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참 아름답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 때 이 시를 가르치셨던 국어 선생님은 이 시처럼 꽃도 사람도 남이 이름을 불러줘야 비로소 이 세상에서 의미가 생긴다고 해석해 주셨다. 아무도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 의미 없는 존재라는 게 이 시가 우리에게 주는 상징이고, 그래서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사물이나 생명체가 다른 것과 구분되는 "인식의 매개체"이자 수단이라고 평론가들은 김춘수 시인의 <꽃>이 주는 메시지를 해석한다.
내가 들은 얘기 중에는 1970년대 한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학년 초 며칠 만에 출석부를 다 외워서 출석을 불렀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 분은 학기 초 조회 때 출석부를 펴지도 않고 학생들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면서 출석을 불렀다고 한다. 학생들은 눈이 휘둥그레 커져서 선생님의 학생 이름 외워서 부르기 묘기에 놀라기도 했고, 사랑을 듬뿍 느끼기도 했으며,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자신들이 모두 선생님의 꽃이 된 기분을 가졌다고 한다.
선생이 돼서 강단에 선 나는 그 에피소드에 나오는 선생님의 노하우와 정성을 요샛말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나는 학기 초 출석을 부를 때 출석부에 깨알같이 개별 학생들의 외모 특징을 적는다. “머리카락이 노란 여학생,” “구릿빛 피부의 남학생,” “검은 색상의 동그란 플라스틱 안경테를 쓴 여학생” 등으로 적은 후, 다음 시간에 출석을 부를 때는 출석부에 적힌 학생의 특징을 따라서 실제 학생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그 학생의 얼굴을 쳐다보고 시선을 마주치면서 이름을 부른다. 전공과목 수강생들이야 얼굴을 대강 아니 굳이 이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지만, 전공과목의 타과 학생들이나 교양 과목 수강생들은 한 달 남짓 동안 이런 별도의 이름 외우기 품이 든다. 교양 과목 수강생들은 내가 이런 식으로 본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주면 놀라는 것 같으면서도 무척 좋아했다. 그들이 나의 시선 마주치고 이름 부르기로부터 꽃이 되었다는 행복감을 느꼈다면, 나 역시 행복할 것이다. 상하 관계든, 수평 관계든, 이름을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인간관계의 시작이다. 이름 아는 것은 인간관계의 힘이며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기본이다.
나는 지금 박시현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얻은 첫 이름은 박은주였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첫 딸이어서 이름 짓는 데 정성을 많이 기울였다. 부모님이 옥편을 찾아 고심한 끝에 지은 이름이 박은주였고, 나는 그 이름으로 30여 년을 살았다. 그러나 방송인 생활을 접고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을 때, 나는 무언가 삶의 전기를 맞고 싶었고, 남들로부터 이름마저 달리 불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개명하기로 결정하고, 용하다는 작명소에서 받아든 이름이 베풀 시(施), 밝을 현(炫)이었다. 새 이름 덕분인지, 새 이름에 걸맞게 살려고 노력한 탓인지, 나는 학생들과 지식을 나누고 있고, 점자 도서관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봉사 활동을 통해서 내 목소리 능력을 장애인들과 나누고 있다. 새로운 이름이 내 삶에 남에게 베푸는 가치와 의욕을 준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후, 나는 또 하나의 새 이름을 얻었다. 지난 2010년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되면서, 나는 또 새로운 생명과 이름을 얻었다. 그 이름은 ‘가브리엘라’다.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는 유아세례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이 가능한 나이에 세례를 받는 경우, 가톨릭에서는 자신이 닮고 싶은 성인의 이름으로 자신의 세례명을 정할 수 있다. 보통 많이 알려진 성인의 이름을 따거나, 자신의 생일과 같은 축일(성인을 공경하기 위해 특별히 정한 날)을 갖는 성인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세례명을 정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베풀 시, 밝을 현이라는 내 이름과 연관성이 있는 세례명을 찾았다. 남에게 많이 베풀어서 사회를 기쁘게 하고 싶은 의미를 담은 세례명을 갖고 싶었다. 그 결과, 나는 마리아에게 수태의 기쁜 소식을 전한 대천사(천사 중 특별한 사명을 가진 천사) 가브리엘을 발견했고 가브리엘의 여성명인 가브리엘라를 세례명으로 정했다.
불러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사람 이름만이 아니다. 지명도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많다. 서울 강남구의 테헤란로는 지난 1967년 서울과 이란이 자매결연을 맺어 붙여진 도로 이름이며, 박근혜 대통령이 이란을 방문하면서 그런 지명이 붙은 연유가 화제가 됐다. 그런데 최근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자가 서울을 방문했다. 이란과 경쟁 관계에 있는 사우디가 다소 소외감을 느꼈는지, 자국의 입지를 이란처럼 서울 쪽에 부각시킬 필요성을 인지하고, 마포대로의 명칭을 사우디의 수도인 리야드를 따서 리야드로(路)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사우디가 마포대교를 개명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사우디 거대 석유회사인 아람코가 대주주인 S-오일 본사가 그 곳에 있기 때문이란다. 국가 간에도 이름 부르기가 존재를 부각시키는 수단인 모양이다.
최근 영화 <곡성(哭聲)>이 흥행 몰이를 하고 있다. 그러자 <곡성>과 같은 이름을 가진 전남의 곡성군(谷城郡)도 덩달아 화제다. 영화 개봉 전에 곡성군이 영화 <곡성>의 무대라는 오해를 줄 수 있다는 논란이 곡성군 내부에서 일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제작사 측은 영화 <곡성>의 표기 시에 꼭 한자를 병기하기로 했고, 영화 속에 “본 영화는 실제 곡성 지역과 관련 없다”는 자막을 삽입했다고 한다.
그래도 곡성군 내부에서 우려의 의견이 줄지 않자, 유근기 곡성 군수가 지방 신문에 <곡성(哭聲)과 다른 곡성(谷城) 이야기>란 글을 실었다
(//www.jnilbo.com/read.php3?no=495333&read_temp=20160422§ion=63 ).
그 글은 여느 시인이나 수필가도 곡성(哭聲)을 내고 물러 갈 만큼 명문(名文)이었으며, 곡성 지역 주민의 우려를 일시에 잠재운 것은 물론, 누리꾼들은 위기를 여유와 인간적 미문(美文)으로 승화시킨 훌륭한 지도자를 칭송했으며, 온갖 언론들은 유근기 군수의 이름을 높이 부르고 있다. 그의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중략)
오히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군을 찾아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초록잎의 발랄함과 갈맷빛 사철나무의 들뜨지 않는 엄정함에 감탄할 수 있다면 우리 곡성에 올 자격이 충분하다. 유리창에 낀 성에를 지워가며 그리웠던 사람들을 그려본 사람이라면 곡성에 와야 한다.
(중략)
곡성(谷城).' 50여 년간 부르는 이름이지만 여전히 촌스럽다. 우리네 부모들의 골짜기 같은 주름을 옛날처럼 닮았다.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이름이 투박하다. 그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이라면 태어난 곳과 상관없이 곡성은 누구에게나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행여 '영화 곡성(哭聲)'을 보고 공포가 주는 즐거움을 느낀 분이라면 꼭 '우리 곡성(谷城)'에 오셔서 따뜻함이 주는 즐거움 한 자락이라도 담아갔으면 좋겠다.”
이 글은 곡성이란 지역의 이름이 진정한 ‘꽃’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도록 했다. 아무리 영화 <곡성(哭聲)>이 곡하는 소리를 내도, 곡성군(谷城郡)은 그 이름을 전 국민들로부터 기억되게 한 지도자 한 명 때문에 영원히 “따뜻한 즐거움 한 자락”을 주는 이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