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장검 두 자루 국보로 지정 된다
충무공 전집, 난중일기 등 문헌 자료는 일찍이 국보로 지정
충무공 검 6자루 중 4자루 남아... 문헌에 언급된 쌍룡검은 어디에?
2024-06-23 취재기자 황지환
문화재청이 22일 이순신 장군의 장도 두 자루를 국보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순신 장도’는 지금껏 조선시대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의 숭고한 행적이 서려 있어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국보로 지정 예고된 '이순신 장도'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이순신 유물 일괄'에 포함되었던 칼로, 길이가 약 2m에 달하며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은 한 쌍(두 자루, 2병)이 각각 칼집을 갖추고 있다. 이순신 장도의 실제 크기는 다음과 같다.
* 규격
- 장도 1: 칼몸 196.8cm, 칼날 137.3cm, 칼자루 59.5cm, 무게 4.32kg
- 장도 2: 칼몸 197.2cm, 칼날 137.8cm, 칼자루 59.4cm, 무게 4.20kg
- 칼집 1: 칼집 길이 144.5cm, 가죽 끈 길이 87.0cm, 무게 1.40kg
- 칼집 2: 칼집 길이 144.5cm, 가죽 끈 길이 92.0cm, 무게 1.24kg
이순신 장도 두 자루의 외형적 특징은 다음과 같은데, 장도 1과 장도 2의 칼자루는 모두 나무에 어피(魚皮)를 감싸고 붉은 칠을 하였다. 또 칼자루 일부분에 직사각형 금속판을 댄 후 검은 가죽끈을 X자로 교차해 감아 칼자루를 잡을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다.
이순신 장도의 중요한 특징과 상징적인 부분은 바로 칼날에 새겨진 시구(詩句)다.
외날의 칼날은 칼등 방향으로 조금 휘어 있으며, 칼날의 단면은 칼날의 위쪽과 아래쪽의 각도를 보았을 때 가장 보편적인 육각도(六角刀) 단면이다.
장도 1의 칼날 위쪽 부분에는 이순신이 직접 지은 시구 ‘삼척서천산하동색(两尺誓峨嵋河動色)’이 새겨져 있다. ‘세 척이나 되는 검 앞에서 하늘에 맹세하니 강과 산이 두려워 떨고 있다’ 라는 뜻이다.
장도 2의 칼날 위쪽 부분에는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江山)’는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적의 피가 산과 강을 적시는구나’로 해석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난중일기를 비롯한 이순신 장군의 기록물은 일찍이 국보로 지정된 바 있다. 그런데 장수의 상징인 이순신의 장검은 왜 지금껏 국보로 등재되지 못했던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첫째 장도가 살상용 무기 때문이란 분석이 있다. 사람을 죽이고 해를 입히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를 국보로 지정하는 데에 대한 부담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한국 정서상 무(武)를 경시해서 그런 것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이순신이 남긴 ‘임진장초’, ‘충무공 서간첩’, ‘난중일기’가 모두 국보로 지정됐지만 이순신 장군의 기상을 가장 잘 상징하고 있는 충무공 장검이 국보로 지정되지 못한 까닭이란 말도 있다.
현재 이순신 장군이 실제 사용했거나 선물 받았다고 전해지는 검은 총 여섯 자루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쌍둥이 검 외에도 명나라 황제가 충무공에게 선물한 ‘귀도’와 ‘참도’가 있는데,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경상남도 통영 충렬사에서 소장 중이다. 나머지 두 자루는 이순신 장군이 실제 전투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쌍룡 검이다. 이 쌍룡 검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미술대관 도록 속’에 사진으로 남아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실제 전투에서 사용했던 쌍룡 검이 그 주인공이다.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