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6ㆍ25 전쟁영웅'에 김용하, '독립운동가'에 이종호 김학만 최봉준 선정
김용하 소령, 6.25전쟁 당시 '이화령 전투'에서 중화기중대장으로 장렬히 전사 이종호 김학만 최봉준 선생은 연해주에서 '권업회' 결성해 항일구국운동 펼쳐
12월 6ㆍ25 전쟁영웅에 김용하 육군 소령이, 독립운동가에는 연해주 항일단체인 ‘권업회’를 주도한 이종호, 김학만, 최봉준 선생이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매달 6ㆍ25 전쟁과 일제강점기 시절 당시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리고 알리기 위해 그달의 6ㆍ25 전쟁영웅과 독립운동가를 선정해오고 있다.
'이화령 전투'에서 북한군 남진 저지하다 전사한 김용하 육군 소령
김용하 소령은 1950년 7월 13일부터 7월 16일까지 적 제2군단 예하 제1사단의 남진을 저지시킨 ‘이화령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 2연대 1대대 중화기중대장의 역할을 맡아 주력의 철수를 끝까지 엄호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이화령 전투’는 전략적 요충지인 문경시의 이화령을 두고 적과 벌인 전투였다. 이 지역을 뺏기면 방어선을 낙동강까지 물려야 했기에 '이화령 전투'는 전략상 매우 중요했다.
이화령 방어를 담당했던 당시 김용하 대위의 제2연대는 북한군의 공격에 진지를 뺏긴 후 역습으로 진지를 탈환했으나, 또다시 적의 공격으로 철수를 단행했다. 이때 제1대대장 박노규 중령은 김용하 중화기중대장에게 화력으로 아군 주력의 철수를 엄호할 것을 명령했고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던 김용하 대위는 쏟아지는 적 포탄의 파편을 맞고 그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김용하 소령은 1926년 11월 29일 경상북도 경주 출생이다.
이에 정부에서는 김용하 대위의 헌신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1950년 12월 30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러시아 연해주 항일단체 '권업회' 결성한 이종호·김학만·최봉준 선생
이종호, 김학만, 최봉준 이 세 명의 선생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 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결성해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을 펼쳤다.
권업회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자 ‘한인에게 실업을 장려한다’는 명분의 경제단체로 창립됐으나, 실제로는 러시아 지역의 한인들을 결집해 ‘조국 독립’을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항일 구국단체였고 당시 러시아 당국의 지지도 얻었다.
특히 권업회의 기관지인 ‘권업신문’은 항일 민족언론으로 권업회 지회와 분사무소를 통해 연해주 곳곳의 한인 마을까지 보급돼 연해주 거주 동포의 애국정신 및 민족의식 고취에 큰 역할을 했다.
이종호 선생은 권업회의 창립과 ‘권업신문’ 발간에 공헌했으며 1906년 10월 서울에서 애국 계몽단체인 한북흥학회를 조직하고 서북학회의 서북협성학교 설립 초기 재정을 전담해 일제 측으로부터 위험인물로 분류되기도 했다.
김학만 선생은 권업회 초대 총재로 기반을 다지고 초기 연해주 한인사회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최초의 한인 학교인 ‘계동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을 맡았다. 또한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거류민회 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이상설 등과 성명회를 조직해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으며 연해주·중국 한인들의 주요 요충지인 중국 흑룡강성 일대에 한인 정착촌 ‘한흥동’ 건설사업도 적극 추진했다.
권업회 창립과 ‘권업신문’ 발간을 후원한 최봉준 선생은 함경도 일대의 소를 러시아 군대에 수출하는 무역을 통해 자본가로 성장해 독립에 재정적 후원이 가능했다. 최봉준 선생은 1908년 2월 선생은 러시아 한인사회에 간행된 최초 신문인 ‘해조신문’ 창간과 ‘계동학교’, 그리고 ‘권업신문’ 창간에 재정적 지원을 했다. 또한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 한인 자치기관인 고려중앙총회를 조직하고 기관지인 ‘청구신보’를 창간하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권업회 조직을 통한 활동으로 러시아에서 한인사회 교육과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에 큰 기여한 공로를 기려 정부에서는 이종호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김학만 선생에게 201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그리고 최봉준 선생에게는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