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에 혼인신고서 선물하기 유행..."아차" 하면 인생발목 잡힌다
상대방이 몰래 접수하면 꼼짝없이 기혼자...법원도 "번복 불가" / 정인혜 기자
최근 20대 커플 사이에서 혼인신고서를 작성해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다. 서식은 가까운 동사무소에서 누구나 구할 수 있고, 본적과 주민등록번호 등 간단한 정보만으로 손쉽게 작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혼인신고서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의미를 가지면서도 간단히 준비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생 최모(21) 씨는 최근 동갑내기 남자 친구와 만난 지 100일 되는 날을 기념하며 혼인신고서를 작성했다. 최 씨는 “특별한 선물을 찾던 와중에 친구 커플에게서 들은 혼인신고서가 떠올라 선물했다”며 “남자 친구도 뜻깊은 선물이라고 좋아했다”고 말했다.
최 씨는 최근 젊은 커플들 사이에서 혼인신고서를 작성하는 게 유행이라고 귀띔했다. 혼인신고서는 혼인 당사자, 부모의 기본적인 정보만 있으면 작성하는 데 별다른 걸림돌이 없다. ‘증인란’ 서명은 친구에게 부탁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작성한 혼인신고서는 구청에 제출하지 않고, 지갑에 넣고 다닌다. 최 씨는 “물론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고 나니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 더 생긴 것 같아 좋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결혼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며 우려한다. 대학생 아들을 둔 주부 이모(47, 경기도 수원시) 씨는 아들의 방에서 혼인신고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경험이 있다. 마음을 다잡고 혼인신고서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한 이 씨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혼인 당사자란에 적혀 있는 이름이 아들의 현 여자 친구와 달랐기 때문. 이 씨는 서둘러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고, 아들은 “헤어진 전 여자 친구랑 썼던 것인데 기념으로 놔뒀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 씨는 “되도록 세대 차이를 인정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혼인신고서를 재미 삼아 작성하는 건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며 “결혼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그냥 헤어지면 된다고 여길까 걱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본인 의사에 반해 진짜로 혼인신고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장난스레 작성한 혼인 신고서를 연인이 구청에 제출이라도 하는 날에는 꼼짝없이 법적 기혼자가 되는 것이다. 현행 법률은 혼인신고 시 불출석한 혼인 당사자의 신분증이나 인감증명서를 첨부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제출하지 않아도 접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 기자가 방문한 한 구청에서는 서류 기재사항과 관련 서류 구비 여부만 확인하고 혼인신고서를 수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사자의 인감증명서가 없어도 되냐는 질문에 해당 직원은 “원래는 안 되는데…일단 서류만 꼼꼼히 확인해서 주세요”라고 말했다.
이렇듯 상대방 의사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혼인신고가 가능하지만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피해자들은 소송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실제 올해 1월에는 한 20대 남성이 과거 헤어진 여자 친구가 본인의 동의 없이 혼인 신고를 했다며 혼인 무효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남성은 당시 20세였던 여자 친구가 별생각 없이 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했고, 본인은 결혼에 동의한 적도 없을 뿐더러 사실혼 관계로 지낸 적도 없으니 이는 혼인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재판부는 “혼인이 합의 없이 이뤄진 것이라고 인정할 충분한 증거가 없는 만큼 혼인 번복은 불가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충분한 증거 없이 혼인을 번복하면 법 근간이 흔들린다는 취지였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당연한 판단’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사실혼이 아닌 법률혼주의를 택한 국내 법제 아래서는 충분한 증거 없이 혼인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 대법원 사법 연감에 따르면, 2016년 1월부터 9월 현재까지 접수된 혼인 무효 소송은 총 207건이다.
가정 법률 전문 민주영 변호사는 “법률혼주의 국가에서 혼인 취소, 무효 등을 인정받기는 굉장히 힘들다”며 “만에 하나 생길 수 있는 불미스러운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혼인신고서 작성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