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 희망의 집에서 비상(飛上)을 꿈꾸는 한명규 씨를 만나다

2013-01-16     김민정

한명규 씨는 어두침침한 굴다리 속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실패와 좌절, 고난을 몸소 경험한 그는 도저히 살아갈 힘이 나질 않았다. 한 씨는 달려오는 차에 두 눈을 꾹 감고, 거침없이 뛰어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오는 차량 전조등에 눈이 부셔 주저하고 말았다. 그 순간, 과거 행복했던 때가 그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갔고,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2년 전의 일이었다. 명규 씨는 다시 살고 싶었다. 예전 것의 절반이나마 되찾고 싶었고, 새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다 부산 금정구 금사동에 있는 금정 희망의 집에 정착해 2년째 머물고 있다.

희망의 집에는 한 씨처럼 사회에서 낙오되고 상처받은 약 50명의 노숙인이 거주하고 있다. 노숙인들은 낮에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거나 희망의 집안에서 소일거리를 찾아 푼돈을 벌지만 대부분은 소주와 담배 값으로 써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그리고 밤이되면 이곳 희망의 집을 찾아 지친 몸을 온돌바닥에 누인다. 이렇듯 사회에 지쳐 희망의 집에 머물고있는 그들은 외부사람에게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


●그의 입을 열게 하다

한명규 씨의 말문을 열게 하는데도 지극정성의 설득과 몇차례의 접촉이 필요했다. 뜨거운 햇볕이 칼바람으로 변해 쌀쌀해진 9월 어느 날. 희망의 집 식구들은 다음 달 이사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 역시도 내게 기막힌 인생을 들려줄 ‘누군가’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속에서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우고있는 그를 발견했다. 나는 그에게 ‘삼촌’이라는 호칭으로 한발 먼저 다가갔다. 드디어 한명규 씨는 자신의 인생스토리를 한줄, 두줄 풀어놓았다. 그렇게 그와 나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인생의 동반자를 만난 그의 대학생활

한명규 씨의 고향은 충남 대전이다. 그는 여느 남학생처럼 운동과 친구를 좋아했으며 공부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했다. 그래서 그는 명지대학교 토목공학과에 76학번이 되었다. 명규 씨는 독재를 타도하며 뜨거운 청춘을 민주화 운동에 쏟아 보기도 했고, 잔디밭에 앉아 기타를 치는 캠퍼스의 낭만도 즐겨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캠퍼스 안에서 인생에 동반자인 아내를 만났다. 그는 “토목공학과에서 여학생은 단 네 명뿐이었는데 그 중 한명이 제 여자가 되었죠. 모두 우릴 부러워했어요”라고 했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을 했고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었다.


●공무원으로 보낸 평범한 가장의 삶

한 씨는 대학졸업과 동시에 결혼했다. 그는 서울시청에서 건설과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전공을 살렸기에 일하는 기쁨이 몇 배로 컸다. 그래서 항상 기쁜 마음으로 업무에 임한 그는 직장에서는 인정받는 직원이었다. 또한 가정에는 가정적이고 충실한 가장이었다. 공무원 생활동안 두 명의 딸아이도 얻었다. 그는 “평범한 삶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당시의 내 생활이 매우 행복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그 행복이 평생 갈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세계로의 도전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명규 씨는 다시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한국에 둔 채로 홀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친인척이 미국에 꽤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미국유학을 결정하고, 떠나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1년 6개월 동안 시카고에 머물었고,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건설학을 공부했다. 다시 시작한 학업에 최선을 다했으며, 한국에 있는 가족들 생각으로 타국에서의 힘든 생활도 견뎌냈다. 그는 공부에 틀이 잡히고 생활도 안정되면 식구들을 미국에 불러서 함께 살 예정이었다. 그런데 유학생활 2년 만에 그의 계획은 어긋나 버렸다.


●인생의 첫 슬럼프

한 씨가 미국 생활 2년째에 접어들 때, 그는 아내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명규 씨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보내주는 것도 사랑이며,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있기에 그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각오를 다졌어요”라고 했다. 그는 이혼과 동시에 학업을 그만두고, 미국에 살고 있는 친인척들과 동업을 시작했다. 그것이 그의 인생 그래프에서 첫 굴곡의 시작이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

이혼절차를 마친 뒤 그는 시카고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 차를 타고 3일을 달렸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달리고 싶었다. 그렇게 LA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그는 새 삶을 시작했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건축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에서 했던 토목공학과는 조금 거리가 먼 분야지만, 미국에 와서 꽤 공부를 했기에 자신이 있었다. 집을 짓고 또 짓고, 아이들 생활비를 한국에 꼬박꼬박 보냈다. 그렇게 일하며 시간은 흘렀다. 아이들은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했다. 아내 역시도 자신의 새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내의 남편과 친구처럼 만나며, 식사도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 할 땐 도움이 되어주기도 했다. 한 씨가 그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미국의 경제 위기로 인해 그의 건축사업이 부도가 났다. 두 번째 슬럼프이자 치명적인 위기였다.


●어둠의 세계에 들어가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함께 동업했던 친인척들과도 왕래를 끊었다. 그리고 그의 삶은 급전직하로 추락했다. 술을 매일 마셨으며, 마리화나도 손에 댔다. 그리고 LA의 갱스터집단에 잠시 발을 들여 놓았다. 마치 영화에서처럼 경찰에게 쫓겨 차량도주를 해보기도 했다. 한 씨에 따르면 미국 경찰들은 우리나라와 다르다고 한다. 그는 “미국 경찰은 한국과는 다르게 한사람이 죄를 지으면, 한 가지 죄목으로 체포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죄가 차곡차곡 쌓여 빼도 박도 못할 때 그때 최종적으로 체포하는 거죠”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갱스터 집단에 있을 때 마약을 제조하여 팔던 스물두 살 한국 대학생 세 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미국 유학도중, LA의 갱스터 집단에 발을 들였고 그러면서 마약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집단 속에서 마약 만드는 법을 배웠고, 또 팔아서 몇 억 원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이 행각을 알고 있던 경찰은 그들을 잡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 경찰은 자그마치 3년이란 시간동안 그들의 마약 매매를 지켜봤고, 자신들의 눈앞에서 그들이 마약을 거래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총살했다. 이 사건은 그 시절 한인신문 1면에 실렸고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큰 이슈가 되었었다.

 

●고국으로 돌아오다

한 씨는 20여년을 미국에서 살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그가 돌아올 땐 주머니에 한 푼도 없었다. 미국에서 한국행 비행기 티켓 살 돈만 겨우 마련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한국에 돌아온 것은 인생을 마감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에서의 생활 중 사업실패와 갱스터집단에서의 생활 등이 그의 정신을 황폐화시켰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악화시켰다.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지친 심신뿐이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해서 장소를 모색했다. 고향인 대전으로 가기에는 부모님에게 너무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과 행복했던 추억이 있는 서울에서는 그 추억을 짓밟는 듯한 느낌에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장소가 부산이었다. 그는 군대생활을 서면에서 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향했다. 굴다리의 차량 속으로 뛰어들 생각으로 갔는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때 자신에게 준 기회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었으며 그 판단을 후회 하지 않았다.


●비상을 위해 도약중인 한명규

명규 씨가 희망의 집에 거주한지는 약 2년이 다되어간다. 그는 희망의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한 달에 두 권의 책은 꼭 읽는다. 이것은 그의 평생의 생활 습관이라고 했다. 그가 미국에서 사업에 실패 했을 때, 갱스터 집단의 일원이었을 때 역시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발전의 밑거름이 독서라고 생각한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언젠가는 극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독서를 했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식을 쌓고, 소양을 키우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비록 내가 초라한 모습으로 희망의 집에 의지해 살지만, 나는 남들이 보지못하는 내 마음의 소양을 가득히 쌓는 중이에요. 곧 다시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하고, 가족들을 떳떳이 볼거에요”라고 했다. 그는 마지막말을 하면서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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