기며 노래한 우리 민족의 피에 ‘뽕짝’이 흐른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대중가수.
추석때 나훈아가 남긴 여진이 크고 깊다. TV에 15년만에 홀연히 나타나 <나훈아 콘서트: 대한민국 어게인>을 펼친 뒤, 홀연히 사라져버린 슈퍼스타. 공연이 너무 강렬했음인가. 그가 TV에서 사라졌는데도, 대중과 매체들이 계속 나훈아를 찾고 있다. 정치 실종시대, 나훈아의 민심처방, 즉 그의 거침없는 발언이 사이다가 됐던 것일까. '나훈아 현상(신드롬)’이다. 이쯤되면 분석해 봐야 한다.
#나훈아 신드롬
나훈아 노래에는 정한(情恨)이 있다. 한민족의 정과 한이다. 그의 노래는 고향, 사랑, 인생으로 불려지고, 청춘, 이별, 분단, 아리랑, 꿈, 우리 것 등으로 변주된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삶의 희노애락이 씻겨 ‘흘러간다’는 느낌에 휩싸인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
나훈아는 여전히 펄떡거리는 청춘이었다. 74세, 그의 나이는 세월의 주름이 아니라, 연륜을 말해주는 눈부신 나이테였다. 그는 2시간 40분 동안 약 30곡을 쉼없이 불러재꼈다. 그러면서도 음정, 가사, 리듬, 박자 어디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무대 스케일은 웅장했고 디테일은 치밀했다. 1000곳을 온라인으로 연결한 비대면 무대미술은 ‘매지컬’했다. 나훈아의 감성과 흡인력은 더 짙어지고 강해져 있었다.
신곡 <테스형!>은 나훈아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 노래였다. <테스형!>은 2400년 전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불러와 대화하듯 현 코로나 시국의 답답함을 호소하고 길을 묻는 노래다. 도발적이고 철학적이며 창의적이다. 이 노래는 지금 유튜브는 물론 멜론차트 등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부산말 쓰는 슈퍼스타
‘나훈아 현상’의 출발지는 부산이다. 나훈아는 드물게 경상도(부산) 사투리를 쓰는 대중스타다. <대한민국 어게인> 초반에 나훈아가 정감있게 인사말을 한다.
“오늘 같은 (비대면)공연은 태어나서 처음해 봅미더. 우리는 지금 벨의 벨꼴(온갖 것)을 다보고 있심더. ‘오랜만입니더’ 하면서 손도 잡아보고, 뭐가 좀 뷔야(보여야) 뭘 하지. 아이고 우짜면 좋겠노…. 여러분 응원만 있으면 오늘 저녁 할 거는 천지빼까리니까 밤새도록 할 수 있슴미더. 자, 함 가볼까예.”
‘천지삐까리’는 ‘많다’는 뜻의 부산 사투리다. 부산사람들은 바로 알아듣지만, 타지 사람은 이해못할 수도 있다. 나훈아는 시종일관 부산말로 공연을 진행했다. 직설적이고 친근한 입담은 그의 공연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나훈아의 고향은 이렇게 가까이 있지만, 부산은 나훈아를 가까이 하지도, 살갑게 맞지도 않았다. 부산 KBS홀 등에서 공연을 할 때도 먼 데 보낸 자식보듯 했다.
나훈아(羅勳兒)는 1947년 2월 11일 부산 동구 초량2동에서 아버지 최영석과 어머니 홍성염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최홍기(崔弘基), 본관은 해주 최씨다. 아버지는 무역선의 마도로스였다. 덕분에 나훈아는 유복하게 자랐다.
나훈아는 부산 초량초등학교와 대동중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노래를 좋아해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기타를 즐겨 쳤고, 피아노도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경. 서라벌예고에 들어간 나훈아는 고2 때 작곡가 심형섭의 눈에 띄어 가수의 길을 걷는다.
아들이 느닷없이 노래한다고 하자 아버지는 펄쩍 뛰었다고 한다. “뭐? 딴따라를 해?”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나훈아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말도 전해진다. 나훈아는 지금도 1년에 몇 번씩 ‘제비꽃이 피어 있는’ 아버지 산소에 가서 울고 온다고 한다. <테스형!>에 그 사연이 일부 나와 있다.
#쇼맨십과 공감력
<천리길>로 데뷔한 나훈아는 지금까지 800여 곡의 자작곡을 포함, 2600여 곡을 불렀고, 200여 장의 앨범을 냈으며, 그 중 120여 곡을 히트시켰다.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대기록이다. 그를 빼고는 한국대중음악사를 온전히 이야기할 수 없다.
나훈아 콘서트는 늘 인산인해다. 그의 콘서트 티켓은 5분만에 매진된다. 슈퍼스타 아이돌 저리 가라다. 그에겐 몇가지 공연 원칙이 있다. 약속을 지키고(최상의 무대), 진실해야 하며(관객과의 진솔한 소통), 꿈을 판다(상상력과 공감)는 것이다. 그의 시선과 몸짓은 대중을 향해 있다.
이런 일화가 있다. 국내 모 재벌가에서 연회를 하는데, 나훈아가 초청을 받았다. 세 곡에 3000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나훈아는 거절했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당장 표를 끊어 공연장으로 오라.”
나훈아는 싱어송라이터다. 그의 가사는 쉽다. 쉬우면서 정곡을 찌른다. 미사여구도 없지만 의미가 단단하다. 이게 실은 어려운 경지다. 다음 노래 가사를 보자.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왜 이렇게 힘들어" <테스형!>
"아무도 찾지않는 바람부는 언덕에/이름모를 잡초야/한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 텐데/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발이라도 있으면은 님 찾아갈 텐데/손이라도 있으면은 님 부를 텐데…" <잡초>
"이미 와버린 이별인데 슬퍼도 울지 말아요/이미 때늦은 이별인데 미련은 두지 말아요…" <무시로>
누구나 쉽게 쓰는 일상어로 복잡한 세상사를 명쾌하게 풀어낸다. 대중가요 연구자인 단국대 장유정 교수는 트로트 가수 중 최고의 남자 작사가로 나훈아를 꼽는다. 나훈아는 사람들이 생각지 못하는 걸 노랫말로 쓴다. <잡초>, <땡벌>, <홍시>, <테스형>이 그렇다. ‘수시로’라는 뜻의 <무시로>도 감각적 단어 선택이다. 이 개념들이 인생사로 치환된다. 놀라운 일상의 감수성이자 공감력이다.
#나훈아의 자유와 꿈
누구나 꿈을 이야기하지만, 나훈아의 꿈은 실체적이다. “가수는 꿈을 파는 사람이다. 상상하고 꿈을 꾸면서 최상의 무대를 꾸민다. 나는 공연을 똑같이 해본 적이 없다. 멋진 아이디어를 찾아 그것을 현실화시킨다. 꿈이 발목을 잡을 땐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의 공백기를 그는 고갈된 꿈을 충전하는 시기로 설명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끝없이 연습하고 공부한다. <대한민국 어게인>에서 선보인 대형 선박 무대는 나훈아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합창단 250명을 태운 배가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는 콘셉트였는데, 코로나 사태가 그걸 막았다는 후문이다.
나훈아는 자유로운 영혼, ‘자유혼’의 소유자다. 그에게 자유는 관념이 아니라 철학이다. 자유를 위해 훈장도 사양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세월의 무게가 무겁고 가수라는 직업도 무거운데 어떻게 훈장까지 달고 살겠나”라고 말한다. 나훈아의 힘과 자신감은 이런 데서 배양되고 분출되는 것 같다.
1987년 그가 만든 <엄니>는 전라도 사투리로 불렀다. 5·18 광주항쟁 희생자를 기리고 유족을 위로한 노래였다. 정권의 탄압으로 수난을 겪었지만, 나훈아는 다시 <엄니>를 부른다. 나훈아가 거리낌없이 부산사투리를 구사하는 배경도 이런 ‘자유혼’과 자신감에 있지 않을까. 나훈아는 어떤 운명, 어떤 난관에도 기죽지 않는다. 어쩌면 현실보다는 노래 속의 꿈들이 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지금 우리 현실은 너무 힘들고 피곤하다.
부산을 보자. 잘 하라고 정권 교체해 준 시장은 성추행 사건으로 몰락했다. 인재는 계속 빠져나가고 아이를 낳지않아 내일이 실로 두렵다. 최대 지역 현안인 신공항 문제는 20여년째 ‘논란 중’이다. 부산 출신 대통령이 공약한 사업이건만 가타부타 말이 없다. 지역 국회의원들조차 생각이 다르고 셈법이 복잡한 상황이다. 시민들은 언제까지 희망고문을 당하고 있어야 하나. 솔직히 물어보고 싶다. “훈아형! 세상이 왜 저래? 부산은 또 왜 이래?”
칼럼 쓰는 와중에 뉴스 하나가 떴다. 부산 동구 초량천 일대에 ‘나훈아 거리’가 생긴다는 핫한 뉴스다. 동구청은 부산시와 예산 협의 중이며 나훈아 팬들의 의견을 반영해 새로운 관광명소로 꾸밀 것이라고 한다. 일단 반가운 소식이다. 다만, 적당하게 하려면 안하는 게 낫다. 시시한 콘텐츠, 허접한 아이템으로 국보급 ‘자유혼’을 어지럽게 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나훈아는 부산이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의 ‘꿈꾸는' 예인이다. ‘나훈아 거리’엔 나훈아의 꿈 이상을 구현하는 꿈이 파도 쳐야 한다. 팬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나훈아의 스케일과 디테일에 맞추는 '나훈아 거리'라야 성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