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맹무쌍한 6․25참전 용사가 말하는 ‘어제와 오늘’
올해는 우리가 살아평생 잊지 못할 해다.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이 그것의 대표적인 이유다. 우리는 북한에 대한 분노로 몸서리쳤고 희생 장병들에 대한 슬픔으로 얼룩졌다.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면 우리의 머리에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6․25전쟁이다. 이는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반세기 전의 우리 군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과연 6․25전쟁에 참가했던 그때의 참전 용사는 오늘날의 사건들과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경남 진주시 금산면에 살고 있는 하수득(80) 씨가 바로 그 대답의 주인공이다. 6․25참전 용사인 하 씨는, 전쟁이 터지자 당시 경기도 가평군에 있던 미군 3사단의 수색중대로 차출돼 미군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으며, 전쟁 기간을 포함해서 40개월 동안 군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때 입은 상처로 현재 국가유공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추위가 조금씩 기승을 부리던 11월의 어느 주말, 기자는 하 씨를 만났다.
기자와 만났을 당시, 하 씨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는 평소 텔레비전 뉴스를 즐겨 보는데, 그 당시는 도통 ‘즐겨’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연평도 포격 사건 때문이었다. 하 씨는 뉴스를 보고 나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 걱정이 많이 든다. 올해는 참 안 좋은 일이 많다. 이게 다 북한놈들 짓거리 때문이라는 게 화가 난다”라고 노기를 띤 목소리로 말했다.
또한, 하 씨는 이번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 장병들에게 깊은 애도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다가 죽은 장병들에게, 그것도 젊은 나이에 죽은 장병들에게 정말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회한에 가득 찬 표정으로 “6․25전쟁 때 많은 동료들을 이 땅에서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 그 동료들의 자손들을 또 다시 이 땅에서 잃고야 말았다”라고 말했다.
하 씨는 천안함 침몰 사건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 고 있었다. 그는 북한을 비난하는 것에는 이골이 난 모양인지, 그 사건의 원인에 대한 질문에 ‘북한 잘못 이다’라고 잘라 말하고는 더 이상 북한의 잘잘못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 사건 후의 일들을 얘기했 다. 하 씨는 천안함 침몰 사건이 북한 소행으로 밝 혀진 뒤에 우리나라가 북한에게 물리적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그렇 게 했을 경우 또 전쟁밖에 더 됐겠느냐? 전쟁은 사 람이 많이 죽는 끔찍한 일이다. 나는 전쟁을 반대한 다. 전쟁을 하지 않고 서로 잘 지내 통일이 되면 좋 겠다”라고 말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자는 그 ‘전쟁’이란 것의 참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대화를 나눈 곳은 그의 방이었는데, 따뜻한 아랫목에서 열변을 토한 탓인지 그는 매우 갑갑해 했다. 때문에 우리는 거실로 장소를 옮겼다. 하 씨는 부인이 준 냉수를 시원하게 들이키고 다시 기자의 질문에 응해주었다.
하 씨의 오른쪽 쇄골 밑에는 포탄의 파편 두 조각이 박혀 있다. 이것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미군부대 소속의 하 씨는 미군들과 함께 북한군 수색 임무에 나섰다. 수색이 끝나고 하 씨와 일행들이 변변찮은 소득없이 막사로 돌아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적군의 포탄이 날아왔다. 모두 몸을 숙여 포탄을 피하려 했으나 미군 한 명이 그 자리에서 포탄에 맞아 죽고 말았다. 하 씨를 포함한 모두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허겁지겁 막사로 복귀했다. 안정을 찾은 하 씨는 자신 또한 포탄의 파편에 맞았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미군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아 수술은커녕 치료도 못 받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보니 파편은 몸속에 단단히 자리 잡게 되었고, 나중에는 파편을 빼내면 생명에 위험한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하 씨는 지금도 몸속에 포탄의 파 편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파편으로 인해 국가 유공자로서 조금이나마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 쇳덩어리들은 겨울이 되면 차가워져 서 하 씨에게 극심한 고통을 준다. 이러한 고통 에도 불구하고, 그는 “몸속의 파편들은 전쟁의 부산물이자 내가 전쟁을 잊지 못하는 이유다” 라며, 이 고통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한다.
6․25참전용사는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닌가 보다.
기자가 전쟁 중에 있었던 실화나 에피소드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자 하 씨는 흥미로우면서도 등골이 오싹한 얘기를 해주었다. 한국군의 병력 증대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한국군 부대로 옮겨온 하 씨는 동료들과 수색에 나섰다. 수색 도중, 한 동료가 적군의 총에 맞고 죽자, 하 씨와 동료들은 대응사격을 한 후 긴급히 막사로 복귀했다. 막사에 도착하자 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죽은 동료를 데리고 오라는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명령에 불복종할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그와 동료들은 그쪽에 적군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은 동료를 데리러 갔다. 이때,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 씨의 바로 앞에 있던 동료가 또 다시 적군의 총에 맞고 죽었다. 앞의 동료가 아니었다면 누가 죽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하 씨와 동료들은 시체가 되어버린 두 명의 동료를 업고서 막사로 돌아왔다.
그때를 회상하며 하 씨는 “그 때 내 앞에 있던 동료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하 씨는 평소 큰아들 부부의 비닐하우스 일을 돕거나 뒷산에 있는 밭을 일구는 것을 주업으로 삼아 생활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1〜2회 정도는 진주 시내로 나가 다른 6․25참전 용사들이나 노인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는 나이를 먹었어도, 일을 하고 움직여야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직접 그렇게 하고 있다. 하 씨는 “관절이나 몸이 아프다고 해서 집에만 있는 것은 몸을 썩히는 일이다. 움직여야 몸도 건강해지고 마음도 좋아진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인터뷰를 마치고 하 씨의 집을 나서자, 그는 손수 문 앞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었다. 반세 기 전에는 우리나라를 위해, 우리 국민을 위해 적군 과 싸웠던 6․25참전 용사는 이제 백발의 할아버지 가 되어버렸다.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외모가 변했다고 해서 그때의 그 마음까지, 그 정신까지 다 변한 것은 아니다. 한번 해병은 영 원한 해병이라고 했던가? 한번 6․25참전 용사도 영원히, 아니 죽어서도 6․25참전 용사다. 이들이 있 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안전한 공간에서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이들의 보호아래 우리는 우리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지금의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그들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아 야 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 한켠의 영웅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