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칼럼]불유쾌함을 기분좋게 전환시키는 미감
미(美)~여(女)~문(文)/Amenity, Feminism and Lifeway ㊶ / 칼럼니스트 박기철
피사에서 친퀘테레로 이동하다가 황당한 일을 당했다. 당당히 기차표를 사고 탔는데 타기 전 기차표에 구멍을 뚫지 않고 탔기에 벌금 5유로를 더 내야 한단다. 황당한 일이었다. 검표원은 동양인 승객들에게 이런 일이 많다며 뭐라 큰소리로 떠든다. 벌금을 내지 않으려면 내려서 천공기穿孔機에 기차표를 대서 구멍을 뚫고 다음 열차를 타란다. 뭐 이런 웃기는 경우가 다 있는지 불평해도 하는 수 없었다. 다음 역에 내려서 한 시간 동안 기다리며 그리 해야 했다.
사실 역마다 구멍 뚫어주는 기계인 천공기는 여기저기 있었다. 도대체 저게 뭐에 쓰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오늘 그 기계의 존재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승차권을 확인validation하는 기계였다. 하루 동안에 아무 시간, 아무 좌석에나 타면 1회 유효한 기차표인 경우에 승차권에 구멍이 안뚫려 있으면 다른 날에도 탈 수 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천공기를 역마다 둔 것이다. 이 기계가 있기 전에는 검표원이 아이스크림 스푼 모양의 가위처럼 생긴 걸 가지고 승차권에 구멍을 뚫었을 것이다. 하지만 검표원 숫자를 줄여 인건비를 줄이려고 저 검표용 천공기를 설치하였을 줄로 안다. 일순간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란 책이 떠올랐다. 이 책의 저자는 인건비를 줄이려고 소비자들로 하여금 셀프식으로 그림자 노동을 하게 한단다. 이런 일이 일시적으로는 효율적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말한다. 설마 그럴 정도까지 될 것인지 의아하다가도 가만히 생각하면 그럴 듯한 주장이다. 검표원이 하면 될 일을 내가 직접 승차권을 천공기에 대고 구멍을 뚫는 것이 검표원인 인간과의 교류를 줄이고 천공기인 기계와 상대해야 하는 일을 늘리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아주 많은 경우에 셀프로 기계와 마주하며 이런 그림자 노동을 매일매번 하며 살아야 할 수 밖에 없는 시대다. 그런 일들이 마구 늘어가는 세상이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구멍뚫기를 한 다음 구멍뚫린 승차권을 가지고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내렸다. 다섯 개의 땅Cinque Terre이라는 지중해 해안가 다섯 마을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그 중 한 마을에 들르니 마을 어르신께서 해안가에 나와 신문을 한참동안 읽고 계시다. 거의 몰입flow 수준이다. 그 모습이 왜 이리도 평안하고 미감있게 느껴지는지 승차권 천공 때문에 불유쾌했던 기분이 좋아졌다. 미감이라는 것은 불편한 사람 마음마저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려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