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주택 친구를 '거지'라 놀리는 아이들...집 평수로 차별하는 막장사회
어른들이 자녀에게 빈부 차별 의식 심어...일부는 학교에 브랜드 아파트끼리 분반 요구 / 김민정 기자
주부 한모(35, 경기도 수원 영통구) 씨는 어렵게 임대 아파트에 입주했지만 5개월 만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임대 아파트는 비싼 집값 때문에 집을 구하기 어려운 저소득층을 위해 국가가 지어 주는 아파트로, ‘휴먼시아’ 아파트로 불리며 일정한 조건을 갖추면 누구나 입주할 수 있다. 한 씨가 이사를 간 이유는 초등학교 4학년인 자녀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기 때문이다. 한 씨는 “아이 친구가 아이에게 어디 사냐고 물어서 휴멘시아에 산다니까, 다른 아이들이 ‘그럼 휴거네, 휴먼시아 거지’ 하고 놀리고 안 놀아줬대요”라고 말했다.
최근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휴거’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휴거(携擧)'의 본래 뜻은 예수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할 때 구원받는 사람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휴거’는 '휴먼시아 거지'를 줄인 말로, 임대 아파트인 휴먼시아에 사는 아이들을 비하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이모(11, 경기도 수원 영통구) 군은 반장 선거에 나갔지만 휴먼시아에 산다는 이유로 반장이 되지 못했다. 이 군은 “반 친구들이 휴먼시아 사는 애가 반장 되면 다른 반 애들이 ‘휴거’라고 놀릴 거라며 ‘너는 반장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휴먼시아에 사는 아이들을 ‘휴거’라고 놀리는 것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일부 학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초등학생 3학년인 자녀를 키우는 이모(39, 충남 천안 동남구) 씨는 “요즘은 아파트 단지별로 엄마들끼리 모임을 가진다. 비싼 단지에 사는 엄마들끼리 모이면 휴거라는 단어를 쓴다. 이런 현상에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영향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이 씨는 “잘 사는 부모들끼리 학교에 가서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따로 분반해 달라고 학교에 건의도 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임대 아파트 아이들과 같은 학교를 통학구역으로 가지고 있는 일부 아파트 주민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학생들과 자녀를 같은 학교에 다니게 하지 않으려고 위장 전입까지 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 7월17일 JTBC의 보도에 따르면, 1,000세대가 넘는 영구임대아파트가 통학구역에 속한 인천의 한 초등학교는 전체 학생수가 300여 명으로 5년 전보다 절반 넘게 줄었다고 한다. 이것은 일반 학령인구 감소 속도보다 4배나 빠른 것. 반면 수백 미터 떨어진 또 다른 초등학교의 학생수는 800여 명으로 크게 늘어 한 학교는 과밀화, 다른 학교는 과소화되다보니 학급수가 학년당 3배 가량 차이난다는 것. JTBC는 "임대아파트가 통학구역에 속한 학교들은 평균 학생수가 400여 명인데 비해 인근 다른 학교의 평균 학생수는 1,100여 명에 달했다"며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서 대규모 영구임대 아파트가 있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전했다.
초등학생보다 더 어린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 또한 사회의 아파트 편가르기 현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 유치원 교사로 있는 강진희(35, 부산 진구) 씨는 “아이들끼리 서로 집 평수에 대해 묻기도 하고, 심지어 나에게 선생님 집은 몇 평이냐고 묻기까지 한다”며 “아이들이 벌써부터 집 평수로 사람의 가치를 가른다는 게 너무나 충격이었다”고 덧붙였다. 강 씨는 “유치원 아이들이 어려서인지 직접적으로 ‘휴거’ 같은 단어는 사용하진 않지만 사는 집, 집 평수, 부모님 직업, 자동차에 대해 서로 물어본다”고 말했다.
부동산을 하는 박상진(55, 부산 진구) 씨도 “확실히 예전보다는 브랜드 아파트를 찾는 부부들이 늘고 있다”며 “임대아파트라고 다 싸고 안 좋은 것이 아닌데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혀를 찼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경성대 사회복지학과 정규석 교수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 때문이 생긴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과정에서 물질적인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회가 됐다”며 “이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선 아이들에게 내면적인 가치가 소중한 것이라고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